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검객의 자존심, 김명순(1561~?)
김명순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큰 활약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조선 시대라는 특성과, 전란의 시대라는 악재가 겹친 결과이다. 김명순의 본관은 절치(絶値), 자는 염계(染界), 호는 천호(泉湖)이다. 기록에 따르면 김명순은 키가 5척 정도에, 자기 키만한 장검을 주로 썼다고 전해진다. 무관 집안의 맏아들이었던 김명순은 선조 때에 무과에 응시하였으나, 낙마하여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후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피난하자, 5월경 금강산 언저리에서 자기 마을의 장정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김명순은 주로 지리를 활용한 기습 공격을 하였는데, 전승에 따르면 '3일 밤낮을 말을 타고 주위를 둘러본 끝에야 비로소 그는 전략을 세우고 병사들을 배치하였다' 라고 적혀 있다. 신중한 성격의 소유자인 그는 대부분의 기습 공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서술에 있어 놀랄 만한 부분은 그의 신기(神技) 라고까지 칭해지던 검술이다. 작전에 있어서의 신중함과는 달리 그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검을 들고 선두에 서서 돌격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여주에서의 패배 이외에는 단 한 번의 패배도 없었다고 전해진다. 일본군의 신무기였던 조총의 사정거리나, 상대적으로 일본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던 한국의 검술을 생각해 볼 때 김명순은 조선 검객의 자존심이었던 셈이다. 서술에 따르면, '그의 검은 유려한 나비처럼 지나가며, 초생달 같은 호를 그리며 적을 베었다... 적은 신기와 같은 그 검술에 속수무책으로 떨어져 나갔고, 마치 표범 같은 그의 움직임에 적은 총을 맞추지 못했다...' 라고 쓰여 있다.
그의 의병대는 이후 응단(鷹團)이라 불리며 각지에서 소규모 기습 전투만을 감행했고, 그로 인해 커다란 전투에는 김명순의 이름은 올라 가지 않게 된다. 병사들에게서 불패의 명장, 구국의 영웅이라 불리던 김명순은 이후 그 공적을 인정받지만, 전쟁 동안에 겪은 아들의 죽음 때문에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고 홀로 산 속에 들어가 은거하게 된다. 그리고 김명순의 이름은 그의 은둔과 함께 역사 속으로 묻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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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도 있었군요... 5척(150cm) 장검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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