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정말로 ‘우연’에 의해 흘러가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4월 18일인가에 15년만에 처음으로 글이라는 걸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몇 년 동안 머릿속에서 굴리던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염병할 캐릭터들이 밤마다 나타나서 놀아달라고 졸라대니 잠을 잘 수가... 며칠 쓰다가 필요한 정보가 있어서 검색을 했는데, 문피아로 링크가 연결어 공모전을 보게 된 겁니다. 그게 5월 1일이었네요. 회원가입을 하고 써둔 글 6만자 분량을 올렸네요.
15년만에 다시 글을 쓰고 있으니 얼마나 재밌겠어요. 정신없이 써댔지요. 그런데, 공모전 심사 때 조회수/추천수 같은 것을 반영한다더군요. 그래서 살펴보니, 손님이 전혀 없는 겁니다. 음식 만드는 게 재미있어서 정신없이 만드는데 손님은 하나도 안와요. 문피아가 유명한 곳이더군요. 공모전 참가작품도 엄청나게 많은가 봐요. 저는 5월 1일 전까지는 문피아가 뭐하는 곳인도 몰랐습니다. 구글링에서 가끔 안내해줘 작품평을 몇 개 읽어 본 적이 있고 모두 인상비평이어서 독자들이 편하게 수다떠는 곳인 줄 알았으니까요.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공모전 마감일까지 20만자를 채우라더군요. 회의감이 들면서도 어쨌든 쓰는 게 재밌으니까, 지금 대상골에서 뛰어다니고 있는 캐릭터들의 살아가는 모습은 기록으로 남겨둬야 하니까, 다큐멘터리 쓰듯이 캐릭터들이 노는 모습을 글로 옮겨 적었지요.
지난밤에 20만자를 넘겼습니다. 자정이 조금 지나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이 안오더군요. 무언가 잘못되고 있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짚어보았습니다.
음식이 맛없으면 손님이 안오는 게 당연하잖아. 필력이 부족한 건 잘못된 게 아냐.
문피아에서 유행한다는 판타지, 레이드물(이게 무슨 뜻인지 여전히 모름)이 아니니까 손님은 더욱 안오겠지. 심사위원들은 내 글을 읽어보지도 못하겠군,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새벽 네 시가 넘어가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생각이 잡히더군요. 공모전을 의식해서 캐릭터들을 무리하게 사건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을 알게 된겁니다.
소설이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야기라는 정의에는 동지하지 못합니다. 소설이 캐릭터라면 저는 동의할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철규가 30분간 참아왔던 똥을 어렵게 화장실을 찾아내서 싸는데 오줌과 똥이 함께 나오면서 미칠듯한 통쾌감에 몸을 부르르 떨면, 살인도 없고 엘프도 없고 태극권이 없어도 제게는 멋진 소설입니다. 조회수/추천수 하나도 없어도 제게는 멋진 소설이며 제게는 이미 심장이 뛰고있는 생명체가 됩니다. 이런 건 포기할 수 없지요. 태극권은 강룡십팔장으로 대체할 수 있지만 철규가 똥싸며 느꼈던 통쾌함이 섹스와 오르가즘으로 대체될 수는 없듯이.
캐릭터들과 교감하면서 백년을 살아온 연인처럼 즐기듯이 천천히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아주 긴 호흡으로 열권, 혹은 그 이상의 분량을 기획하고 쓰기 시작했던 것인데 그 긴 호흡을 기다려줄 손님이 없을 것 같으니까 사건을 조기에 열어버린 것이지요.
필력도 없겠지만, 연재에 적합하지 않았고 마감이 잡혀있는 공모에는 더욱 안 어울렸을지도...
5월 1일에 문피아 공모전 안내 페이지를 보면서 느꼈던 그 반가움이 지금은 어디로 사라지고 없고, 문피아를 원망하는 마음만 커집니다. 염병할 문피아는 왜 독창적인 작품과 작가를 발굴한다면서 심사할 때 인기투표 점수를 반영한다고 했을까요? 아, 미치겠군요. 빈 매장이 있어서 가게를 열었는데 장사는 안되고, 손님들 끌어모으려고 음식에는 조미료만 왕창 뿌려댔으니.
20만자를 채웠으니, 당분간 천천히 제가 쓴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좀 해봐야겠네요. 잘못된 부분을 되돌릴 수 있겠는지, 연재를 중단할지, 잘못 태어난 캐릭터도 이미 생명을 받았으니 그래도 어떻게든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건지. 주인공 중 한 명이 이 네 번 이혼한 남자인데, 이 작품은 내게 악연의 아내인가 불량한 자식인가.
고수들은 이런 험난한 사태를 어떻게 헤쳐 다녔는지 묻고 싶군요. 강호란 그런 곳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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