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고 기회가 되면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 싶은 글이 몇가지 있습니다.
굉장히 두서 없지만 일단은 추천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1. 상실의 시대(노르웨이 숲 // 혹은 노르웨이산 가구)
무라카미 하루키 작입니다. 굉장히 남성중심적이긴 하지만, 그런 만큼 주인공의 솔직담백함이 백미이고,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이 일품입니다. 무수한 명언들을 남겼고(인생은 비스킷통이라든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좋아하지만 싫어하는 사람들은 잘 꾸민 야설이라고 비아냥거리지요. 물론 저는 좋아하는 입장입니다.
참고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태엽감는새,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해변의 카프카 모두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도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특히 좋아하고요.
2. 위대한 개츠비
피츠제럴드의 작품입니다. 원래 미국 문학작품이라고는 호밀밭의 파수꾼 정도 밖에 몰랐지만 위에 언급한 상실의 시대에 이런 대사가 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사람이라면 친구가 될 수 있겠군.”(정확하진 않습니다) 저는 당시 무라카미 하루키를 존경하고 있었으므로 과연 어떤 이야기이길래! 라고 생각하며 읽었지요.
처음엔 재미가 없었습니다. 아직 어렸거든요.
두 번째도 재미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직 어렸거든요.
세 번째에 이르러서 뭔가 느껴졌습니다. 우선 문장이 정말 훌륭했습니다. 상실의 시대를 빌려 무라카미가 평하기를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버릴 페이지가 단 한 장도, 버릴 문장이 단 하나도 없다’라고 했는데, 번역본으로 본다는 크나큰 마이너스 요소가 있음에도 그 말엔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애초에 시작부터 강렬합니다.
“누군가에 대해 비평하고 싶어질 때, 누구나 너와 같이 많은 이점을 타고 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만은 기억해둬라.”(이 역시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위대한 개츠비는 작품 내내 완벽한 복선과 소설적 장치를 활용하며, 왜 ‘위대한 개츠비’인가 사람들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만듭니다. 연애 소설이지만 사회 비판 소설이기도 하고, 어찌보면 연애 이야기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저는 애초에 개츠비가 데이지를 사랑하는 게 맞는지도 의아합니다. 물론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정의에 있어서 혼란스럽지만요)
그야말로 읽을 때마다 변화하는 소설.
저는 그런 소설을 가리켜 ‘명작’이라고 말합니다.
3.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어쩌다보니 위대한 개츠비에 이어 불륜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이 소설까지 추천하게 되어 제 사상이 의심되기 시작합니다만, 저는 별로 불륜을 지지하거나 옹호하거나 아름다운 사랑의 형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별로가 아니라 굉장히 혐오하는 편입니다. 애초에 제 지인이 연인의 배신으로 어떻게 스러져 갔는지 똑똑히 봤는데, 그걸 옹호할 리가 없지요.
각설하고,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위대한 개츠비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가 그의 소설에 영향을 받았듯이요. 이 소설 역시 위대한 개츠비와 알게 모르게 비슷합니다.
아름다운 문장, 훌륭한 복선, 어딘가 영문법적 표현. 그리고 불륜(응?)
둘 다 돌이킬 수 없는 청춘의 표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 다 환상이 현실이 되면 그다지 환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개츠비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했던 사랑의 추억도, 아름다움도 결국은 의미없이 퇴색하고.
이 소설의 주인공이 감싸쥐려는 그녀 역시 ‘아마도, 한 동안은’ 이라는 유명한 말로 도망칠 뿐입니다. 소설 전반적으로 흐르는 감정선은 잔잔하면서도 역동적이고, 소나타를 듣는 기분이랄까요?
저는 비록 장르문학, 그 중에서도 ‘양판소’라 불리는 것들을 적는 글쟁이에 불과하지만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전력을 다해 이런 소설들을 적어보고 싶습니다.
물론 안 될 거야. 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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