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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담

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작성자
Lv.29 스톤부르크
작성
15.05.08 03:23
조회
1,661

‘정통 판타지’란 말은 한국에서 퓨전 판타지(이계진입물...) 융성 당시, 퓨전되지 않은, 그러니까 기존의 ‘판타지 세계’ 내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나는 판타지를 지칭하기 위해서 나온 말입니다. 사실 한국 내에서만 쓰이는 표현이고, ‘퓨전’이라는 반정통이 나온 후에야 이름이 붙여진 부류죠.


사실, 이 조어는 좀 이상한 면이 있습니다. 판타지에 ‘정통’을 따진다면 오히려 현재 ‘정통 판타지’라 불리는 것들은 결코 정통이 아니거든요.


판타지 문학의 기원은 신화 민담 설화 동화 페어리테일- 등이 나올테고, 근대시기의 환상 문학 또한 리얼리즘/모더니즘과의 반대향으로서 이러한 ‘고전적인 환상’을 추구했던 문학들입니다. 페어리테일에 가까웠던 로드 던세이니라던가, 흡혈귀 같은 민담에서 소재를 가져온 고딕 호러(드라큘라), 최초의 SF라고도 불리는 ‘프랑켄슈타인’부터 시작해서, 조금 나아가 본격적으로 ‘장르’ 구분이 생기기 시작하던 시기에 있었던, SF/호러/판타지 등 온갖 장르를 다뤘던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펄프 잡지등에 실린 소설들도 있죠. 이 시기에 유명했던 게 ‘소드 앤 소서리’ 장르로 불리는 “코난 더 바바리안(야만인 코난)”이나 H.P.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 계열(코스믹 호러) 입니다. 특히 코난 같은 경우에는 현대의 판타지와도 분명 통하는 면이 있는 오락물로서의 판타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로우 판타지’라 불립니다.


흔히 ‘정통 판타지’를 볼 때는 반지의 제왕과 D&D 등을 떠올리지만, 반지의 제왕은 이러한 펄프가 태동한 꽤 이후에 나왔죠. ‘호빗’을 시작으로 친다면, 이것도 페어리테일 계열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군요. 거기에 반지에 제왕-실마릴리온으로 이러지는 작업은 신화와 민담을 적극적으로 취합하여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냈고, 이러한 세계관 전체에 얽힌 신화적 서사를 다룬 ‘에픽 판타지’가 태어났습니다. 즉, 흔히 말하는 ‘정통 판타지’인 에픽 판타지, 하이 판타지는 판타지 내부에서는 ‘중견’ 정도이지 ‘원조’ 수준은 아니라는 거.


반지의 제왕의 영향력이 워낙 커서 에픽 판타지는 펄프 장르로도 퍼져나가서 상당히 주류가 됩니다. 다만 요즘에는 영 신통찮죠. 요즘 영미권에서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판타지는 영 어덜트 지향의 뱀파이어 로맨스나 포스트 아포칼립스 SF 같은 거. 어쨌던간 해리 포터로 판타지를 접한 아이들이 십대가 되어 트와일라잇이나 헝거 게임을 접하는게 자연스러운 뭐 그런 상황.


좀 돌아가서 이 반지의 제왕에서 시작된 에픽 판타지가 펄프로 퍼져나간 결과물이 D&D라 보면 됩니다. 반지의 제왕과 D&D 사이에만 20~30년 가량의 차이가 있듯, D&D는 반지의 제왕의 직계라기 보다 반지의 제왕의 영향으로 탄생한 수 많은 펄프 판타지의 직계라 보면 되죠.


판타지 팬덤은 SF 팬덤과 상당히 같이 왔기에, D&D에는 SF의 영향도 짙게 남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D&D의 엘프는 톨킨식의 ‘고귀한 요정’이 아니라 스타트랙 벌칸족의 판타지 풍 어레인지죠. 초기 시나리오를 보면 광선검이나 레이저총 나오고, 신들의 땅은 거대로봇 날아다니는 SF세계라던가 그런 설정도 있었고.


게다가 D&D의 대표적인 설정이라 할 수 있는 ‘질서-중립-혼돈’, ‘선-중립-악’의 우주적 가치관 대립의 경우는 마이클 무어콕의 이터널 챔피언 시리즈(대표적으로 ‘엘릭 사가’) 같은 작품의 영향이 큽니다. 하여간 게리 갸이각스도 D&D 만들면서 수 많은 자료와 펄프 소설을 읽어댔다고 하니.


한국에야 뭐 무어콕 소설은 들어온 적도 없고, 고전부터 최근작 까지 그나마 폭 넓게 번역되었던 SF와는 달리 펄프 판타지는 커녕 세계적인 유명 판타지도 몇 개 번역되다가 끊기고 하는 판이니... “D&D는 반지의 제왕을 게임으로 하려고 만들었다” 같은 정보가 정설인 양 돌아다닌 적도 있지만요. 하여간 반지의 제왕 이전에도 판타지는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습니다.


뭐 이쯤에서 짧게 요약.

1. 흔히 말하는 ‘정통 판타지’는 판타지 전체에서 보자면 딱히 ‘정통’이 아니다.

2. 한국에서 칭하는 ‘정통 판타지’는 따지자면 에픽 판타지 혹은 하이 판타지라 부르는게 맞다.



그냥 늦은 새벽에 잡설이었습니다.

누구 돈 많고 덕심 쩌는 출판사 있으면 엘릭 사가 좀 정발 해 줘요. 나 그거 정말 읽어 보고 싶어...


ps. 따지고 보면 ‘판타지 세계 내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나는’ 이야기가 딱히 전부 하이 판타지인 것도 아니고...


Comment ' 9

  • 작성자
    Personacon Rainin
    작성일
    15.05.08 03:45
    No. 1

    문학적인 면에서 정리가 필요한 부분이죠. 펄프가 접해본 판타지의 거의 전부인 경우에는 뭥미하면서 그냥 지나칠 이야기이기도 합니다만...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3 늠.연.
    작성일
    15.05.08 04:44
    No. 2

    ps. 따지고 보면 ‘판타지 세계 내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끝나는’ 이야기가 딱히 전부 하이 판타지인 것도 아니고...

    -이거, 설명 좀 더 해주십시오!!
    정통 판타지라는 단어는 요새 왠지 널리 쓰이는 것 같고 그 뉘앙스가 어떤 부류를 뜻하는지 알 듯도 하지만, 대체 다종 다양한 판타지 내에서 [정통]이라 하는 것의 기준이 있기는 한가...? 하는 회의감에 제 글을 어디 소개할 때는 [하이판타지]라고 해왔단 말입니다. 그런데 아닐 수도 있다구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9 스톤부르크
    작성일
    15.05.08 12:36
    No. 3

    하이 판타지 로우 판타지의 구분은 '판타지 세계'의 문제라기 보다 그 내에서 판타지적 요소를 어떻게 취급하느냐에 따라 갈리는 편이죠. 마법이 일상적이고 몬스터가 흔하게 나오는 종류가 하이 판타지, 마법은 비밀스런 주술이나 전설속의 일이고 몬스터 또한 하나 하나가 기괴한 재앙쯤으로 취급되는게 로우 판타지. 의외로 해리 포터도 로우 판타지에 속한다고 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29 스톤부르크
    작성일
    15.05.08 12:44
    No. 4

    거기에 일반적인 구분은 아니지만, 하이 판타지라 하면 중세 유럽풍의 세계관이 딱 먼저 떠올라 버리니까요. 판타지 세계관이 그곳에 한정되어 있는건 아니죠. 마법 산업이 발달하여 근대나 현대적 분위기를 풍기는 세계도 있을 수 있고, 온갖 것들이 전부 어두칙칙하고 괴기스러워서 호러에 가까운 작품도 있을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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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85 하영민
    작성일
    15.05.08 06:38
    No. 5

    뭐 누가 정리를 해준다고 해도
    독자 개개인이 그 정리를 못받아들이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6 바람과불
    작성일
    15.05.08 07:44
    No. 6

    좋은 글입니다.

    예전 생각이 납니다.


    메탈을 세세하게 구분하고
    이거는 정통이고 저거는 사생아고 그거는 메탈이 아니야!
    하고 다니던 때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당시 진지하게 말하던 장르중에
    스피드 멜로딕 메탈이란 게 았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한국과 일본에서만 통용되는 용어더군요^^;;;;

    사실 나라마다 문화마다 통용되는 용어는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젠가코지로님 말씀을 조금 확장해서, 외국에서 통용되는 분류법이라 해도
    한국 장르독자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면 의미가 퇴색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3 사하(娑霞)
    작성일
    15.05.08 09:31
    No. 7

    한국 판타지는 외국이라고 말하기에는 뭐하고 미국 판타지와는 다르게 성장하는 중인 것 같네요. 일본과도 조금 다른 양상이 아닐까요? SF와의 연관성은 사라지고 무협, 게임, 한국의 현실에서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것이 지금 쓰여지고 있는 한국의 판타지가 아닐까요? 미국의 펄프 픽션의 역할을 지금 문피아를 비롯한 연재 사이트들이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입니다.

    엘릭 사가는 저도 보고싶음. 스톰브링거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오리지널 소설을 못봤으니...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페르딕스
    작성일
    15.05.08 17:17
    No. 8

    사실 환상문학 전체로의 판타지가 아니라, 전설과 괴수 중세풍의 소설로서 판타지를 따진다면, 전 정통판타지를 서로 다른 차원이지만, 연관되고, 점점 넓어지는 세계관이라고 하겠습니다.
    마블의 세계관에서 각각 모든 스토리는 별개일수도 있지만, 그 개념은 공유하고, 한 작품에서 나온 개념이 다른 작품에서도 차용가능하듯이요.

    그렇게 따지면, 한국형 정통판타지도 물론 존재하겠지요.
    오러를 쓰고, 심법을 연마하고... 물론, 이것도 나름 가치는 있지만, 사실 게임, 무협지 등등에서 그냥 베껴 온듯해서, 별로 가치를 두고 싶지는 않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0 카힌
    작성일
    15.05.08 21:27
    No. 9

    괜히 정통 붙이지 말고 쓰는게 낫겠군요. 다만 굳이 세세하게 구분짓는 것은 작가분들이라면 모를까 독자하고는 그다지 관계가 없죠. 그냥 독자는 현대판타지냐 퓨전이냐 아니면 그냥 판타지냐 이런정도만 따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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