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아멜리 노통브
작품명 : 살인자의 건강법(원제 : Hygiene de l'assassin)
출판사 : 문학세계사
사람을 죽이고도 지금까지 지겹게
살아올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이나고?
그건 말이지 살인을 나의 생활로 여기고
나의 지금을 보태준 경험이라고 느끼는 수 밖에는 없다구
흐흐 한 심 한 기자양반 이제 알 거 같수?
억울하면 당신도 하나 죽여보시지 그랴..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프레텍스타 타슈, 그는 죽음을 앞두고 기자들에게 인터뷰의 기회를 주게 된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 그는 굉장한 대문호인 동시에 괴팍한 성격의 괴문호가 아니었던가? 결국 등떠밀려 찾아온 네 명의 남자 기자는 차례로 이 대문호와의 인터뷰에서 패배해 물러나게 되지만!! 그 후에 등장한 한 명의 여기자! 그녀는 이 괴문와 양보없는 설전을 펼치기에 이르른다. 타슈! 그의 미완성 작품 "살인자의 건강법" 이라는 내용을 서서히 캐 물어가며 60여년전 타슈가 저지른 살인사건의 비밀을 캐가는 소설의 이름 은 바로 아멜리 노통의 [살인자의 건강법]
다분히 공격적인 작품으로써 아멜리 노통 특유의 광기스러운 감각이 뼈에 사무칠 정도로 한기가 서리게 작용하는 소설, 아멜리는 인물의 개성을 극대화한 후 날카롭게 곤두선 두 명의 화자를 등장시켜 스스로의 감각적인 묘사에 대한 극을 보여주고 있다. 살인의 주된 테마에서 비중있게 비추어 지는 진술에서의 심리묘사는 최소한의 배제된다, 오직 인터뷰의 형식을 빌린 대화체로만 이 소설은 구성되어 있으며 스피드하고 감각적인 아멜리 특유의 전개방식은 참신하다 못해 신선해서 얼어죽고 싶을 정도로 소름끼치는 그 생생함을 전달하고 있음에는 분명하다.
"껄껄걸 기자양반....실례를 무릅쓸 생각일랑 하지 마시오!"
그래 상당히 불쾌 하다는 건가? 역시 소설 안에서의 타슈는 대단히 날카롭기도 한 어투로 자신을 찾아온 얼치기의 남자 기자들을 혼란스럽게 공격하고 있다. 역시 그가 이야기를 털어놓을 대상은 아니라는 것인가? 그는 고질적인 문단의 병폐를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그래 어차피 죽음앞에 놓여진 대문호의 명성! 밝히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가진 치부의 크기일 뿐인가? 아무튼 그렇다. 정말 그는 솔직하게 잔인하기도 하다는 점이다.
"어이!! 기자 양반, 당신 생각에 어떤 책들이 순수한 선의를 담고 있는 것 같소? '톰 아저씨네 오두막' '레미제라블' 물론 아니지. 그 책들은 말이오, 사교계에 진 출하고자 하는 작가의 야심을 담고 있소. 순수한 책은 오히려 고독과 비천함 속에서 태어나는 법이오."
프랑스의 문단에 대한 과감한 질타, 아멜리가 화자인 타슈를 통해서 바라보는 위선적인 프랑스 문단의 허위적인 고급스러움을 질타하는 것, 아멜리는 자신의 저서를 통하여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싫어하는 자국적인 옹호에 대한 선뜻없는 비판을 가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물론 이 점은 결국 프랑스에서 역으로 대중에게 인기를 얻는 한 축이 되기도 했다고 하지만, 소설의 질적인 면이나 비판에 대한 적나라함은 정작 자국내의 고고한 평자나 문단에게서는 인정받지는 못하는 것 같다.
물론 독자는 아멜리의 층이며 결국 프랑스의 문단이라는 점도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을 테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옹고집이 얼마나 갈까? 를 바라보는 필자의 심정도 그 여기자의 심정과 같다고 할까? 30대 여성이 가지는 호기심의 극한은 세련되다 못해서 집요 적이기까지 한 그 심정 말이다. 정말 이 글을 본 독자라면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자칭 인문과 언론의 꽃 이라고 하는 작자들이 내 작품조차 읽어보지 않고 감히 나와 대화를 시도해? 껄껄껄걸 당신들은 두 번 다시 인터뷰라는 것을 할 자격이 없어 꺼지라고!!!"
남녀성에 대한 아멜리의 시각은 여성을 옹호하는 추세일까? 아무튼 타슈는 이 자신감 때문에 결국 한 명의 여기자에게 뒷덜미를 잡히게 된다는 점 역시 상당히 특이할 뿐만 아니라. 타슈에게 다가온 처음 네 명의 기자 역시 개성 없는 무지식의 표상이었다는 점이 특이할 만하다.
눈가림의 언론에 대한 솔직한 비판의식? 뭐 이렇게도 해석이 가능하고 프랑스의 자국 남자에 대한 솔직하지 못함을 비판하는 여성성향의 글? 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까? 웃기는 점은 프랑스 내에서는 이 작품이 남성층에게 더더욱 큰 호응을 얻어냈다는 점도 역시 참고할 만 하다. 그만큼 이 소설은 여성 취향 적이기도 하지만 반 성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반 성향에 대한 강약의 조절, 언론이 경배하기까지 하는 남자의 이상이기도 한 대문호의 직위와 그 위엄은 분명 남자의 강함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여기자 니나는 이에 대한 작가 아멜리의 솔직한 반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강약의 조절이 속도감 있는 문체 속에 잘 어우러진 수작이 또 어디에 있을까? 인터뷰의 대화체 위주는 불필요한 서술을 배제하고 심리묘사의 부가적인 서술로 인한 [감탄사 의미어 남발]을 철저하게 무시해 버린다.
이 때문에 인물 대 인물의 구도로 좁게 치우쳐진 각종의 대사는 모든 상황을 다기능 적이고 역으로 비판할 수 있는 또 다른 토대를 갖추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 장점만을 극대화하여 결국 작가 스스로가 원하는 모든 것을 표현해 내었다는 점을 최고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자 니나는 타슈를 만나면서 설전을 벌이는 동안 중요한 사실을 캐낸다, 그의 미 완성작 살인자의 건강법 이라는 소설 속에 담겨진 타슈의 살인 경력에 대해서 말이다.
"24년전 문학적 폐경기를 맞은 직후, 웬 소설 한 편을 미완성으로 남겨 두셨잖습니까. 왜죠?"
그렇다 그는 바로 누구를 죽이고 스스로를 이제 죽이게 되는것인가? 물론 타슈는 예고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입장이라고 하지만 그가 유작으로 남기게 될 미완의 작품 한 편은 결국 뜻하지 않은 스스로의 허구를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는 일생에 있어서 최후이자 최고의 실수로 자리하게 되어 버린다.
"내가...내가 레오폴린을 목졸라 죽였소..."
그렇다 반 성향의 상징인 타슈는 여기에서 평생 쌓아온 스스로의 오만과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릴 수 밖에 없었다. 만만치 않은 반 성향의 상징인 니나의 승리로 귀결되는 부분일까?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서 소설을 끝맺지 않는다. 이제는 무너진 타슈의 쌓아온 탑이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인지를 독자들에게 다시 던져주고 있다.
“아니 데체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요? 혹시 당신 프로이트처럼 말실수에 집착하는 거요? 정말 정말로 가관이군.”
“전 원래 프로이트의 이론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일 분 전부터 믿기 시작했답니다.”
“난 원래 말 고문의 효율성을 믿지 않았소. 그런데 몇 분전부터 믿기 시작했다오.”
하지만 이 작가의 미완작이 살인사건의 비밀에 가까워질수록 대사는 더욱 더 적나라해지고 있으며 열변적으로 흘러가기 시작함을 알 수 있다.
“손이란 건 작가에게 있어서 쾌감의 중추지.”
“손이란 건 교살자에 있어서 쾌감의 중추죠.”
“교살은 사실 아주 기분 좋은 살인 방법이지.”
“교살하는 사람 입장에서요, 교살당하는 사람 입장에서요?”
그리고 그는 결국 평생을 쌓아온 탑을 스스로의 입으로 무너뜨리게 된다.
"내가...내가 레오폴린을 목졸라 죽였소..."
"1925년 8월13일,난 호수 가운데 바위섬에 누워있었소. 돌연 이상한 것이 눈에 띄는 바람에 난 감상을 중단해야 했소. 레오폴딘의 발레 동작이 호수 저 아래에서부터 새빨간 액체 줄기를 떠오르게 하고 있었던 거요. 아주 농도 짙은 액체였지."
그는 왜 외사촌누이인 레오폴린을 죽여야만 했을까?
아름다운 것에 대한 회상이라고 말하는 타슈는 결국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자가 되는 나이에…그 음산한 나이에 레오폴딘은 가장 어여쁘고 가장 행복하고 가장 무지하고 가장 현명했소…한 마디로 가장 아이다운 아이였단 말이오. 그리고 그건 전적으로 내 덕분이었다오"
하지만 여성성을 갖추면서 여성이 여성의 성징현상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혐오했던 타슈는 결국 레오폴린을 죽음으로 내 몰게 된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 자체로 지켜야 한다는 성징에 대한 거부감의 돌발적인 표현인가? 프랑스 사람들의 문란한 성문화에 대한 가벼운 의식에 비해서 타슈의 이 행동 자체가 차마 숭고하게 까지 비추어지는 이유도 역시 작가의 의도된 설정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잔인한 현실에 대한 스스로의 잔인한 살해로 비추어질 따름이다. 글의 텍스트 하나가 사람을 이토록 섬찟하게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가 세운 거대한 탑의 가공함은 결국 스스로에 대한 구차한 변명으로 끝나게 된다.
타슈 역시 인간이었음을 말이다.
"기자 양반..진실을 밝히자면 창작 행위에 있어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오. 정해진 형태도 의미도 없는 우주와 마주하여 작가는 조물주 노릇을 할 수밖에 없소. 작가가 대단한 글재주로 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지 않는 한, 사물들은 제 윤곽을 지니지 못할 테고 인간의 역사 또한 놀란 입만 쩍 벌리고 있게 될거요.”
타슈 역시 남과 다르지 않는건가? 죽음 앞에 선 한 인간의 솔직한 마지막 고백인가? 하지만 반 성향의 상징인 남성상
의 타슈는 결국 마지막을 계기로 완전히 으스러지게 된다. 스스로가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담겨 있는 유일한 타슈의 고백이 결국 자신의 살인에 대한 정당함이었다는 점. 그리고 그가 남긴 정당함에 대한 유일한 죄책감 그것은 바로 "살인자의 건강법" 이라는 미완의 책 한 권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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