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부터 제 우상이다시피한 사촌 형이 있습니다.
제가 고 1, 아니면 고 2 무렵이었으니 형은 그때 이미 어엿한 사회인이었죠.
어느 날 형이 자신에게 온 편지를 제게 보여준 일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편지를 보낸 이가 미래의 형수감이고 내용 또한 그지없이 훌륭한 글이라 제게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한 듯 합니다.
파아란 볼펜으로 쓰여졌던 정갈하고 우아한 필체의 그 글은 참으로 인상적이었고 감탄스러웠지요.
제목이 '지초와 난초의 사귐'인가 뭐..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일은 이내 기억너머로 묻혀졌지요.
학교마다 졸업을 앞두고 '교지(校誌)'를 발간하는 전통은 있을 줄로 압니다.
고 3 막바지에 주로 이루어지는 일이었는데 제게도 수필 한 편을 써 내라는 문예반 친구의 부탁이 들어왔지요.
몇 차례 거절하는 척 하다가는 결국 못 이기는 양 글을 써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그 글은 당당하고 자랑스런 제 이름을 달고서 교지에 실리게 되었답니다.
그렇게 곧 우리는 졸업을 하였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어찌어찌, 중학교 때의 동창 여자친구(전 남녀공학 중학교 출신인지라) 두 명이 제게 놀러 온 일이 있었습니다.
그 둘이서 책장의 앨범 따위를 뒤적이며 키키득대곤 하더니 드디어는 그 '교지'를 훑어나가다가 제 이름의 글을 읽어보더니 대뜸,
"응? 이거..어디서 봤는데..."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내심 좀 당황했지만,
'지가 보긴 어디서 봤을라구...' 하면서 황급히 말을 돌려버렸지요.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내가 사촌형의 애인으로부터 온 편지내용 일부를 허락없이 가져다 썼기로서니 지가 그걸 어찌 안단 말입니까...
아무튼 그런 해프닝 후에도 세월은 또 흘렀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아아.......
나는 그만 스스로 홧홧해지는 얼굴 때문에 죽고만 싶었던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지초와 난초의 사귐' 인가 그랬던 제 사촌형 애인의 그 편지는 알고보니 다름아닌 유안진 교수의 [지란지교를 꿈꾸며]란 수필 전문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아무리 흐릿한 기억만을 차용(借用)했기 때문에 원작인 유안진 교수의 [지란지교를...]를 그대로 베껴쓴 건 아니라지만...
그리고 거기에 아무리 당시의 제가 생각하던 '이상적인 친구' 모델을 가소롭게 첨삭한 딴 글로 탈바꿈시켰다지만...
어떤 식으로 변명해 본들 그것은 여지없는 "표절", 바로 그것이었을 따름입니다.
얼마나 많은 동기생 친구들이 나중에라도 그 사실을 알고 쓴웃음 지었을 것이며...
그 글을 읽은 사람들 마다 콧바람 날렸을까를 생각하면...
지금도 오직 참담하고 수치스러울 뿐 속수무책인 것입니다.
아무리 17~8년이 지난 과거라지만, 그리고 이제는 그때의 교지 또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라졌는지조차 모르게 되고 말았지만 아직도 그 일만은 제 기억속에서 여전히 끔찍한 흉터로 남아 있습니다.
* * * * *
오래전 그때, 제일 먼저 제 표절을 눈치챘었던 중학교 동창인 여자친구를 [아이러브스쿨(모교사랑)] 사이트를 통해서도 찾아 헤매어 보았지만 끝내 찾을 수가 없더군요...
銀珠야...아..창피하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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