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특수성(特殊性)과 절대금기(絶對禁忌-)
시는 일반문학과는 확연히 차이를 가지는 문학 갈래이다.
시인은 그 스스로의 심상과 배경에 심취하여 작시(作詩)하는 것, 단지 범인의 시와 시인의 시에 다른 점이 있다면, 담으려 하는 것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나타내는가에 있다.
만약 `한`을 담는다면, `한`을 담는 용기를 만들어야 한다. 한을 찍어낼 도구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시인(詩人)의 역할이다.
아직까지 다른 문학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 하다.
진정으로 다른 것은, 시는 일방적 주제 전달이 아닌, 시인과 감상자의 교류도 아닌, 독자 그 자신을 담는 용기라는 것이다.
삶의 색깔이 완연히 서로 다른 인간들로 채워진 세상에서, 시의 세계의 주인은 시인이 아닌 감상자다. 완벽한 차단에서의 사고가 감상자를 담는다.
수 많은 타자(他子)와의 처절한 공유에서 탈출할 수 있는 문학이었기에 시는 아름다웠고,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작금의 문학교육은 이를 완전히 배제한 것이다.
무례하게도 감상자의 세계, 자아의 그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에 한계를 심어줌으로서, 인간 스스로의 더러운 숙명인 `유형`에 시는 오염되었다.
문학에 대한, 시에 대한 인간의 지고(至高)한 사고를 막는 그 수치화의 산물에, 가늠좌의 산물에 나는 인간으로서 그 인간의 것들에 분노한다.
시를 봄에 있어 옳고 그름이 있단 말인가? 심즉사(心卽思)가 곧 자아의 절대진리가 되는 것이다.
어찌, 그 많은 인간들의 사고를 하나, 하나, 하나!!라는 한계를 심는가? 혹독한 사회에서 어린 날개를 펴 비상해야 할 조그마한 나비들에게, 시라는 현대문명에서의 유일한, 진정한 자유의 마지막 보루를 소위 `배웠다는 사람`들이 짓밟고 있다.
그 잘난 문명의 교육에 인간의 사고방식의 진보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작금의 문학, 특히 시에 대한 교육을 받는, 권리있는 나비들만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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