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스타가 어디 따로 있습니까? 자기일에 최선을 다하면 누구 든지 자기인생의 슈퍼스타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진해중학교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야구를 시작한 감사용(48).
그는 마산고교를 거쳐 인천전문대에서 1년동안 마운드에 섰다.
“군대에 가야 했는데 당시 군에서 운영하는 야구팀은 육군에 하 나, 공군에 한팀이 있었어요. 그러나 저는 거기에 갈 실력이 못 돼 78년 일반 육군으로 입대해 만기제대했습니다. 대학졸업후 삼 미종합특수강 창원공장에서 구매관리를 담당하는 직장인이었던 그에게 어느날 가슴밑바닥에 억눌러둔 ‘운명’을 자극하는 상황 이 벌어졌다. 계열사인 삼미슈퍼스타즈가 진해에 합숙훈련차 내려 왔던 것. 프로야구 원년은 82년, 당시 삼미슈퍼스타즈는 인천을 연고로 하고 있었다. 직장인 야구선수였던 그는 당시 26세로 삼 미의 왼손잡이 투수가 되었다.
“도전했습니다. 남몰래 숨겨왔던 꿈을 이룬다는 각오로 일이 끝 난 밤마다 체력훈련을 했고 배팅볼을 한달반정도 던져가며 준비 했습니다.” 그러나 감사용은 데뷔첫해 1승 14패 1세이브를 기록 했다. 이후 청보→OB를 거쳐 86년 은퇴할 때까지 단1승도 추가하 지 못했다. 그런 그이지만 ‘패전투수’라는 말이 나오자 갑자기 목소리 톤을 높였다. “야구에서 패전투수란 없습니다. 선발투 수가 지쳤을 때 대신해서 마운드에 오르는 역할입니다. 구원이라 고 해야 맞는 것입니다. 82년엔 저도 선발로 8번 기용됐고 완투 도 1번 했습니다. OB에 있을 때 세운 1이닝 최소투구수 3개의 기 록은 아직도 제가 가지고 있는걸요.” 세월의 의미를 알기 때문 일까. 그는 어느 순간 목소리를 낮추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지금에 와서 중요한가요? 물론 과거 좋은 기록이 있었다 면 나쁠 건 없겠지요. 하지만 더 중요한 건 현재에 충실한 거 아 닌가요?” 87년 창원으로 돌아와 90년대엔 한때 고깃집도 하고, 그러면서 경남지역 야구저변 확대를 위해 초중고교 코치와 감독도 맡아보 고 창원시 직장야구협회 위원과 할인마트의 총괄관리부장으로 일 했다. 그러던 그에게 몇년전 서울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자신의 삶을 영화로 만들겠다면서… 김종현감독. 그가 감사용을 몇년동안 설득한 끝에 야구영화 ‘슈 퍼스타 감사용’을 자신의 데뷔작으로 만들었다. “처음 시사회 장에서 영화를 볼 때 감개무량하더군요. 기분이 좋기도 하고 가 슴도 벅차고 옛날일도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금은 감독과 배우, 스태프모두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를 모델로 한 영화가 어려운 이웃들, 실의에 빠져있는 운동선수들, 그리고 꿈을 이루 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 위안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 덕분에 저 자신도 슈퍼스타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물론 영화내용이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지만 그건 감독의 고유권한이므로 존중해야지요.” 영 화에서처럼 부인은 매표소직원이 아니었고 친척의 소개로 만났으 며 현재 스무살된 아들이 한명 있다고 소개한 그는 최근의 병역 비리 파동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너무 금전적인 것에만 신경쓰는 선수들이 있는 것 같아 보기 안좋더군요. 팬과 구단이 가족처럼 가까워지는 분위기도 퇴색하 는 것 같고…구단과 관계기관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라고 생 각합니다.” 마지막 멘트를 주문하자 또박또박하고 힘있는 목소 리가 돌아왔다.
“저를 사랑해주셨던 야구팬들, 특히 인천팬 여러분 고맙습니다.
그리고 영화보시는 분들이 제 영화를 계기로 다시한번 좌절에서 꿋꿋이 헤쳐나오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도 언젠가는 슈 퍼스타가 되실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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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펌글. 참 시사하는 바가 많은 인터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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