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의 글들을 읽게되면 문득 진산이 떠오른다.
진산...
참 그리운 이름이다. 첫작품이었던 홍엽만리에 놀라움을 안겨주더니 정과검에 이어 결전전야(사천당문)에 이르러서는 그의 탁월한 글솜씨에 매혹당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산의 글은 무협소설을 읽는다기 보다는 한편의 에세이, 혹은 일반소설을 읽는 느낌이 무척 많이 든다. 그것이 여성이라는 이유에서라기 보다, 일반 작가지망생이었던 그의 경력에서 기인하는 까닭이 더욱 큰 요인이 아닐까싶다.
이런 진산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그리게 되면 백야라는 이름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무언가 다른 무협적 글쓰기..
진산의 섬세함? 맛깔스런 언어? 자연스러운 인간내면의 통찰?...분명 백야와 진산은 전혀 다른 작가이지만, 그 글속에 흐르는 문장력은 동류의 흐름을 느끼게 만든다.
그래서 백야의 작품들을 접하게 되면, 무협이라는 장르와 일반이라는 비장르의 혼합 혹은 조화를 맛보게 된다. 최근 백야의 연재물 '수라의 혼'에 나타나는 판타지적 설정 - 물론 색마전기를 비롯 몇몇작품에서도 술법이라는 설정이 등장하긴 하지만 - 이 그 연장선상에 닿아있는 건 아닌지 추측해본다.
이 작품 '취생몽사'는 백야작품중 제일 마지막으로 보게 되었다. 귀거래사, 살수전기,악인전기, 천하공부출소림, 백야로 의심되는 장한백설, 소항유사, 그리고 색마전기...
다른 작품들은 그런대로 구할수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취생몽사'만은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만했다. 서점의 구석중 구석에서 바라던 책을 찾는다는 것이 말그대로 별따기같은 일임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일...그래서인지..그렇게 고생아닌 고생(?)을 하며 구한 작품이라 그 기대는 자못..엄청나게 부풀어져 있었다.
취생몽사...라는 제목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거 제목한번 멋지게도 지었네라는 순박한 느낌이었다. 취생몽사의 뜻이 무엇일까라는 궁리를 제멋대로 한뒤에 사전을 뒤적이며 그 정확한 의미를 찾아보았다.
'취몽속에 살고 죽다'...단어그대로의 뜻..참 낭만적인 의미...그런데 이 낭만적인 단어의 속뜻은? ..아무생각없이 한세상을 흐리멍덩히 보낸다라는 다소 섬뜩한 의미였다. 하긴 술에 취해 꿈속을 거닐듯 생을 지낸다면 그게 어디 정상적인 삶이겠는가..
글을 다 읽고난 후 이 '취생몽사'라는 제목을 다시금 음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액자소설이라는 형식에서 겉이야기의 主話者조엽칠과 속이야기의 주된 話者 진우천사이에 오고간 이야기들이 무척이나 신기하고 슬프고 안타깝고 혹은 재미도 있는 그런 것이지만, 조엽칠과 진우천의 작품속에서의 관계된 모습들은 그냥 흘려 지나치기엔 내 마음속에 무언가 앙금이 남아있었다.
영웅, 혹은 그 비슷한 주인공들의 무협속 활약에 나-독자-는 단단히 홀려버린듯 무협의 무한한 상상속으로 빠져든다. 그리고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크나큰 아쉬움과 함께 다음을 기약하며 마음을 추스리곤 한다. 조엽칠의 모습이 대체로 그러하다. 자신 또한 강호세계를 꿈꾸며 살고자 했으나, 그러질 못했던 과거 그리고 현재..그리고 미래..진우천의 파란만장한 강호경험담에 푹 빠져버리듯 독자는 무협이라는 꿈같은 세계에 온몸이 젖여버린다. 그리고 조엽칠이 진우천이라는 신기한 인물과의 만남을 마음에 각인하듯 독자는 작은 머리의 한켠에 감상했던 무협을 고이 간직한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왜 무협에 그리 목말라하는 것일까'라는 물음을 달고 산다.
나만 그런것일까, 다른 사람들은?...
백야는 그런 나의 물음에 하나의 단서를 '취생몽사'를 통해 알려주었다고 믿어본다.
작가인 백야 또한 독자인 나처럼...무협이라는 희대의 요물을 가지고 함께 취생몽사하는 - 현실에선 불가능에 가까운 - 짧고 굵은 한량(?)의 생을 잠시나마 맛보고자 한 것으로 말이다..
그래서 백야라는 작가분에게 더욱 친근감이 간다. 독자인 나처럼 무협과 함께 별수없이 취생몽사하는 심정을 은근하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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