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김경록
작품명 : 대한제국 연대기
출판사 : 뿔미디어
평소에도 감상 및 비평글이 꾸준히 올라오는 책이고, 저 또한 일전에 감상란에 추천을 날린 적이 있지만, 대한제국연대기의 독자 중 한 사람으로써 작품에 대한 애정이 있는 만큼 좀 공들여서 비판할 부분은 비판하고, 평가할 부분은 평가해 볼까 합니다.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한 지적도 포함하고 있기에 비평란에 올립니다. (최근 올라온 위 작품에 대한 논쟁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도 쓰고 있어서 비평쪽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모든 대체역사들이 피해갈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인문, 사회적 지식 외에도 이공계통의 지식도 다루어야 할 상황이 많다는 것일 겁니다. 물론 “쌀과 소금의 시대”같은 외국 소설처럼 철학적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 부실한 역사 및 기술적 설정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평가를 받는 작품이 있느니 만큼 모든 대체역사에 꼭 이 문제가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국내에서 발표되는 대체역사소설은 복거일 씨의 “비명을 찾아서”등을 제외하고는 이후 장르소설계에서 만들어져 나왔고, 전문작가들이 쓰는 것도 아니다 보니 나름의 장르적 규칙을 내포하게 되었습니다. “대한제국 연대기”(이하 연대기로 칭하겠습니다)가 별난 점은 이 장르적 문법(한국에서 통용되는 대체역사 소설에 한해서)을 따르기도 하면서 동시에 벗어나있기도 한 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을 “연대기”의 매력으로 생각합니다.
특히 요즘 들어 연대기가 비판을 받는 원인이, 바로 이 장르적 규칙을 따르면서 동시에 따르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제기되는 비판들에 대해서는 저 또한 독자로서 공감하는 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습니다. 아래에서 조금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1. 주인공 보정문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연히 과도한 먼치킨이라는 지적이 나올 법 합니다. 저 또한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식상한 먼치킨 대체역사물이라고 생각하고 읽을까 말까 갈등을 했었습니다. 속는 셈치고 보다보니 뻘밭에서 진주를 건진 느낌이 들었지만, 당연히 처음에는 이런 과도한 설정이 식상하다 못해 짜증이 날 정도였죠.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출판되는 장르소설은 이러한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시장에 나오기조차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윤민혁님의 “한제국 건국사”같은 경우는 장르계에 대체역사물을 사실상 처음으로 소개한 작품이고, 또한 이미 작가분이 네임벨류가 있는 상황에서, 두터운 밀리터리팬층을 중심으로 비교적 무난한 여건에서 출판이 되었기에 예외로 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한제국건국사 이후 대체역사소설이 범람하면서 현대인 개인이나 혹은 군대가 이동해서 깽판으로 우리민족 만만세를 외치는 상식밖의 소설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왔고, 점차 대체역사 소설을 찾아보는 독자층도 이러한 기준에 맞춰서 움직이면서 대체역사 자체가 역사적 유희를 즐기는 고급장르의 느낌보다는 한국의 민족주의 정서에 기반한 자위물 수준으로 전락한 것도 사실입니다.(저는 뭐 이거대로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시장에 수요가 있어서 공급이 되는 것이니 뭐라고 비난할 것도 못되지요.)
작가분이 이러한 사정을 알고 출판을 목적으로 전략적으로 초반의 주인공을 설정한 것인지 아닌지는 저 또한 잘 모르겠지만, 출판이 되고 권수가 나가면서부터 작품색이 초반과 많이 달라지는 것을 볼 때 의도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초반에 기존의 대체역사물의 클리셰를 답습함으로서 시선을 모으고 이를 출판으로 이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후반에 비해서 전반부에는 약간 과도한 설정과 이런저런 비약이 적잖이 눈에 보이지만, 사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정도는 용납해 줄 수 있는 수준으로 여겨집니다. 이번에 논쟁이 일어난 바와 같이, 주인공의 스펙이 지나친 점이 있고, 그 스펙을 작품에서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는 점이 눈에 보이긴 하지만, 적어도 제 기준에서는 이게 용납은 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1권을 보니 주인공이 어릴적부터 천재적인 두뇌로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리며 서울대학 물리학과에 입학, 이후 수학, 생물학, 화학등의 학위를 취득하고 17살에 물리학 석사를 밟은 뒤,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역사학, 국제관계학, 언어학, 심리학으로 학사를 받고 이후 역사학과 심리학 석사를 받았다고 나오는군요.(1권 11쪽)
언뜻 보기에는 어이없을 정도로 화려한 스펙입니다. 거기에다가 우주인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가만 뜯어보면 학사가 8개나 될 뿐, 어느 정도 전문성을 담보한다고 할 수 있는 석사학위는 3개뿐입니다. 그 중에서도 역사학과 심리학을 제외하고 나면 이공계통의 석사학위는 물리학뿐입니다. 이론물리학을 전공했는지 실험물리학을 전공했는지, 이도저도 아니면 구체적으로 뭘 전공했는지는 작품에 설명이 나오지 않아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가 아는 상식선에서 이과 계통에서 물리학 석사 하나로 범선을 뚝딱 만들어내고 온갖 기계를 고안해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만약 이론물리학을 전공했다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학사학위 중에서도 공학 계통은 보이지 않네요. 개인적으로 스펙을 차근차근 뜯어보면 연대기 내에서의 진행과정이 개연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지적하고 싶은 부분은, 이 스펙으로 역사 속에서 세훈이 활동하는 내용 자체보다도, 과연 작품 전체의 질을 위해서 초반의 이러한 설정이 필요했느냐는 점입니다. 사실 연대기는 제가보기엔 주인공이 꼭 타임슬립을 할 필요도 없었고, 초반의 먼치킨 설정을 이용하지 않았어도 충분한 작품이 될 수 있었을 겁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작가님이 출판을 노리고 설정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점이구요. 출판을 위해 무리한 설정을 하는 점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겠지만, 이 부분이 좀 더 깔끔했다면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8,000원의 책값 이상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을지 않을까 좀 아쉽습니다.
2. 기술개발의 문제
이 부분은 저도 이공계 대학원 과정을 밟아본 적이 없고 (생물학과를 1년간 다니긴 했습니다) 공학에 관해서는 지식이 없기에 뭐라고 딱히 평가를 내리지는 못하겠네요. 하지만 글을 보면서 설정 자체가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연대기”자체가 기술의 발전과 이를 통한 산업의 부흥 -> 세계정복의 테크를 타는 소설이 아니고, 무게추 자체가 가상의 역사에서의 사회전반을 묘사하는 면에 있다고 생각하기에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나름대로 상상력으로 메워가며 읽고 있습니다. 물론 상황이나 묘사가 불친절하고 부족한 부분이 적잖이 있지만, 기술개발 내용 자체가 개연성이 없거나 비과학적인 부분은 없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초반의 세훈이 몇 가지의 기술적 혁신을 가능한 수준에서 도모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인 소설의 과정이 기술발전의 템포가 지나치게 빠르지 않고, 시대적으로 이전 시대의 발전이 누적되면서 차근차근 발전해 나가는 과정이 잘 묘사 되어있다고 생각합니다.
3. 소설의 템포 설정 문제
제가 지적하고 싶은 연대기의 최근 문제는 앞부분이 아니라, 오히려 소설의 템포 문제입니다. 작가분이 애초에 주인공을 4권에서 세상을 뜨게 만들고, 이후 5권부터 9권까지 5권 이상 주인공 없는 체제를 끌고 오면서 소설적 재미가 자꾸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물론 연대기 자체가 캐릭터성에 의존하는 소설이 아니고, 역사의 흐름을 관조하는 느낌을 장점으로 삼는 소설이지만, 이게 무한정 길어지는 것은 읽는 독자입장에서는 맥이 끊기기 일쑤가 되지요. 사실 서양의 역사적 부분은 간단한 설명으로 작중에서 언급하고 지나가도 될 부분인데, 한 단락을 할애해 20페이지 가량 서술하는 부분은 읽다가 답답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또 하나의 다른 문제는, 바로 제국의 정치체제가 200년간을 엎치락뒤치락 하며 정체를 겪고 있다는 점입니다. 초반부 세훈의 죽음 이후, 신료집단과 황제의 갈등이 주요한 테마가 되어 소설의 1/3정도를 차지한 느낌입니다. 처음에는 어느 정도 재미있게 보다가도, 이게 수 세기를 흘러갈 정도가 되니 조금 지겨움이 느껴집니다. 물론 그 사이에 미묘한 발전이 이루어지는게 보이고, 재미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제국내의 권력다툼을 보기 위해 수백페이지를 읽어대는 것은 독자입장에서는 힘든 노릇이지요.
이 부분은 작가분께서 적절히 흥미를 돋울 만한 부분과 아닌 부분의 강약을 잘 조절해, 권당 20년 정도로 진행이 정체되고 있는 상황을 한 40년에서 50년 정도로 늘려 잡으시면 해소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빠른 전개를 유지하되, 핵심만 짚어내는 것만으로도 연대기의 매력은 충분히 지속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여러 가지 단점을 열거하고, 개인적인 감상을 덧붙이기도 했지만, 본질적으로 연대기는 한국 대체역사소설계에서 출판되었던 작품들 중 단연 손꼽히는 작품 중 하나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작품의 완성도 기준을 어느 곳에 놓고 보느냐에 따라 작품의 가치는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밀리터리 부분에서의 섬세한 고증과 전쟁의 묘사를 즐기시는 분이라면 단연 윤민혁 님의 “한제국 건국사”를 꼽을 것이고, 소설적 재미를 말한다면 수작으로 꼽히는 “천룡전기”는 물론이거니와 이고깽의 대체역사판이라고 할 수 있는 많은 소설들 중에서도 연대기 보다는 재미가 있는 소설이 충분히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체역사”라는 장르 자체를 의미 있게 접근하고 있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복거일씨의 작품들 이후로 (물론 문학적인 수준 자체는 복거일님의 작품들이 월등하다고 봅니다. 다만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일대일로 비교할 부분은 아니겠지요.) 연대기가 처음이라고 봅니다. 수백년을 도도하게 흘러가는 가상역사에 흠뻑 빠져 책을 한권한권 읽다 보니, 자연스럽게 제 책장에 연대기 1권부터 꽂혀가게 되더군요. 어느정도 역사에 대한 기본 상식이 필요하고, 소설책 보다는 가끔 역사책을 보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그 것이 바로 연대기의 매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진행은 좀 더 빠르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건 어쩔 수 없네요. (이렇게 20권 30권까지 나가면 계속 사서 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지나치게 소설을 끌고 나가면 작가님께 좀 실망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문피아 게시판에서는 언급이 많이 없었던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작가님이 작품에 공을 들이고 있다고 생각이 든 것은, 설정 자체보다도 거의 매권 앞에 같이 실려 나오는 지도, 삽화, 계보 등 때문이었습니다. 지도를 보면서 생소한 지명과 세력구도에 관해서 일별할 수 있었고, 삽화를 보면서 대충 조선의 달라진 모습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상상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연대기에서 제공하고 있는 이러한 텍스트들을 최대한 이용해서 사소한 재미까지 뽑아 보는 게 바로 이 소설의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전히 좀 불친절한 소설이긴 합니다. 방바닥에 군불 때고 편안하게 앉아서 귤 까먹으며 후루룩 볼 소설이 아니라, 책장에 꽂아 놓고 틈틈이 빼보는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개인적인 소망이지만, 언제가 작가님께서 작품을 마무리 짓고 여건이 되신다면 전체적으로 다시 한 번 정성들여서 작품을 개작해서 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독자의 소망이지요. 신경 써서 가다듬으면 분명히 장르시장에서 소모되는 것을 떠나서 보다 진중한 재미를 던질 수 있는 것도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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