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드 엔딩 이야기 나온 김에 글 적어봅니다. 저도 해피 엔딩을 선호하지만 새드 엔딩도 구성이 괜찮다 싶으면 여운이 오래 가서 좋더군요. 물론 조건은 몇 있긴 하지만.
1. 부조리한 세계관에 주인공이 패배하는 이야기
뭐... 속 시원한 이야기를 보고 싶다면 주인공이 부조리한 세계관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좋긴 하지만요. 이런 이야기에도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습니다. 작품을 보고 나서 그 부조리한 뭔가에 대해 자각하고 경계심을 가지게 되면서,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달까요.
예컨대 한 SF 애니를 들자면... (스포일러 문제로 제목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나름 유명한 작품이니 아실지도) 인간이 아닌 컴퓨터가 ‘범죄를 저질렀거나 범죄를 저지를 소지가 다분한 인물’에게 형벌을 부과하는 시스템이 성립돼 있는데요.
얼핏 보면 굉장히 이상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 컴퓨터가 분석 불가능한 ‘특이 체질의 인물’은 무슨 범죄를 저질러도, 대량살상을 저질러도 심판하지 못하는 오점이 있습니다. 이 오점을 참지 못한 형사는 시스템이 아닌 자기 판단에 따라 특이 체질의 범죄자를 총으로 쏴 죽이러 갑니다. 이 때문에 형사는 정의를 실현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스템이 성립돼 있는 나라에서는 살인자로 취급받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건담 0080을 예로 들 수 있겠네요. ‘전쟁’이라는 부조리하면서도 뭐 어떻게 손댈 수도 없는 문제 때문에 인물들이 희생되는데요. 개인적으로는 건담 시리즈 중에서 가장 수작으로 꼽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런 류의 이야기는 세계관의 부조리한 정도가 심하면 심할수록 보는 맛이 있습니다.
2. 얼핏 보면 주인공이 이긴 듯 하지만 잃은 것이 더 많아 새드 엔딩인 경우
예시로는 콜 오브 듀티: 모던워페어 시리즈.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국민 학살도 서슴치 않는 악당을 3편에서 잡긴 잡는데, 주인공 일행들이 어마어마한 희생을 겪게 됩니다.
마지막에는 그 악당을 잡아서 교수형에 처하듯 처치하는 장면이 나와 속이 시원했는데, 그 장면 뒤로 주인공이 시가를 물고 허탈하다는 듯이 숨을 푹 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딱히 대사는 없었지만, 이 악당을 잡기 위해 희생된 부하 캐릭터들이 절로 떠오르더군요.
한 마디로 게임 속 세계 관점으로는 해피 엔딩을 맞았지만, 주인공 관점으로 보면 새드 엔딩인 셈입니다. 이 복잡한 상황을 보고 있자니 참.... 가슴이 먹먹해지더군요. (겸사겸사 마X로프 잊지 않겠다)
3. 현실 비판물의 새드 엔딩
‘현실의 부조리함’을 작품 속으로 옮겨온 셈이니 1번과 같은 거 아닌가 싶지만, 막상 접해보니 다른 느낌이 나더군요. 뭐랄까. ‘속 시원히 현실을 비판하려면 이런 결말이 나는 게 맞긴 한데, 이런 결말을 지지하려니 내가 주인공들의 불행에 찬성하는 기분이 들잖아?’라는 이율배반적인 감상이 들어서요.
이때의 씁쓸함은 뭐... 1번을 뛰어넘는다고밖에 설명이 안 되네요. 특히 자기 자신이 잘못됐다고 여기는 현실을 풍자한 작품, 자기 자신이 불만스러워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작품일수록 그런 경향이 큽니다.
최근 예를 들자면 ‘바이오쇼크: 인피니트’. 근데 이건 19c 말~20c초 미국 역사를 약간 알아둬야 공감하기 쉬울 수도 있겠네요. 흠... 뭐, 우리나라 현대사에 대입해서 생각해도 감정 이입은 가능하긴 하지만.
덤. 생각해보니 3가지 유형의 이야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흥미로운 건, 제가 예로 든 새드 엔딩물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주인공의 불행을 초래한 뭔가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탓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죠. (1번- 작가가 만들어낸 부조리, 2번-악당, 3번-작중에서 풍자된 현실)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저것만 아니었으면 주인공들이 이런 꼴을 당하지 않았어!’라고 격렬히 분노할만한 대상이 있는 작품, 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이런 이야기는 꽤나 여운이 많이 남아요. 주인공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기 위해 새드 엔딩을 초래한 요소를 있는 힘껏 공격하게 되거든요. 그렇게 공격을 하면서 작품에 담긴 이야기를 몇번이고 되뇌이게 되고요.
개인적으로 새드 엔딩을 쓴다면 위와 같은 작품을 쓰고 싶네요. 단순히 새드 엔딩을 표현하기 위해 멀쩡한 인물들을 다 죽이거나 그러면 쓴 사람만 욕 먹잖아요? :)
덧. 홍보 쿨 타임 왔습니다. 글고 보니 방금 전 수 초 차이로 홍보글이 겹쳐서 눈물 머금고 홍보글 지운 분이 있는 듯 한데.... 두리번두리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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