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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시판에 어울리는 성격의 글이 아니라 판단되면 토론마당으로 옮겨주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토론제기글이 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쟁점들들 포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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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을 구분짓는 기준에는 작가가 '소통'communication을 하고자 하는대상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신의 작품활동에 대해 '대중'과 적극적으로소통을 하려는 시도와, 대중보다는 자기 '자신'과 소통을 하려는 태도 차이에서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을 구분지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순수예술 또한 타자와의 소통을 중요시할 것이다. 하지만 타자보다는 자신과의 소통, 자기 자신의 더 깊은 내면 세계나 작품활동에 치중한 경향 등이 '순수'예술의 성격을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흔히 대중예술이라 여겨지는 장르 안에서도 좀더 순수예술에 가깝다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작품들 또한, 물론 대중과의 소통을 중요시하긴 하지만, 작가 자신에 초점을(일종의 '자기만족'에의 희구라 할 수 있겠디) 맞춘 듯 하다. 이것은 곧 작품에 대한 접근의 용이성과도 직결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순수예술이 보편적으로 '일방'적인 소통에 치중한다면, 대중예술은 좀더 '쌍방향'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다. 한걸음 더 나가 생각해볼때, 작가는 작품을 내놓고 사람들, 또는 비평가와 '소통'에 대해 일종의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표현하며 사람들, 혹은 비평가에게 핀트를 맞춰주는 작가도 있겠지만, 어떠한 목적 하에서(그건 착각일 수도 있고, 상업적인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핀트를 맞추기를 일부러, 혹은 몰라서 맞추지 못하는 것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비평가가 예술작품에 대해 비평의 칼을 들이대는 것이 작가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이러한 점에서 오히려 더 역설적으로, 더 적극적으로 작가에게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이 원하는 틀 안에서 소통을 시도했지만, 비평가는 작가가 원하는 틀 이외의 것에 대해서도 소통을 시도하는 것이니까.
답변 1-1
1)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고 싶어하지 않는 예술가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는 것으로 분석될 수 있다:
자신의 작품이 있다.
그 작품이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를 원한다.
2) 자신의 작품이라는 것은 그 작품의 실체에 나의 상상력, 나의 개성, 나의 표현욕구, 나의 느낌, 나의 결정, 나의 생각, 나의 솜씨가 '주로' 반영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그작품을 나의 분신으로, 나의 대상화로 여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출발점'은 자신이지 감상자들이나 지배적인 예술 규범이 아니다. 감상자들이 나에게 어떤 예술작품을 만들어낼 것을 요구하느냐, 어떤 작품을 만들어야 성공한 예술가로서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있느냐는 고려는 '거의'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작품이 우선 무엇보다도 나의 작품이어야 한다는 당위와 '양립'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만 한다.
3) 일단 나의 작품이 만들어지면 나는 그 작품을 알아주는 사람들이 있기를, 그리고 이왕이면 그 사람들이 많기를 바란다. 그러나 내가 대중예술가가 아니라 순수예술가라면 나는 처음서부터 그 사람들에 대중이 포함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순수예술이란 일상적이거나 실제적인 생활공간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일종의'전문' 영역, 그것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일반 대중은 갖고 있기 어려운 교양과 여유가 요구되는 그런 영역, 일반 대중은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영역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순수예술가가 되기를 결정한 순간 이미 대중과의 소통은 접어두기로, 대중예술의 스타만큼의 스타가 되고자 하는 욕심은 접어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스타가 되고싶어할 수는 있다.
4)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중예술보다는 순수예술에서 1)이 더 강하게 주장 혹은 관철되는 경향이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배적인 순수예술 규범에 짜맞춰 나온, 기존의 예술계에서 지배적인 비평적 관점에서, 그리고 다른 고민들 없이 오직 그 관점에서만 출발해 만들어진 순수예술작품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즉 많은 대중예술작품들이 면밀한 시장조사를 바탕으로한 기획과 관리와 광고를 통해 만들어지고 성공하듯이 어떤 순수예술작품들 또한 그렇게 만들어지고 성공할 수 있다. 물론 그 반대 경우도 가능하다. 어떤 대중예술작품들은 매우 '순수하게' 만들어지고 성공한다.
5) 어떤 예술작품이 '최초로' 순수예술에 귀속되는 순간, 그 귀속의 일차적 근거는 '그 예술작품을 만들어낸 예술가가 타자보다는 자신과의 소통, 자기 자신의 더 깊은 내면 세계나 작품활동에 치중'했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치중한 것 같은 포우즈를 취한다는 데 있으며, 그 포우즈 취함은 그 예술작품이 '순수예술계'가 '순수예술작품이 갖추어야할/고민해야할 요건/문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내려온 답변들에 대해 취하는 긍정적 태도, 그 답변을 구현하는 정도에 의해 확인된다. 물론 그 확인의 주체는 순수예술계이다. 가만히 따져보면 이 절차 - 제도적 절차!! - 는 순수하게 외재적이고 분류적이다. 이 절차는 얼마든지 1)에 해당하지 않는 예술작품들, '치중'하는 포우즈만 취했을 뿐 실제로는 '치중'하지 않은 예술작품들도 순수예술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다.
6) 따라서 나는 다시 한번 강조하게 된다. 우리는 '이념으로서의 순수예술(순수한 예술)'과 '제도로서의 순수예술'을 구별해야 한다.
답변 1-2
소통을 의도한 것과 그 의도의 결과물은 구별되어야 한다. 비평가는 그 의도보다는 그 의도의 결과물을 본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결과물을 의도로 본다. 이런 의미에서 의도는 의도하는 주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그래서 그 주체의 말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의도의 결과물 속에 있다. 실로 예술가가 말로 밝힌 창작 의도는 [훌륭한 비평가가 밝혀낸] 작품의 주제/내용/메시지/이념과 얼마든지 어긋날 수조차 있다. 이것은
1) 의도가 의도대로 실현된다는 보장은 없으며(계획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며)
2) 인간은 자신 속에 자기도 모르는 자신을 갖고 있는, 그래서 가끔 그 자기도 모르는자신이 내가 잘 아는 나의 의도를 배반하고 자신을 표현할 수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단, 결과물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은 결과물만을 주목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물을 어떤 의도로 읽기 위해 비평가는 그 결과물에 그 결과물의 의도를 비출 수 있는 거울을 들이대야/결과물이라는 단어들을 의미있는 문장으로 구성할 수 있는 문법을 들이대야 한다. 그 거울/그 문법은 단적으로 말해 예술가와 비평가가 공유하고 있는 세계, 공유하고 있는 생활 형태, 공유하고 있는 언어, 공유하고 있는 예술사 전통이다. 그러나 인간이 무엇을 가지고 있다(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그 무엇에 대한 해석을 수반하는 것이기에, 그리고 사람들마다 그 해석이 동일하다는 보장은 없기에, 엄밀히 말하면 예술가와 비평가는, 따라서 비평가들끼리도 완벽하게 동일한 세계/삶/언어/예술사 전통을 '공'유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문제는 누가 올바른 해석을 하고 있느냐이다. 올바른 해석을 하고 있는 비평가가 작품의 진실을 거머쥘 것이다.이 진실게임에 예술가도 참여할 수 있겠지만, 오직 또 한명의 비평가의 자격으로서만 참여할 수 있다.'내 작품은 내가 제일 잘알아'라고 말하는 특권적 입장에서는 참여할 수 없다.
질문 2
현대에 들어가면서 대중예술과 순수예술간의 경계가 점점 불분명해지는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대중예술의 포인트로써 접근용이성을 강조했는데 그에 따르면 일단 용어자체로서, 대중예술이나 순수예술이나 접근기회가 빈번해졌으므로 (인터넷이나 멀티미디어 영상물의 발달로-) 컨텐츠에 대한 접근이 쉽다는 측면에서는 구분이 힘들것 같고,주제의 접근성 측면에서는 대중예술은 코드가 2개이고 순수예술은 코드가 1개라고 했는데 사실 이건 다 다른것 같다. 고전 클래식 음악을 순수예술로 본다면 예를 들어 우리가 바하의 토카타와 푸가의 대위법이나 화성에 대해 잘 몰라도 (순수예술의 아름다움이나 창작자의 진정한 의도) 음악 그 자체로서 웅장함이나 전율을 느낄수 있다는 점에서 순수예술도 코드가 2개가 될수 있는것 같고, 대중예술도 물론 코드가 2개가있다고 생각한다.
답변 2
접근용이성에는 분명, 복제기술과 인터넷의 발전에 힘입은, 작품에 물리적으로 접근하는 것의 용이성도 포함된다. 그러나 핵심은 작품의 내용과 형식의 접근용이성이다. 즉 순수예술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는 것과 실제로 순수예술을 이해하면서 즐기는 것은 구분될 수 있다. 모든 순수문학 작품들을 염가본으로 온라인 구매할 수 있고 저렴한 클래식 시디의 구입도 용이한 오늘날, 나는 과연 순수문학 독자들과 클래식 감상자들의 상대적인 비율이 커지고 있는지 의심한다.
일정한 수준 이상으로 바하의 음악을 즐기기 위해 대위법이나 화성에 대한 이론적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얼마나 많은 대중이 그 수준에서라도 바하의 음악을 즐기는지 의심한다. 아마 바하의 음악 '일부'를 즐기는 대중은 어느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순수예술작품들, 특히 위대하다고 소문난 순수예술작품들의 생명은 작품 전체, 하나의 전체로서의 작품의 유기적 연관에 있다. 대중영화를 볼 때 마음에 드는 장면들이나 금새 파악되는 줄거리를 위주로 대강만 주의를 기울여 보는 것과 유비될 수 있는 방식으로, 금방 웅장함이 느껴지고 전율을 주는 부분들을 위주로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면, 정의상 그것은 클래식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다. 비닐하우스의 식물들이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선율을 애호한다고 해서 그 식물들이 모짜르트의 음악의 '모든' 진수를 즐긴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질문 3
'매트릭스' 나 '2001:스페이스오디세이' 와 같은 작품은 대중예술로서 널리 알려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그 해석에 있어서 난점도 많고 일반 대중이 작자의 진정한 속뜻을 모를수도 있다는 점에서 주제의 접근성이 낮다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대중예술 중에서도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것과 어렵게 느껴지는 순수예술을 어떻게 구분하고 쉬운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에서도 접근이 용이한 것들을 어떻게 구분하냐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순수예술은 무엇무엇이고 대중예술은 무엇무엇이 있다는 식으로 일반화해서 말하기가 힘들고 또 각각의 컨텐츠들이 시대에 따라 다양하게 비춰질수 있으므로 결국에 있어서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구분은 무의미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것은 현대인들의 지적수준이 높아졌다는 점과 순수예술을 감상할 기회가 얼마든지 있다는 점에서 이제 순수예술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잃어가는 것이 아닌지,,그리고 그것이 아직도 권위적인 자리에 남아있다면 순수예술이라고 치부되어 왔던것들만을 즐기던 계층의 속셈이 아닌지 (지식 권력론과 관련하여)..
p.s : 예술성보다 상업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대중예술과 순수예술간의 분류를 한다는 것은 힘든일이라고 생각한다. 순수예술도 충분히 상업화 되가고 있으며 많은 대중들이 즐기는 대중예술중에도 상업성을 추구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답변 3
대부분 동의한다. 따라서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칼같은 구분이나 대중예술의 정의 문제보다는 대중예술과 순수예술의 위계적 구분에 대한 제도화된 통념들[과 그통념들의 조건 및 기능]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것에 더 관심있다. 실로, 순수예술에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예술작품이 허접쓰레기일 가능성으로부터 면제되는것은 아니다.
정의에 '집착'하지 않으면 접근용이성이란 개념은 '많은' 대중 예술작품들과 '많은', 특히 사회가 위대하다고 도장찍어준, 순수예술작품들을 구분하는데, 훌륭한 순수예술작품들의 훌륭함을 설명하는데 도움을 주는 개념이다.
지적 수준이 높다는 것과 예술적 교양이 높은 것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똑똑하고 아는것 많지만 예술을 반성적으로 감상하는데 무관심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다. 게다가 지적 수준이 높아진 만큼 사회도 더 복잡해지고 커졌다. 절대적으로는 현재의 대중이 과거의 민중보다 지적 수준이 높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 높아짐을 상쇄하고도 남는 수준으로 사회가 더 불투명해졌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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