계절이 깊어지면, 계절에도 색깔이 있고 냄새가 있다는 걸 모두가 안다. 그 계절이 지나면 또 잊어버리지만, 지금 계절이 깊어지면 이 계절의 색과 냄새가 어떤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계절이 시작 할 시기가 다가오면, 기온뿐만 아니라 눈과 호흡으로도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사람에게도 색깔과 냄새가 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변하면 대화뿐만 아니라 눈과 호흡으로도 사람이 변했다는 걸 느끼게 된다.
한 여자를 만났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서 자주 연락을 시도 하는 것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어쩌다, 어렵게 삐삐 메시지를 남기면 일주일이 지나서 답변이 아닌, 인사 메시지를 받았었다. 만나기도 어려웠다. 몇 번씩 만나자는 약속을 잡으려 했지만, 언제나 갑작스럽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었다.
대학생 새내기는 서로가 연인이 없더라도 서로 바쁜 편이었다. 교문 안에 갇혀 몰랐던 세상과 열심히 만나고 친분을 쌓느라 언제나 바빴기에, 같은 집단 내에 소속된 관계가 아니라면, 특별한 사이로 발전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랐다. 그래도 노력했었다.
나이가 들수록, 어려운 관계를 개선하는 게 매우 힘들고, 특별한 사이로 발전하는 건 한 쪽의 노력으로 쉽지 않지만. 그 시절에는 한 쪽의 부단한 노력으로도 가끔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우리가 그렇게 가까워 졌었다.
함께 여름밤 잠실야구장이 얼마나 행복한 장소인지를 확인 했었고, 초저녁의 가을바다가 사람의 심장을 머리위로 올려놓은 것처럼 흥분된다는 사실을 느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한 이불안에 있는 게 얼마나 끝내주는 일인지 서로 알게 해줬었다.
어린 우리들은 아끼는데, 익숙했다. 그 시절에는 남자가 더 부담하고, 이런 이미지는 별로 없었다. 상호간의 형편이 데이트 수준을 결정하고, 먹을거리를 준비 했었다. 어느 쪽이 더 큰 부담을 하고 그런 면은 없었지만, 인류의 역사가 그렇듯. 부족함은 사내 쪽을 불편하게 했었다. 그녀의 귀여운 투정에도 가슴 한구석은 비수로 찔린 것처럼 아팠었다.
우리에게 차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녀 때문에,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고 많이 아끼기도 했었다. 그런 사실을 알았던 그녀도 절약에 동참했었고, 맛있는 음식을 참고 라면을 먹기도 하고, 차비를 아끼기 위해 가능하면 가까운 곳으로 함께 자주 걸었었다. 통장에 모이는 푼돈을 서로 확인하며 언제쯤 작은 중고차 한 대를 살 수 있을지 상상하며 즐거워했었다.
그런데, 그게 너무 오래 걸렸다.
그녀에게서 다른 냄새가 났었다. 요즘 계절에서 느낄 수 없는 냄새가 났었다. 봄이 오려면 아직 멀었는데, 화사한 냄새가 났다. 이 계절과 안 어울리게 따뜻해 보였다. 그런 불편함은 약간의 짜증에도 우리를 다투게 했었다. 다투고 나서 별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서로 비웃어주면서, 그래도 그렇게 지냈었다.
아버지께서 소형 중고차를 하나 사주시겠다는 말에 너무 기뻐서, 그녀의 학교 앞으로 갔었다. 삐삐 메시지를 보내도 연락이 없어서, 그녀의 학교 정문에서 지하철로 향하는 길목에 포장마차에서 오뎅을 사먹으며 기다렸다. 주머니에서 몇 번이나 삐삐를 꺼내 확인하고, 드문드문 오뎅을 집어먹으며 그녀를 기다렸다. 그녀가 정문 근처로 나오는 게 보이는 것 같았다. 오뎅 값을 계산 하고 나오려는데, 좋은 고급 승용차가 그녀를 태우고 갔다.
특별히 싸우거나, 매달리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누구의 잘못이랄 것도 없었다. 어떤 게 사실인지 확인하지도 않았고, 뭐가 사실인지 궁금하지도 않았었다. 그냥 그렇게 헤어졌다.
몇 년이 지나, 군대를 다녀와서, 한 여름 잠실야구장에서 우연히 남자친구와 함께 있는 그녀를 만났었다. 그날, 그녀에게서 겨울 냄새가 났다. 그녀가 일부러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행복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나를 우연히 그런 장소에서 만난 게 불편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뭐가 그렇게 바빴는지. 돈 많은 캐나다 한인 2세와 결혼해서 캐나다로 갔다.
그녀가 돈 만 밝히는 그런 여자는 아니었다. 여자들이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단지, 나도 돈이 좀 많았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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