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세기 최고의 뮤지컬 작품을 묻는다면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지만, 최고의 뮤지컬 여배우를 묻는다면 대답은 대부분 일치한다. 지금은 남남지간 이지만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두번째 부인이었던 여배우 사라 브라이트만(Sarah Brightman)이 있기 때문이다. 요즘 국내에선 팝과 오페라의 이종교배를 일컫는 팝페라 가수로 더 유명하지만, 그녀의 본향은 누가 뭐래도 뮤지컬 무대다. 영국 태생으로 아름다운 고음을 구사하는 그녀의 명성은 두 세기에 걸쳐 수그려 들지 않고 있다.
사라 브라이트만의 무대 경력은 그녀 나이 겨우 13세 때부터 시작됐다. 어릴 때부터 재능이 보이면 그 소질을 잘 살리게 배려하는 영국의 교육제도 덕분이다. 그러나 초창기 그녀의 주 활동 무대는 가수가 아닌 무용수로서였다. 유년 시절부터 욕심 많던 그녀는 10대 학창 시절 학업과 병행해 하루도 빠짐없이 발레 레슨을 받는 등 매사에 성취욕이 강했다고 한다. 그 덕분에 16살 때 영국의 유명한 댄스그룹인 팬스 피플(Pans People)의 멤버로 참여하게 되고, 18세에는 알린 필립스의 무용단인 핫 가쉽(Hot Gossip)에서 활동을 시작한다.
그러나 춤꾼이었던 사라 브라이트만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은 '뮤지컬계의 마이다스'라는 영국의 천재 작곡가,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의 만남이다. 이들의 첫 만남은 81년 캐츠(Cats)의 공개 오디션 때였다. 1981년부터 지난 2002년 5월까지 웨스트엔드의 뉴런던극장에서 21년 동안 쉬지 않고 공연됨으로써 대형 뮤지컬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공연된 작품으로 기록된 웨버의 뮤지컬 캐츠는 고양이를 의인화한 T. S. 엘리엇의 시를 극화한 작품으로 노래만큼이나 각양각색의 안무로 유명하다. 사라 브라이트만은 이 뮤지컬에서 갈색 얼룩고양이 제마이마(Jemima)으로 오리지널 캐스팅 되어 오랫동안 연마해온 춤 솜씨와 타고난 미모 그리고 아름다운 미성을 선보였다. 그야말로 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그녀는 자신의 끼와 매력으로 작곡가 웨버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때부터 웨버와의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돼 84년에는 뮤지컬 '노래와 춤(Song and Dance)'에 참여하고, 85년에는 로린 마젤의 지휘 아래 플라시도 도밍고와 함께 웨버의 클래식 콘셉 음반인 '레퀴엠(Requem, 진혼곡)' 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최근 '천사의 목소리'라는 별칭으로 국내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는 영국의 십대 팝페라 가수 샬롯 처치(Charlotte Church)의 노래 '피에 예수(Pie Jesu)'는 사실 바로 이 앨범 '레퀴엠'에서 사라 브라이트만이 윈체스터 성당 합창단의 소년 단원인 폴 마일스-킹스톤(Paul Mile-Kingston)군과 함께 불렀던 노래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레퀴엠'은 영미 양국에서의 클래식 앨범판매 순위 1위에까지 오르며 그녀를 그래미상 최우수 클래식 신인 아티스트 부문 후보에까지 오르게 한다.
1986년 사라 브라이트만은 그녀의 일생일대 대작이라 손꼽힐 만한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에 여주인공으로 발탁된다.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이 뮤지컬이 웨버가 사라 브라이트만의 재능을 뽐내게 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라고 꼬집었을 정도로 그녀는 자신만의 재능을 십분 발휘한다. 이후 '사라 브라이트만이 (유령의 사랑이었던) 크리스틴'이라 여겨질 정도로 그녀는 미증유의 대성공을 기록한다. 특히 동명 타이틀의 주제곡은 뮤지컬의 흥행과는 별도로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얻었는데, 얼마 전 유령의 국내 무대 오디션 때에도 이 노래의 고음을 소화해 낼 수 있는 후보자가 얼마 안 돼 국내 제작진이 애타했던 기억이 난다. 국내 프로덕션에서도 새삼 그녀의 위상이 재확인된 셈이다.
뮤지컬에서 시작된 그녀의 활동영역은 음악적 깊이를 더해 가며 세계로 확산된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개막식에서 그녀는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공식 주제가 '영원한 친구(Amigos Para Siempre)'를 불러 그녀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던 비평가들을 침묵시킨다. 이 노래는 우리 대중들에게도 익숙한 편인데, 왜냐하면 올림픽 마라톤의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선수가 몬주익 경기장을 뛰어오르는 장면과 함께 숱하게 듣던 바로 그 노래이기 때문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웨버는 사라 브라이트만에게 사랑했던 남편이자, 든든한 동료요, 더없는 사업 파트너였다. 그녀는 뮤지컬 무대와는 별도로 독자적인 밴드를 구성, '앤드루 로이드 웨버 인 콘서트 투어'사업을 벌려 세계 순회에 나선다. 1999년에는 한 해 동안 무려 81개 전세계 대도시에서 무대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는데, 특히 이웃나라인 일본에서는 이른바 '사라 브라이트만 신드롬'까지 일으킬 만큼 큰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절정의 인기에서 그녀는 웨버와의 결별을 선택한다. 그 이유는 스스로에 대한 음악적 자존심 때문이었다. 사실 웨버가 사라 브라이트만과 두 번째 결혼을 올릴 때부터 호사가들은 종종 웨버가 조강지처를 버리고 '예쁜 장난감'을 얻었다고 비난했다. 한술 더 떠서 비평가들은 공공연히 그녀의 성공을 웨버의 그늘 덕이라 떠들어대기도 했다. 성취욕 강한 그녀에게 결코 달가운 이야기들은 아니었다.
그녀는 분연히 독자적 행보를 내딛는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잠시의 공백기를 거쳐 97년 사라 브라이트만은 맹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와 함께 부른 '이별의 시간(Time to say goodbye)'으로 한국을 포함한 전세계 이목을 모으며 자력갱생의 위대한 여가수로 재등장한다. "내 성공은 내 노력의 결과다"라며 웨버가 선사한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를 벗어버린 것이다.
당시 국내 케이블 음악방송의 프로듀서로 일했던 필자는 이 앨범의 홍보 차 한국을 방문했던 그녀를 만나 시내의 모 호텔에서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이미 불혹을 넘긴 나이였지만, 그녀는 아직도 무대의 여제요, 화려한 프리마돈나의 품위를 잃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새 밀레니엄이 시작된 21세기의 첫 자락에서 아직도 그녀의 노래 여행은 끝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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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사라 브라이트만을 정말 사랑합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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