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뜨랑제 >>
에뜨랑제가 드디어 100회를 맞이 했습니다. 100번째 글의 후회에서 작가님께서 감상 혹은 비평을 해주실 '용사'를 찾으시기에, 부족하나마 작은 용기를 내어 봅니다. 감히 비평이라 하기엔 지닌바 능력이 모자라니, 추천의 이름을 빌려 감상을 해보렵니다.
개인적으로 에뜨랑제보다는 ‘초인의길’을 먼저 접했었습니다. 초인의길은 다소 현학적이고 전문적인 표현을 글속에 녹아 내려는 시도가 독특한 작품입니다. 어쩌면 초인의길을 통해서 그동안 하나의 형식으로 정형화 되기 시작한 틀을 깨는 신선함을 느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신선함이 지나쳐 일부 독자들이 글에서 멀어지려는 시점에서 드.디.어. <<에뜨랑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에뜨랑제는 요삼님 스스로 밝혔다시피, 가벼운 여행을 떠나는 기분으로 시작합니다. 글의 내용을 간락하게 소개하자면 미지의 세계에 떨어진 두사람이 격는 이계 모험담입니다. 다른 글 처럼 용도 나오고 신이라 불리우는 존재도 심심찮게 나옵니다.
그러나 용은 스스로의 역활을 오도했고, 신이라 불리는 존재는 이타를 모르는 욕심쟁이였을 뿐입니다. 물론 전해지는 모든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신은 결코 ‘이타’적 존재였던 적이 없었습니다만, 에뜨랑제의 신은 보다더 세속적이고 보다더 직접적입니다.
에뜨랑제라는 제목을 접했을때 개인적으로 ‘르네상스’와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르네상스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던 중세의 사회를 깨어 나게 했던 것 처럼 에뜨랑제는 설정에 치어 죽어가던 ‘초인의길’의 세계에 생동감을 주었습니다.
미지의 세상에 소환된 두 용자의 행보는 암울해야만 했던 상황에 비하면 경쾌했습니다. 희망을 잃지 않는 두 주인공은 서로를 의지하면서 세상을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소환된 사람들이 더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 재미난 이야기는 한번의 변화가 일어 납니다. 게다가 소환된 이들이 더이상 ‘사람’이라 할수없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두 주인공의 행보에 무게를 짐작할 수 없는 추가 더해집니다. 이 즈음의 독자는 음모의 한자락을 보게 됩니다.
요삼님은 초인의길과 같이 에뜨랑제에서도 설정을 글 속에 녹아 내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런 노력이 역시 ‘요삼’이라는 느낌을 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에뜨랑제에서 작가는 의도적으로 설명을 줄이려고 노력합니다. 설명보다는 상황을 묘사하려고 하려합니다. 상황을 묘사하기 보다는 가능하면 심리를 묘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글을 통해서 두 주인공인 산과 비연의 심리를 쫓게됩니다. 두 여행자가 두려움을 느낄때 독자는 가슴을 졸였습니다. 두 여행자가 실마리를 잡고 경쾌하게 문제를 풀어갈때 우리는 통쾌한 댓글을 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고, 때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현학적인 묘사에 아쉬움을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온갖 색체가 난무하는 무덤가에서의 전투신과 하나의 개체가 되어 버린 마적 집단과의 전투신이 그랬습니다.
요삼님은 독자에게 약속합니다. 에뜨랑제는 완결을 본후에 출판을 할것이다라고! 또한 스스로는 시장과 독자를 믿는다고도 하셨습니다. 그 용기에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고맙기도하고, 또 염치없이 슬쩍 응원을 보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이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이만 졸속한 감상을 마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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