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는 "개연성"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지만 본문에서는 쓰지 않겠습니다.
제 생각을 한마디로 줄이기가 어려워서 차용한 단어일 뿐입니다.
저는 그 부분을 조금 다르게 이야기 해보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의 공감을 얻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한 분이라도 더 읽고 생각해주시기를 바라며, 글이 옮겨질 걸 예상하고도 굳이 한담에 쓴 건 앞뒤가 맞지 않네요. ^^
이후에는 제 주장을 다소 강하게 펼쳤지만 표현상의 문제일 뿐, 제 생각을 강요하려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냥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정도로 이해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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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necessity)'과 '우연(contingence)'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현대 철학은 "가능세계(possible world)"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철학자들은 가능세계란 소설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소설이란 "그럴 수도 있었던 완전한 세계"라고 정의합니다.
지난 국가대표 평가전에서 한국이 일본에 0:3으로 패했죠.
'가능세계 의미론'에 따르면 그건 당연히 우연적인 사건입니다.
한국이 0:3으로 패하지 않은 상황, 즉 그런 세계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한국이 0:2로 패하거나, 5:0으로 승리하는 소설을 쓸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철학자들은 뉴턴 역학이 성립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어떤 물체가 자유낙하하는 사건도 우연적인 사건이라는 겁니다. 물리법칙도 필연적인 건 아니라는 거죠.
손에서 공을 놓으면 땅으로 떨어지지 않고 하늘로 솟아 오르는 세계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철학자들이 상상할 수 없다고, 따라서 그런 세계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오직 논리 법칙이 성립하지 않는 세계 뿐입니다.
우리가 아는 물리법칙이 하나도 성립하지 않는 세계는 상상할 수 있지만,
1+1이 2가 아닌 세계, 1=1이 아닌 세계, 1=2인 세계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물론 각각의 기호가 다른 의미를 가지는 세계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철학자들은 가능세계를 소설에 비유한다고 말했었죠.
그렇다면 세상에 못 쓸 소설이 거의 없습니다.
생태계가 어떻게 되었건 간에 천만 오크 정예부대가 한 곳에 집결해 오합지졸 1만에게 깨지는 것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철학자들이 소설에 지나치게 관대하다고 생각하시면 오해입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소설의 정의는 분명 "그럴 수도 있었던 세계"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었던 완.전.한. 세계"입니다.
어떤 인물이 과거로 돌아가는 설정에 익숙하시죠.
그 순간 물리법칙은 거의 모조리 깨져버립니다.
일단 질량보존의 법칙부터 무너지겠죠.
과거는 한 사람 만큼 질량이 커지고 현재는 그만큼 줄어듭니다.
법칙이라는 게 한 번 깨졌으면 앞으로도 계속 깨져도 됩니다.
그러니까 그 소설에서는 더 이상 질량보존의 법칙이 성립할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과거의 물질이 주인공 몸무게만큼 현재로 이동했다고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는 남습니다.
소설 속의 세계에서 여전히 열역학 제 2법칙이 성립하게 하려면, 주인공 대신 과거에서 현재로 간 존재는 주인공보다 훨씬 더 질서 정연한 존재, 사실상 더 똑똑하고 더 튼튼한 다른 인간이어야만 하겠죠.
그냥 작가가 창조한 이 새로운 세계에서는 우리가 아는 물리법칙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하겠습니다.
그런데 꼭 그래야 할까요?
소설 "안나 까레니나"의 세계는 우리 세계와 딱 한 가지밖에 다른 점이 없습니다.
그 세계에는 안나 까레니나가 존재한다는 점이지요.
독자는 그 외의 모든 것이 우리 세계와 완전히 같다고 믿고 읽게 됩니다.
판타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과거로 돌아갔다면, (그게 얼마나 많은 물리법칙을 박살내는지 생각할 필요 없이) 그 사실 말고는 모든 게 우리가 아는 세계와 같다고 생각하며 읽게 되지요.
환상적인 마법이 등장하는 소설이라도, 작가가 따로 말해주지 않는 한 우리는 대마법사 또한 우리와 똑같이 밥을 먹고 화장실에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만입니다.
다시 말하면, 작가가 말해주지 않은 부분은 모두 현실 세계와 같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뜻일 겁니다.
그리고 무언가 말해주었다면 그걸 중심으로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판타지 소설에서 백만 대군이 집결했다면, 백만 대군이 집결한 겁니다.
작가가 아직 말해주지 않았으니 나머지 환경은 우리 세계와 같을 것이라 생각하고, 백만 대군이 한 곳에 집결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지적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간 소설에서 질량 보존의 법칙에 대해 묻는 게 어리석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 경우에는 백만 대군이 한 곳에 집결했다는 점으로부터, 그곳의 환경을 유추해야 합니다.
저는 결코 작가들 편을 들고 있는 게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소설의 "그럴 수도 있었던"이라는 측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게 바로 소설을 쓰는 즐거움이겠지요.
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소설을 쓴다는 게 결코 즐거운 일만은 아닙니다.
"완전한 세계"를 만들어야 하니까요.
완전한 세계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정합적인 세계", 또는 "앞뒤가 맞는 세계" 쯤 되겠습니다.
어떤 설정, 어떤 무리한 장면도 다 괜찮습니다.
수학적인 논리에만 위배되지 않으면 다 "가능"은 하니까요.
하지만 앞뒤는 맞아야 합니다.
어제 깨졌던 물리법칙이 오늘은 확고부동한 원리로 제시된다면 그건 "그럴 수도" 있을지는 몰라도 "완전한 세계"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소설이 아닙니다.
완전하기만 한 소설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있었을 뿐, 완전하지 않은 소설은 여간해선 재미있을 수 없습니다.
소설 속에서, 인구 100만의 도시에서 정병 40만을 징집하는 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독자가 그 도시를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 세계의 어느 도시처럼 생각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너그러운 독자도, 아니 너그러운 독자일수록 그 도시의 문화, 가족 구성, 생물학까지도 우리 세계와 다를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앞에서 그 도시를 잠실 정도 되는 크기로 묘사해놓고, 말을 타고 한 시간쯤 달려야 인가를 하나씩 발견할 수 있다는 등의 설명을 해놓았다면 인구밀도 등으로 볼 때 "그럴 수 없었던 세계"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현실 세계에서는 아무도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을 사람을 천재로 등장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작가는 자기가 창조한 세계의 평균 지능이 현실 세계보다 현저히 낮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그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었던 완전한 세계"입니다.
독자는 그런 세계에 매력을 느끼기 어렵겠지만요.
그러나 그걸 인정하지 않고 그 인물이 현실 세계를 포함한 모든 가능세계에서 천재라고 주장한다면, 그 세계는 "그럴 수도 있을" 뿐 "완전한 세계"는 아닙니다.
자칫 민감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토론을 유도하려는 게 아니라 읽는 분들은 조금씩 너그러워지고, 쓰는 분들은 조금씩 더 고민하자는 의도였습니다.
역사소설이나 현대물이 아닌 다음에야, 오류는 반드시 소설 속에서만 찾아야 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현실 세계의 지식'으로 소설의 설정을 비판하는 것은 엉뚱한 다리를 긁는 일입니다.
심지어 다른 소설을 근거로 비판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다른 유명한 소설에서 오크가, 엘프가, 마법사가, 개방 방주가, 어떤 무공이 이러이러했으니 당신 소설에서도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요구는, 나는 소녀시대를 좋아하니 카라도 9인조로 구성해야 한다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입니다.
톨킨이나 김용의 아이디어를 차용했다고 그 세계관을 철저히 따라야 하는 건 아니죠.
가능한 한 남의 아이디어는 차용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마찬가지로 쓰는 분들도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에서 멀리 벗어난 글을 쓸수록 그것을 "완전하게"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항상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저는 (거칠게 말해) 필력이란, 어려운 설정을 완전하게 만드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반지를 깨뜨리러 여행을 떠나는 호빗'이라는, 실로 있을 법하지 않은 존재에 빠져들게 한 것은 프로도의 사고와 고뇌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적인 사고와 고뇌"이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소설을 읽는 동안 인간도 아닌 호빗의 존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게 되지요.
출판할 생각도 없고, 전업작가가 될 생각도 없이 취미로 쓰는 분들이 더 많겠지만, 스티븐 킹은 그럴수록 자기가 잘 아는 내용을 쓰라고 충고합니다.
잘 아는 배경, 인물, 사건, 그리고 인간적인 고민에 대해서 말입니다.
(물론 절대적인 건 아닙니다. 연애소설을 쓰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연애경험이라고도 하니까요. 실제 연애는 시궁창인데 연애소설은 달콤해야 하니까요.)
판타지 소설을 쓰면서는 누구도 충족시킬 수 없는 자격이겠네요.
누가 엘프를 만나봤으며 마법을 써봤겠습니까?
단지 상상력에 의존해야 하는 정도가 큰 만큼, 판타지 소설은 상대적으로 쓰기 쉽다고 생각하는 건 대단한 착각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정말입니다. 현대물이 훨씬 쉽습니다. 직접 언급한 것 말고는 다 현실 세계와 똑같다는 데 합의가 되어 있으니까요.)
자기가 쓰는 글을 대하는 태도가 더 진지해지면 먼저 글이 달라지고, 독자의 반응도 달라지겠지요.
스스로 생각할 때 설정 상의 오류가 없는데 그런 비판이 있다면, 꼼꼼히 다 읽고 충분히 기다려주지 않는다고 섭섭해 하거나 화를 낼 게 아니라 "완전성"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물론 앞서 말한 것 같은 얼토당토 않은 비판도 많을 겁니다.
"가능성"과 "완전성"에 모두 자신이 있는데도 비판이 있다면,
뭐 어쩌겠습니까?
도스토예프스키조차 만장일치로 위대한 작가로 인정받지는 못합니다.
진지하게 쓰고, 너그럽게 읽는 문피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덧.
'필연'과 '우연'은 좋은 번역어가 아닙니다. 각자 이 단어들에 다른 의미를 떠올릴 수 있겠죠.
모든 진지한 대화는 서로가 논리적이고 성숙한 자세를 잃지 않는 한 결국 의미론으로 귀결된다고 합니다.
필연, 우연, 개연성 같은 단어를 논할 때 사전을 펼쳐드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필연이란....." 또는 "내가 생각하는 우연이란....."과 같은 의견은 잠시 유보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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