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쥬논
작품명 : 규토대제
출판사 : 북박스
쥬논님의 글은 인기가 있습니다. 앙신의 강림부터 시작해서 천마선, 규토대제로 이어지는 인기몰이는 끝나지 않죠. 많은 분들이 그 이유로 '필력', 강렬한 액션과 약간의 하드코어 분위기에 의한 '카타르시스'를 꼽으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저는 앙신의 강림을 읽으며 저 두 가지 중 후자인 카타르시스는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거의 쥬논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판타지 독자로서의 의무감에 가까운 감정으로 규토대제를 집어들었습니다. 결과는 암울함이었습니다. 규토대제라는 제목을 보고 저는 정말로 대제의 풍모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규토대제에서 나타난 규토의 모습에 저는 실망을 금치 못했습니다.
'대제라고? 규토폭군이면 충분하다!'
아주 단순화한 문장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의사 전달에 무리는 없으리라고 봅니다. 규토대제는 분명 쉽게 보기 힘들 정도의 필력을 지닌 분이 써내려간 좋은 글입니다. 하지만 쥬논님의 글에서 늘 그렇듯 결국 주인공은 폭군에 불과했습니다.
제가 아는 규토대제의 팬들은 규토라는 캐릭터의 폭력성과 천재성에 끌린다고들 합니다. 폭력성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곧바로 이해가 되었지요. 하지만 규토가 과연 천재적일까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시대에서 규토를 제외한 모든 인물들의 지능이 하향평준화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그것을 가장 강하게 느낀 것은 역시 카스피 해전에서입니다.
카스피 해전에서 고작 화공법 하나로 전 함대가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적군. 국운을 좌우할 정도의 물자와 병사들을 움직였는데도, 게다가 배에는 불에 약한 소재를 사용했음에도 화공에 대한 대책이 전무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적벽대전처럼 배가 서로 묶인 것도 아니고 사방에 암초가 널린 것도 아닌데 탈출조차 못하는 적 함대를 보며 주인공 키워주기에 희생당한 불쌍한 엑스트라들의 운명을 실감했습니다.
규토에게 카리스마가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전쟁 직전에 연설을 하며 한 찰흙놀이를 두고 하는 말인지, 아니면 그 고삐 풀린 망아지와도 같은 제멋대로인 성격을 두고 하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규토는 암흑가의 보스에 어울리는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일지 모르겠지만 정상적으로 생각해서는 단순한 난폭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슬펐던(?) 점은 전혀 변하지 않는 주인공. 전작 천마선은 우리 동네 책방에 안 들어와서 보지 못했지만 앙신의 강림의 주인공인 시르온과 규토는 판박이입니다. 주술, 혹은 네크로맨시를 사용하는 음험한 외도의 마법사. '모든 것이 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듯한 자만심.(능력이 되잖아라는 반박도 있을지 모르지만 능력이 있는 것과 단순한 대리만족을 위한 광오함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도전하는 일도 90%를 훨씬 상회하는 확률로 성공하는 엄청난 운.
비록 그런 주인공과 작품의 분위기가 쥬논이란 작가의 색일지도 모르지만 너무 천편일률적인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단 대제라는 타이틀을 내건 이상, 규토를 역사상 최악의 폭군으로 등극시키려는 것이 아니라면 무작정 '내가 최강이니 반항하면 죽여버린다' 식의 공포 정치 따위를 지향하는 규토의 성격부터 개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물론 규토대제가 보기 드문 글이라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단지 이 정도의 필력을 지닌 작가라면 한 단계 더 높은 곳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쥬논님은 단순한 대리만족용 글을 쓰는 수준은 넘어섰다고 봅니다. 이 규토대제를 발판 삼아서 조금 더 진중하고 인간사가 담긴 글을 쓰셨으면 합니다.
ps. 일단 기본적으로 쥬논님은 황제를 전부 폭군으로 보시는 듯.
첫 문구... 황제가 기분나쁘면 뭐 마을이 사라지고 뭐가 어떻게 된다... 이 부분에서 확 괴리감을 느꼈습니다.
ps2(?). 규토대제가 잘 쓴 글이란 것 자체를 부정하진 않지만 규토대제를 수작 반열에 올리기도 좀 힘들다는 것이 저의 판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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