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듄이란 작품에 대해 들은지는 10여년이 넘어가지만 읽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는데 추석연휴 동안 결국 읽었습니다. 국내에서 번역된 6부까지 다 읽은 것이 아니라 4부까지만 읽었습니다만 (국역본으로는 12권까지가 되겠습니다) 연휴동안 읽으면서 든 생각은 이렇습니다: 해외 장르문학에 비교하자면 국내 장르문학은 너무나 상상력이 빈곤하다.
듄이란 작품을 들어보지 못한 분도 있겠기에 간단하게 소개를 하면 듄은 SF 장르에서 손에 꼽히는 걸작으로 평가되는 작품입니다. 듄이란 작품이 걸작으로 꼽히는 이유는 작가의 상상력 때문입니다.
상상력이 무엇이냐는 논의에 앞서 먼저 듄이란 작품을 소개하면 듄이란 작품은 SF이면서 SF답지 않은 작품입니다. 초광속항해를 하는 세상에서 동물이 끄는 달구지가 돌아다니고 무기는 칼과 독침이고 전쟁의 주력은 보병이며 건물은 돌과 진흙벽돌을 씁니다.
이 작품을 영화화한 것을 보면 배경을 중세 이슬람 문명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어보면 그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중동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세계를 장악한다면 이런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을 흉내낸 기계를 만들면 안된다는 종교적 도그마에 따라 컴퓨터도 없는 세상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만여년도 더 뒤의 세상인데 말이죠. 컴퓨터가 허용이 안되는 세상이니 다른 기술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이 작품이 그리는 세계의 하드웨어는 우주항해를 한다는 것을 빼면 사실 지금보다 더 못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질로 문명을 보았을 때 지금보다도 더 못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이 그런 희한한 세상을 그리고 잇는 이유는 주제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존재자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라고 묻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이며 그런 주제에 답하기 위해 작가는 그에 걸맛는 배경으로 종교가 우세한 세상이 필요했고 종교가 우세한 세상을 만들다 보니 물질적으로 뒤떨어진 세상이 필요햇던 것입니다.
듄이란 작품의 줄거리에 관해서는 검색을 해보시면 알 수 있을 것이니 이 작품에서 특기할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가 쓴 10권에 대한 서평입니다.
원서 4권의 시작인 10권은 앞에서처럼 존재의 의미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에서이다. 교과서에도 실리게 된 '드래곤 라자'라는 판타지 소설의 저자는 시간의 차이에서 어쩔 수 없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존재의 의미를 주제로 삼고 있다. 100년도 못사는 인간과 수천년을 사는 엘프, 불멸에 가까운 시간을 사는 드래곤들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역사를 그리면서 그들의 충돌은 서로 다른 존재자들이 다른 시간의 길이를 가지면서 다른 존재를 가지게 되었고 서로 존재가 다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게 된 것을 보여준다.
듄의 처음에는 드래곤 라자의 저자가 쓴 다른 책인 퓨쳐 워커에서처럼 미래를 걷는 자 즉 미래가 곧 현재인 자를 보여준다. 그러나 퓨쳐 워커와 달리 듄에서 미래를 걷는 자는 처음부터 미래를 걸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을 걷다 각성한 자이기에 갑자기 존재가 달라진 존재자가 자신의 달라진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려하는가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다음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저자는 조상의 자아와 기억을 갖게 된 존재자를 그리면서 현재를 살아가게 되어 있는 존재자가 거의 무한의 과거로 자신의 존재가 확장되었을 때 어떻게 되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4권에서 저자는 무한의 과거와 무한의 미래를 현재로 살아가는 존재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한다.
4권은 아트레이드 황조의 2대 황제인 레오의 통치가 3500년을 이어진 시점에서 이야기를 진행한다. 3500년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리고 레오는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모래벌레로 변하기 직전의 벌레의 몸을 가진 자이다.
인간의 몸이 아닌 인간의 존재와는 다른 존재를 갖는 레오는 어쩌면 그가 제국의 신민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신인지도 모른다. 그가 모래벌레이든 신이든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에는 두가지 인간이 아니게 된 유형의 인간을 등장시킵니다. 첫번째는 미래를 볼 수 잇는 자입니다. 두번째는 유전적으로 이어진 과거 조상들의 기억과 자아를 그대로 가지고 태어난 일종의 군생체입니다. 두가지 유형의 인물형은 위에서 제가 쓴 대로 현재를 현재로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무한한 미래와 현재가 하나가 되었거나 무한한 과거와 현재가 하나가 된 경우이죠. 그리고 3부와 4부의 주인공은 두가지 유형 모두에 해당합니다. 이런 시간을 사는 자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작가는 인간이었다가 인간이 아니게 되는 인물들을 그리면서 인간의 존재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런 질문을 하기 위해 저자는 우리의 상식적인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배경으로 깔아 우리의 상식이 소외(브레히트적 의미에서)시키는 것입니다.
다음은 1권에 대해 제가 쓴 서평입니다.
큰맘 먹고 잡은 이 시리즈의 첫권은 기대대로였다. SF 사상 최고의 걸작이란 평가에 걸맞는 책이었다. 어릴 때 SF를 읽어본 경험으로는 SF는 범작일 때 SF라는 장르 자체가 주는 매력이상이 되지 않는다. 북미와 유럽인들의 취향에 맞는 SF라는 장르는 한국으로 보면 무협이나 요즘 유행하는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장르의 매력은 비현실성이다.
"사람은 30이 넘으면 소설을 읽지 않게돼. 현실이 더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지." 지금에 와선 줄거리도 희미하지만 하일지의 데뷔작 '경마장 가는 길'에서 지금까지 기억나는 말이다. 어차피 종이장에 적는 어떤 것이든 현실을 그대로 담을 수는 없다. 한권의 책이 되려면 나름의 줄기가 있어야 되고 그 줄기가 만들어지려면 어쩔 수 없이 현실을 가지치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지치기된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현실을 알게 되면 현실을 담는다는데 의미를 두지 않게 되고 현실을 떠난 상상력을 즐기게 되는 것같다. 이 소설은 바로 그런 어른들을 위한 환상을 제공한다.
지금도 아들이 쓰고 잇는 분량을 제하고도 아버지 허버트가 쓴 6권, 번역으로 18권이 되는 이 시리즈의 도입부가 되는 이책은 바로 저자가 수십년에 걸쳐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를 처음 만나는 곳이다. 그리고 이책을 처음 열었을 때 우리 앞에 펼쳐지는 세계는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시공간이다. 지금으로부터 만년후의 우주로 뻗어나간 인류가 사는 세계는 지금과는 다르다. 아니 과거와 비슷하다.
공작이 있고 남작이 잇으며 서로 영지전을 하는 황제가 있는 세계. 귀족가문이 잇고 가신이 있으며 행성이 영지인 세계. 무기는 총과 칼이 공존하는 세계. 종교적인 도그마 때문에 인공지능은 전멸한 세계. 일은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으로 해야 하는 세계. 그러나 은하계에 걸친 우주여행이 있고 행성규모의 기후조절이 가능한 세계. 유전자조작에 의해 특별한 능력을 부여하고 관리하는 세계. 여러가지가 시대착오적으로 섞여있어 기시감과 함께 흥미로운 이질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 낯설면서도 익숙한 그 세계로 들어가면서 독자는 저자가 이런 상상으로 만들어진 세계에 어쩔 수 없이 깔릴 수 밖에 없는 그 세계만의 용어들과 언어들을 만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단어들의 의미를 찾아 책뒤의 단어장을 계속 봐야 한다. 10년도 더 전에 끝난 외국어공부를 다시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런 낯선 세계와 만나면서도 독자들에겐 그것이 기분좋은 흥미로운 낯섬으로 다가온다. 깊이있는 심리묘사 때문이다. 사람은 만년이 지나도 우주에 살아도 초능력을 가져도 예지능력을 가져도 어차피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니 인간은 인간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권만으로 이책이 그리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알수도 없고 평가할 수도 없다. 그러나 1권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리즈가 상상력을 무기로 한 장르의 힘만이 아니라 가장 뛰어난 그 장르의 걸작들이 보여주는 힘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장르의 걸작들은 우리가 익숙하지 않은 배경에 우리의 사고를 밀어넣어 상상력이 주는 즐거움과 함께 그 세계에서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잇다. 그리고 1권에서 알 수 잇는 것은 이 시리즈가 그런 걸작이 갖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한국의 장르문학은 이런 상상력이 있는가입니다. 앞에서 썼던 드래곤 라자 같은 작품과 같은 레벨에 놓을 수 잇는 작품이 있는가입니다.
불행하게도 별로 없다가 답일 것입니다. 그런 상황은 무협도 판타지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장르문학의 상황은 상상력도 주제도 없는 1회용 시간때우기 이상이 아닐 겁니다.
예를 들어 대체역사를 봅시다. 우리나라에서 나온 작품중에 대체역사의 정의에 들어맞는 작품은 아마 비명을 찾아서 와 천룡전기 정도에 불과할겁니다. 두 작품은 What if?라는 대체역사 장르의 정의를 그대로 따릅니다. 이랬으면 어땠을까 라고 물으면서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것이 대체역사입니다. 즉 상상력을 통해 현재를 다시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작품 이외의 나머지 대다수는 거의 삐뚤어진 민족주의의 자위용 이상이 되지 않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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