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기존 세계관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따르라! 따라가야할 기본 설계도의 의미,
나를 넘어서라! 뚫고 넘어서야할 벽의 의미,
무협에서 우리는 구파일방을 알고, 마교를 압니다.
마교는 악이지만, 이 세계관을 따를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를 택하든 후자를 택하든 그건 작가의 선택이죠. 전자를 선택해서 좋은 작품이
나올 수도 있고, 후자를 선택해서 좋은 작품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판타지는 무협에서 비해서는 이런 세계관의 뼈대가 더 허술한 편입니다.
판타지의 마교 같은 존재라면, 명확한 집단은 아니지만, 흑마법사가 있겠죠.
그렇다고 판타지의 기존 세계관과 설정들이 별로 없냐면, 그건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판타지 작가들이 톨킨식 세계관 또는 러브크래프트의 세계관에 많은 도움을 받고, 의지하고 있죠.
이 세계관, 설정을 그대로 따를 것이냐, 뛰어넘을 것이냐는 것은 오로지 작가의 선택입니다. 슬라임이 강철 갑옷을 입고, 두 발로 걸을 수도 있습니다. 스켈레톤이 가죽갑옷에 둘러싸인 채 피가 흐르고 있었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설정인데요. 설정이 무슨 법조문도 아니고요.
하지만, 여기에도 전제는 있죠.
독자들이 익숙한, 이미 알고 있는 설정과 세계관에 맞지 않는 무언가를 재창조하려면,
거기에 대한 그럴 듯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죠.
천사였던 루시퍼가 악마가 된 것을 우리는 다 압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설정을 사용하죠. 하지만 독자들이 다 모르고 있던 사실, 아니 전에는 없던 설정이라면?
그렇다면 작가는 왜 루시퍼가 천사에서 악마로 타락을 했는지 그 이유를 꾸며서 설명해야겠죠. (그것만으로 하나의 긴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고, 또는 그냥 본 이야기를 위한 짤막한 설명으로 끝날 수도 있겠죠.)
위에 슬라임이나 스켈레톤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혀 기존 설정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아무런 설명도 없으면 독자들은 이게 뭐지? ?만 떠오르게 마련이죠.
심지어 저 몬스터들은 영어 자체에 그 특성이 내재된 것들 아닙니까?
점액, 뼈다귀,
근데 그런 특성과 떨어진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조를 했다면, 작가는 당연히 그것에 대해서 그 이유나 배경을 설명해줄 의무가 있는 겁니다.
뭐 그런 것까지라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이건 창조가 아닌 재창조이니 당연한 겁니다.
순수 창조라면 그건 작가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진 창작물이니, 그것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름을 윈드라고 짓고, 땅속을 꾸물거리는 몬스터를 만드는 것은 별로겠죠.)
그런데 재창조는 이미 있는 걸로 바꾸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어째서, 이미 있던 기존의 이미지가 작가가 의도하는 새로운 이미지로 바뀌었는지를 설명해줘야 합니다.
그것도 싫다면 기존의 설정을 사용하면 안되겠죠.
사실 이런 기본적인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냐는 생각도 했지만, 이런 기본적인 것조차 안 지켜지는 경우를 보면서 이건 아닌데? 란 생각이 들어서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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