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판타지’란 말은 한국에서 퓨전 판타지(이계진입물...) 융성 당시, 퓨전되지 않은, 그러니까 기존의 ‘판타지 세계’ 내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나는 판타지를 지칭하기 위해서 나온 말입니다. 사실 한국 내에서만 쓰이는 표현이고, ‘퓨전’이라는 반정통이 나온 후에야 이름이 붙여진 부류죠.
사실, 이 조어는 좀 이상한 면이 있습니다. 판타지에 ‘정통’을 따진다면 오히려 현재 ‘정통 판타지’라 불리는 것들은 결코 정통이 아니거든요.
판타지 문학의 기원은 신화 민담 설화 동화 페어리테일- 등이 나올테고, 근대시기의 환상 문학 또한 리얼리즘/모더니즘과의 반대향으로서 이러한 ‘고전적인 환상’을 추구했던 문학들입니다. 페어리테일에 가까웠던 로드 던세이니라던가, 흡혈귀 같은 민담에서 소재를 가져온 고딕 호러(드라큘라), 최초의 SF라고도 불리는 ‘프랑켄슈타인’부터 시작해서, 조금 나아가 본격적으로 ‘장르’ 구분이 생기기 시작하던 시기에 있었던, SF/호러/판타지 등 온갖 장르를 다뤘던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펄프 잡지등에 실린 소설들도 있죠. 이 시기에 유명했던 게 ‘소드 앤 소서리’ 장르로 불리는 “코난 더 바바리안(야만인 코난)”이나 H.P.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 계열(코스믹 호러) 입니다. 특히 코난 같은 경우에는 현대의 판타지와도 분명 통하는 면이 있는 오락물로서의 판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로우 판타지’라 불립니다.
흔히 ‘정통 판타지’를 볼 때는 반지의 제왕과 D&D 등을 떠올리지만, 반지의 제왕은 이러한 펄프가 태동한 꽤 이후에 나왔죠. ‘호빗’을 시작으로 친다면, 이것도 페어리테일 계열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군요. 거기에 반지에 제왕-실마릴리온으로 이러지는 작업은 신화와 민담을 적극적으로 취합하여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고, 이러한 세계관 전체에 얽힌 신화적 서사를 다룬 ‘에픽 판타지’가 태어났습니다. 즉, 흔히 말하는 ‘정통 판타지’인 에픽 판타지, 하이 판타지는 판타지 내부에서는 ‘중견’ 정도이지 ‘원조’ 수준은 아니라는 거.
반지의 제왕의 영향력이 워낙 커서 에픽 판타지는 펄프 장르로도 퍼져나가서 상당히 주류가 됩니다. 다만 요즘에는 영 신통찮죠. 요즘 영미권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판타지는 영 어덜트 지향의 뱀파이어 로맨스나 포스트 아포칼립스 SF 같은 거. 어쨌던간 해리 포터로 판타지를 접한 아이들이 십대가 되어 트와일라잇이나 헝거 게임을 접하는게 자연스러운 뭐 그런 상황.
좀 돌아가서 이 반지의 제왕에서 시작된 에픽 판타지가 펄프로 퍼져나간 결과물이 D&D라 보면 됩니다. 반지의 제왕과 D&D 사이에만 20~30년 가량의 차이가 있듯, D&D는 반지의 제왕의 직계라기 보다 반지의 제왕의 영향으로 탄생한 수 많은 펄프 판타지의 직계라 보면 되죠.
판타지 팬덤은 SF 팬덤과 상당히 같이 왔기에, D&D에는 SF의 영향도 짙게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D&D의 엘프는 톨킨식의 ‘고귀한 요정’이 아니라 스타트랙 벌칸족의 판타지 풍 어레인지죠. 초기 시나리오를 보면 광선검이나 레이저총 나오고, 신들의 땅은 거대로봇 날아다니는 SF세계라던가 그런 설정도 있었고.
게다가 D&D의 대표적인 설정이라 할 수 있는 ‘질서-중립-혼돈’, ‘선-중립-악’의 우주적 가치관 대립의 경우는 마이클 무어콕의 이터널 챔피언 시리즈(대표적으로 ‘엘릭 사가’) 같은 작품의 영향이 큽니다. 하여간 게리 갸이각스도 D&D 만들면서 수 많은 자료와 펄프 소설을 읽어댔다고 하니.
한국에야 뭐 무어콕 소설은 들어온 적도 없고, 고전부터 최근작 까지 그나마 폭 넓게 번역되었던 SF와는 달리 펄프 판타지는 커녕 세계적인 유명 판타지도 몇 개 번역되다가 끊기고 하는 판이니... “D&D는 반지의 제왕을 게임으로 하려고 만들었다” 같은 정보가 정설인 양 돌아다닌 적도 있지만요. 하여간 반지의 제왕 이전에도 판타지는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습니다.
뭐 이쯤에서 짧게 요약.
1. 흔히 말하는 ‘정통 판타지’는 판타지 전체에서 보자면 딱히 ‘정통’이 아니다.
2. 한국에서 칭하는 ‘정통 판타지’는 따지자면 에픽 판타지 혹은 하이 판타지라 부르는게 맞다.
그냥 늦은 새벽에 잡설이었습니다.
누구 돈 많고 덕심 쩌는 출판사 있으면 엘릭 사가 좀 정발 해 줘요. 나 그거 정말 읽어 보고 싶어...
ps. 따지고 보면 ‘판타지 세계 내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나는’ 이야기가 딱히 전부 하이 판타지인 것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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