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해진 날씨에 한껏 멋을 부리던 여자애들이 꽃샘추위에 덜덜 떠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다시 겨울이 온 것 같아서 술맛이 난다는 술꾼선배들도 여전하고, 길가의 개나리에 멍울진 꽃봉오리 위에 내린 서리도 볼만하고, 티를 안내려고 해서 더 티가 나는 새내기들의 모습은 귀엽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운동권선배들은 힘을 잃었지만 여전히 세상을 성토하는 술꾼선배들의 목소리는 줄지 않았고, 스포츠와 레저 동아리들이 인기가 대단했지만 다량의 술을 마시는 것도 스포츠의 범주에 넣어야 할지 고민해야 했다. 세상은 갑자기 빠른 변화를 강요하고 있었지만 새내기들은 버둥거리기에도 벅찼고, 복학생들은 취업준비에 여념이 없었고, 변화를 감지해야 할 친구들은 군대에 가 있었다.
아직도 교내 이곳저곳에서 커다란 대자보를 적는 일을 흔히 볼 수 있긴 했지만 이제는 머리에 띠를 두른 학생을 보기는 힘들었고, 작년만 해도 흔히 보이던 강목이나 쇠파이프는 아무리 찾아도 보기 힘들어졌다.
허리에는 삐삐 차고 공중전화에 줄 서던 시절의 이야기.
“여~ 고추잠자리!”
“성희롱이에요. 선배.”
“고추잠자리가 왜 성희롱이냐. 고추잠자리!”
“그러다 사망하십니다. 선배님”
대체로 별명은 그 사람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으로 불리게 마련이지만, 간혹 그 사람에게 관련된 일련의 특이한 사건이 별명이 되기도 한다. 새내기 중에 최미영이라는 아이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오티에 참가를 했다가 평범하게도 술을 마시고 일찍 쓰러졌다. 오티에서 새내기가 할 수 있는 평범한 행동이었지만, 그 쓰러진 자리가 문제였다.
먼저 쓰러져있었던 다른 새내기 남자애의 조금 중요한 위치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술에 일찍 취해 한쪽 방구석에 쓰러져 잠자던 남자애를 쿠션으로 착각하고 베고 누웠는데, 하필 머리를 기댄 위치가 남자애들이 약간은 소중히 해야 할 그 위치였었다. 그 곳이 보통의 쿠션만큼 푹신했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지만 그런 질문하려고 시도하려는 무모한 학생은 없었다. 아무리 궁금한 사실도 때로는 포기해야 오래 살 수 있다.
엄밀하게 따지면 사실 고추잠자리라고 불러야 할 사람은 그 소중한 곳을 베게로 내어준 남자애여야 할 테지만, 별명을 상대가 만족할만한 것으로 불러주는 답답하고 친절한 사람이 그리 흔한 편은 아니다. 그래서 미영이의 별명이 고추잠자리가 되었고, 애들은 미영이가 없는 곳에서는 고추잠자리라고 불렀다.
미영이가 있는 곳에서는 함부로 스무 살짜리 여자애에게 부르기 아주 약간 민망해 더 재미있는 별명으로 부르기 어려웠지만, 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미영이를 고추잠자리라고 불렀었다. 전에 어떤 술자리에서 미영이 동기 남자애가 그 별명을 사용했다가 시원하게 뺨이 돌아간 이후에는 모두가 조심하는 분위기였지만, 설마 선배의 턱을 날리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내 친구들도 미영이의 앞에서는 그 별명을 사용하지 않았었다. 조금 모난 성격이긴 하지만 누구라도 그런 별명을 갖게 되면 까칠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꽤 귀여운 외모 때문에 미영이와 잘해보고 싶었던 녀석들이 많았었던 것 같다. 그래서 미영이의 별명이 고추잠자리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사실 부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고 나만 재미있는 좀 특이한 상황이었다.
보통의 경우에는 미영이가 지나치게 까부는 나를 피했기 때문에 둘만 있을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어쩌다가 학회실에 미영이와 나만 남겨져 흔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조교누나가 부탁한 명단을 잠시 정리하다가 심심해져서 대자보를 쓰고 있던 미영이를 불렀다.
“야. 고추잠자리!”
“...”
“고. 추 .잠. 자. 리!”
“왜!”
“왜?”
“야이 쉬벨놈아 사람이 듣기 싫어하면 적당히 하다 말아야지, 캐쉐키야. 일 년 일찍 학교 들어온 게 무슨 대수라고 아주 조까튼 쥐랄을 끝도 없이 하냐? 아주 그냥 혀를 뽑아서 목구멍에 처 쑤셔 넣을까보다 어? 그리고 나 재수했거든? 쉬벨놈아? 숨기려고 했는데, 샹노무쉐키 때문에 참을 수가 없네. 어!”
“...”
“저 재수한건 그냥 선배만 알고 계세요”
“...”
“선배님?”
“오빠라고 부르면”
“죽고 싶나 쉬벨놈이 아주 그냥 간이 배 밖으로 나왔어? 넣어줘?”
“...”
“그 별명 이제 하지 마세요.”
“...네”
그 별명을 아무도 부르지 않았던 진짜 이유를 알았다. 나도 그 날 이후에 그 별명으로 미영이를 부른 적이 없다. 쫄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철이 들었을 뿐이다.
엄마야~ 나는 왜 갑자기 보고 싶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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