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의 진보는 그 속도가 느리다. 위대한 결과란 당장에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새무엘 스마일즈(Samuel Smiles)
이 말은 진정 옳은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는 최상의 진보는 절대로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오지 않으니까요. -마치 영어공부를 잘 하려면 영어 단어부터 시작해서 성x영문법 책을 읽으며 적어도 3년은 삽질해야 하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이 말이 실현되는 모습을 한 작가 안에서 보고 있습니다.
자건 - <Maerchen>
기실, 나는 그의 글을 문피아에서 처음 본 것이 아닙니다. 약 3년 전에 그가 타 사이트에서 풍운비양(風雲飛揚)이라는 역사 소설을 연재할 때 나는 처음으로 그의 글을 읽었습니다. 머릿속에 깃털만 풀풀 날리던 그 시절에 그의 글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저
‘아, 이거 좀 재밌네. 근데 내 취향은 아냐.’
하고 넘겼습니다. 당시의 저는 뭣도 모르고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글만 찾아다녔으니까요. 앞부분만 조금 읽다가 ‘재미없어.’란 생각으로 그의 글을 덮어버리고 그 뒤로 2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트에 올라온 비평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Maerchen이란 제목의 글에 대해 올라온 흥미로운 비평을 보고 다시 그의 글을 찾았습니다. 그래도 2년 사이에 머릿속의 깃털을 조금 제거한 저는 공장 양산형 판타지 소설과 진짜배기를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을 조금이나마 기른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뭐, 그냥 반해버렸죠.
그 당시에도 그 사이트에서 Maerchen은 대체로 좋은 반응을 거둔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출판 이야기가 오간 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Maerchen의 출판은 좌절되었죠. -출판사가 그의 글을 흔히 말하는 ‘상업성’이 없다고 판단하였으니까요. 그때 정말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도 그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상업성’이 있는 글을 쓰지 못하는 자신을 두고 개인 블로그(와 비슷한 것)에 괴로움을 토로한 글을 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만약 그 때 삽질을 그만두고 상업성 있는 공장형 판타지를 찍어내거나 아니면 아예 펜을 꺾어버렸다면 나에게도 그냥 ‘아, 그 사람 실력은 있는데 출판 안 돼서 펜 꺾어버린 불쌍한 작가’로 기억되었을 겁니다. 그가 그 삽질을 그만두지 않았기에, 저 역시 이렇게 펜을(혹은 키보드를) 들어 그의 작품을 추천할 용기를 내었습니다.
그의 글은 평범하게, 조금은 밋밋하게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성질 급한 독자들께서는 여기서 그만둬버립니다.(그게 아마 그의 글이 처음에는 조회수가 높다가 갈수록 낮아지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주인공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객관적이고 조금은 무감정한 시선으로 비추면서 그의 글은 연주를 시작합니다. 첫 번째 에피소드인 청백(靑白)의 시리우스(Sirius) 역시 처음 볼 때에는 몰입감이 덜 합니다.(그의 글의 단점이라면 이것이 되겠습니다 - 초반의 몰입감이 부족하다는 것이죠)
그러나 마치 “귀여운 아가, 이리 오너라. 재미있는 놀이를 하자.”라고 속삭이는 슈베르트의 마왕처럼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샌가 그의 글 가운데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Maerchen의 주인공은 보석을 훔치는 장안 최고의 괴도, 그리고 추억을 훔쳐 보석 안에 박제하는 박제사이기도 하죠. Maerchen의 부제가 <박제된 추억의 이름>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현실을 가장한 비현실, 비현실을 가장한 현실 속을 넘나들며 보석과, 그에 얽힌 사랑과 증오의 추억을 훔쳐갑니다. -그것이 이 글이 로맨스라 불리는 이유일 것입니다.
Maerchen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역시 그 에피소드들이 본 내용전개는 삼국지에서 따왔으나 전혀 다른 시각으로, 전혀 다른 구성으로 뒤바뀌어 현대적인 감각으로 재현되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일례를 들어, 현재 진행중인 다섯 번째 에피소드 ‘암적(暗赤)의 알데바란(Aldebaran)’에서는 삼국지의 유표 일가가 등장합니다. -전혀 다른 구성으로 말이죠. 그리고 지금 그 유표 일가를 둘러싼 연쇄 살인사건의 이야기가 진행중이죠. 자세한 내용은 미리니름을 방지하기 위해 생략하겠습니다.
사실은 Maerchen의 추천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또 Maerchen이 문피아까지 진출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인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거야말로 그에게는 큰 기회가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거의 모든 분들이 인정하시다시피, 문피아는 현존하는 인터넷 소설 연재 사이트들 중에서 가장 수준 높고 자유로운 비평이 이루어지는 곳이니까요. 그래서 그의 글이 당연히 마땅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그냥 지나가다시피 문피아에 들렸습니다.
-근데 이게 웬걸? 어째서 조회수가 이 정도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그 대답은 금방 찾을 수 있었습니다. 문피아의 독자분들은 압도적인 분들로 남성분들이 많으신데, 장르가 ‘로맨스’라고 설정되어 있는 Maerchen은 당연히 조회수가 낮을 수밖에 없던 것이었죠.(뭐, 그다지 탓할 마음은 없습니다. 남성분들이 로맨스를 멀리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니까요)
전 무언가 일이 실패했는데 그걸 남 탓으로 돌리고 한탄만 하는 사람을 경멸합니다. 또 적당한 자리가 주어졌는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도 싫어하죠. 하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너무 안 좋다고 생각해서 이렇게 쓰지도 못하는 글을 찌끄려 보았습니다. 물속에 던져져버린 싹을 꺼내서 땅에 심어주는 것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로맨스’ Maerchen이 아닌 그냥 Maerchen을 보시기를 원합니다.
문피아에 와서 처음 쓴 이 추천글이 어떤 반응을 받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분들은 정말로 Maerchen에 관심을 가지고 보러 갈 수도 있겠고, 어떤 분은 스크롤의 압박으로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겠고, 또 어떤 분들께는 과도한 추천이라 생각되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출판 거절과 독자들의 냉대 속에서도 삽질을 멈추지 않았던 그를 좋아하고 또 그의 글을 사랑하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이렇게 적어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자건, 그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듯이, 그 희박한 희망에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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