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의 취지는 아니고 말 그대로 한담을 몇 자 적어보겠습니다.
요새는 국어 시간에 어떠한 작품들을 두고 수업을 하는지 잘모르겠지만 제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배웠던 소설들을 당장 몇 작품 떠올리자면 소나기, 선학동 나그네, 메밀꽃 필 무렵, 수난이대 등이 있네요.
그땐 그런 소설들을 접하면서 줄곧 떠오르던 의문은 '이런 걸 굳이 왜 읽고 분석해서 시험까지 쳐야 하나?'였습니다. 간략적인 줄거리, 시점이 어떻고 복선이 어떻고 맥락이 어떤지 오직 시험에 나오는 일회성 공식만 중요했을 뿐 정작 소설 본연의 재미와 깊이를 이해하진 못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게 등한시하던 교과목 수업 속의 그 지겹고 따분하던 소설들이 성인이 되고 사회인이 된 지금에 와서 다시 읽어 보았을 때 문학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었나 처음으로 느껴지더군요. 그것도 감수성 풍부할 청소년 때를 한참 지나서...... 이상한 일이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좋은 작품들을 통해 국어 시간이 우리에게 가르치려던 것은 가장 기본적인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소설을 이해하고 쓰는 데에 필요한 지극히 기본적인 것을 말이죠.
제가 쓸데없이 국어 과목을 서두로 한 이유는 이 기본적인 것을 말하려 함입니다.
양판소라는 단어는 제 생각으로 어느 정도까지의 작품 수준에 기준을 두어야 확실할지 모르겠고 더러는 즐겨보시는 몇몇 독자나 작가분들이 기분 나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제가 말했던 그 기본적인 것이 대부분의 게임소설 그리고 양판소에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 기본적인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맞춤법도 아니요, 어휘의 선택도 아니요, 사람과 사람간의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이 사람 때문에 사랑을 하고, 이 사람 때문에 화가 나고, 이 사람 때문에 즐거워 하고, 이 사람 때문에 사건이 시작되며 이 사람 때문에 사건이 종결되고. 어떠한 배경 없이 순전히 사람들만 등장시켜 빚어낼 수 있는 이야기의 수는 이토록 무궁무진한데 게임소설이나 양판소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배경은 휘황찬란합니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 보면 정작 인물들끼리 부딪히고 엮게되는 이야기는 너무나도 보잘 것 없습니다. 등장 인물들은 많지만 그들 중 누구도 주인공이 될수 없습니다. 주인공이 존재한다면 허명일 뿐, 오로지 이야기의 핵심은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닌 누가 최강자인 것인지, 최강의 검과 마법, 무공, 아이템은 어떠한 것인지를 지향합니다. 그렇다고 그 소재가 특별하고 흥미있는 것이냐?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소드마스터, 9서클, 무림비급, 기연, 몰락가문 등 작품은 여러 개고 작가도 여러 명인데 소재는 항상 겹칩니다.
그중 게임 소설은 소설보다는 기행문으로 보아야 옳을 것 같습니다. 주인공이 제어를 한다고는 하나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게임 속 캐릭터가 그저 주어지는대로 시키는대로 아이템을 먹고 레벨을 올리고 보스를 잡는 것을 읽고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재미는 일종의 성취감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 속에서 슬픔과 기쁨과 회환과 성찰과 같은 여러 복합적인 인간사와 감동을 느낄 수 있겠냐는 것이지요.
또한 양판소에 대해 제가 생각하는 바로는 소재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는 무협 역시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세계관은 밤을 새서 설명해도 모자를 정도로 장대하고 명확한 작품들이 많지만 거기서 등장하는 인물들 개개인의 윤리관과 선입견은 현실과는 거리가 멉니다.
누군가를 죽이는 장면은 허다하지만 그 장면들은 모두 주인공의 강함을 입증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 그를 필연적으로 왜 죽이게 되었는지 그를 죽임으로써 심경에 어떠한 변화가 생기는지 그를 통해 앞으로 연관되는 사건은 어떤 것인지가 부족합니다.
그리고 캐릭터에 숨을 불어 넣어야 합니다. 저마다 자기의 주장과 개성과 성격이 존재하는 보다 현실적인 인간에 가까운 등장 인물들이 필요합니다. 인물을 표현한답시고 특이한 버릇이나 말투, 의성어를 첨부하는 것만이 능사가 될 순 없습니다.
소드마스터, 9서클...... 비록 식상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어찌보면 판타지 특성의 고유적인 소재가 아니겠습니까.
문제가 있다면 소재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이 소재를 인물 사이에 두고 얼마나 창의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느냐 일 것입니다. 소재가 인물들보다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인물들을 뒷받침하여 인물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져야 합니다. 검과 무공과 마법이 주인공이 아니라 검과 무공과 마법을 사용할 사람이 주인공이어야 합니다.
작가는 사람이고 독자 또한 사람입니다. 문학이 아름다운 이유는 사람의 이야기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작품 속 기본에 충실했을 때, 양판소라는 수식어를 깨버릴 수 있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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