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담란 독자도 쓸 수 있죠? 한담에 이런 글, 목적에 맞는건지...
개인적으로 소설 쓸 때 “이것만 지키면 그래도 볼만한 글”이라고 생각하는 내용을 한 번 정리해 봤습니다. 독자 입장에서요~
약간의 미니리름 있습니다. 예를 들면서 제가 읽었던 소설 몇 개를 이야기해 놨거든요. 살짝 등장하는 소설은 그oo 크oo, 엘야시온 스토리, 세월의 돌, 무언계, 기갑전기 매서커입니다. 읽을 예정이 있으시다면 가볍게 뒤로.
1. 설정은 천천히 드러내라
첫 화에(그러니까 첫 챕터) 주인공 나이, 직업(혹은 학교), 부모님 유무, 재산정도, 지금까지 대충 뭘 하던 인간이었는지 주르륵 풀어쓰는 소설이 꽤 많습니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일까? 주입식으로 나열해 놓은 ‘설정’은 읽기도 힘들고 읽는다 해도 그때뿐입니다. 이런 것이 결정적으로 주인공에 대한 ‘몰입도’를 떨어트리는 것 같습니다. 왜냐? 기억이 안 나거든요...-_-;
특히 게임소설에서 이런 경우가 많은데, 가상현실이 개발된 경위나 그 역사에 대해서 줄줄줄 늘어놓는 경우가 매우 많습니다. 몇 년도에 뭐가 개발되고 몇 년도에 무슨 일이 있었고... 이건 서술이 아니라 고문입니다. 독자보고 공부하라는 겁니까?
작가는 내던지듯 쭉 써놓고 독자가 읽었으리라 기대하고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죠.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스토리가 이해가 안 가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접게 됩니다. 설정 몰아서 써놓으면 독자 안 읽습니다.(저만 이런가요?)
꼭 글을 시간 순서대로 쓸 필요는 없습니다. 피라미드 형식으로 과거와 설정부터 밝히고 그 위에 현재와 미래를 쌓아가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좀 뒤바뀌면 어때요.
혹시 마인드 맵 아십니까? 도식화하는 건데...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하나의 덩어리가 나중에는 연결되면서 큰 그림을 그리죠. 설정, 세계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완성된 나무를 독자 머릿속에 집어넣으려 할 필요 없습니다.
엘야시온 스토리를 말해볼까요?
끝까지 ‘시나가 살았던 한국이 현실인지 꿈인지’에 대해서 작가님은 한 마디도 직접적인 언급은 안 하죠. 전체적으로 한쪽으로 생각되도록 유도를 하지, 설정을 대놓고 까발리지 않습니다. 어차피 3인칭이었으니 작가가 ‘그건 사실 이러이러했다~’라고 해도 되었을 텐데 독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했던 설정이죠. 물론 대세적인 결론은 있지만요.
엘야시온 스토리의 세계관은 매우 독특하죠. 끝까지 다 읽고 나서 세계관이 너무 생생하게 와 닿아서 놀랐다는. 앰버 연대기도 그랬었고요.
초반에 줄줄 풀어놓는 까닭은 참을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아야 하는데 참지 못하고 입이 근질근질한 나머지 앞에서 확 말해버리는 경우... 해결책은, 음... 비축분을 한번 왕창 쌓아보면 될 것 같네요. 그러다보면 앞에 농축되어 있던 액기스가 뒤로 좀 퍼지지 않겠습니까?
2. 천기누설은 자제를...
요즘 보면 특이한 소재의 소설들이 정말 많더군요. 저는 보면서 ‘오호, 오호.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했을까?’하며 감탄합니다. 개연성 뭐 이런건 작가가 설명하기 나름이라고 일단 치고요.
그래서 처음에 엄청난 호응을 얻으며 승승장구, 출판... 바뜨 3권부터 나락의 길로. “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끝은 심히 미약하리라.” 정도?
단순히 ‘어떤 소재든 글쓰는 사람의 역량에 달려있다.’라고 말하기에는 무책임합니다. 조금만 신경쓰면 훨씬 좋은 글이 되리라 생각하는 측면 중 하나가 이것입니다.
등장하는 주인공이 갓난아기가 아니라 성인으로 등장하는 이상, 살아온 이야기가 있겠죠. 사연 없는 무덤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배신이나 멸문 등등 암울한 과거를 가지고 있는 경우라던가, 알고보니 위대한(또는 매우 유명한) 이였다더라~ 하는 것 등 말입니다. 독자들은 특별한 주인공을 원하기 때문에 주인공은 뭔가 한가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걸 초반에 너무 까발리면 맥이 다 빠집니다.
퀴즈쇼 진행자가 문제를 내다가 얼덜결에 문제 정답까지 같이 읽어버리는 경우라 할 수 있겠습니다.(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퀴즈쇼 진행자도 정답을 못 본다지만.ㅎㅎ)
드래곤 라자에서, 처음부터 타이번의 정체가 확 밝혀졌으면 재미가 있었을까요? 그건 1인칭이니까 그러지~ 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요즘엔 특히나 전지적 작가 시점이 많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기누설을 하게 되는 거지요.
세월의 돌에서 주인공이 ‘ooo oo'라는 걸 다 말하고 시작했다면 과연 이만큼의 감동이 있었을까? 하는 걸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마지막권에서 아 이게 주인공이었구나 하는 걸 알고 가슴이 찌르르... 했었다는.
(저 다섯글자 맞추는 사람, 당신은 판타지마니아!)
3. 독자와 함께하자.(마스터베이션은 금물)
2번과는 반대되는 이야기이긴 한데, 이는 신비감 조성을 너무 많이 해서 짜증나는 경우입니다. 전지적 작가가(이런 경우 ‘전지전능’한 작가 시점이 매우 많다. 주인공의 과거는 당연하고 미래의 일도 다 꿰뚫고 있다.) 완전 제로스인 경우. “그건~ 비밀입니다.”
“얘한테 뭔가 있는데, 궁금하지? 궁금하지? 으헤헤헤~ 안 가르쳐줘~ 궁금하면 계속 봐~ 나중에 나와~” 이런 느낌? 아 씨, 사람 약올리는 것도 아니고!
작가가 ‘자기 혼자 아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느낌? 혼잣말하지 맙시다. 글은 대화라고요. 독백도 독백 나름이지, 중요한 거 다 빼놓고 이야기하면 누가 듣겠습니까. 여기서 잠깐 치아키 군의 말을 빌려오겠습니다.
(노다메 칸타빌레 1권, 치아키가 미네 류타로에 대해서 한 말을 노다메가 전하는 장면)
“아아... 그런 걸 두고”
“마스터베이션이라는 거야! 래. 한마디로 혼자 만족한다는 거지.”
“미네 녀석은 앙상블이라는 걸 볼라! 너 피아노 소리는 조금도 안 듣지? 혼자서 절정으로 치달으면 어떡해! 그리고 테크닉에만 너무 마음쓰지마!
(이 장면이 떠오르면 당신은 마니아...)
개인적으로 가장 속 뒤집어졌던 소설은 (대놓고 말해서 죄송합니다만 한때 인기도 많고 유명했던 소설이라 좀 더했다는... 그러니 모자이크 처리를... ‘그oo 크oo’입니다.)
분명히 출판작으로, 처음부터 쭈욱 차분히 읽었는데 왜 이렇게 스토리가 끊기는 거지? 언제 이야기가 거기까지 진행된 거야? 잠깐! 걔네 집안 일은 또 언제 이야기했대? 드브oo 터널을 만든 마법사에 그런 과거가 있었어? 오 그 마족이 영혼의 구슬을 빼앗겼던 거야? 근데 왜 마치 전에 언급했던 것처럼 이야기할까? 분명히 말한 적 없는데, 이러면 모르는 내가 바보같잖아. 아니, 이 소설의 목적이 언제부터 이거였어? 아무 생각 없이 움직이던 주인공이 사실 세계를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아 놔, 이러면 공감 안 간다는 말입니다. 언급 한 번 없더니 언제부터인가 ‘독자가 모두 그oo 크oo의 의미에 대해 알고있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더군요. 아니면 제가 몇 장이 찢겨진 책을 읽은 것입니까? 완결까지 다 읽은 자신에게 박수를 쳤다는.
개인적으로 2,3번의 예로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건 기갑전기 매서커입니다.(최근에 읽은걸 기준으로 생각하다 보니 가장 먼저 생각나는군요.)
권 초반 챕터에는 현재의 일을 서술하면서 과거 게임에 대한 가벼운 터치.
그리고 그 후부터는 아예 과거로 돌아가서 이야기가 진행되죠.
사실 이걸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주인공의 ‘과거’입니다.
읽어보신 분은 다 느끼셨겠죠? 게임을 하는 이유(한국을 떠나려는 이유), 슈팅 아머, 2년간의 실종 흑막(?)... 그런데 작가님은 절대 이것을 주절주절 다 내뱉지 않는다는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독자 복장터지게 “나 혼자만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지도 않지요. 어느 정도 짐작이 가면서도 은근히 자세한 사정이 궁금하게 만들죠. 아,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5권은 언제쯤....(이 글은 추천글이 아닙니다... 먼산.)
또, 제가 좋아하는 무협 무언계!
주인공 과거나 훈련 과정등에 대한 언급없이 고리대금업자 장원에서부터 시작하죠. 에피소드형식으로 진행하면서 양파껍질을 하나씩 하나씩 까는 듯한 글솜씨... (사람?님의 개그센스도 너무 좋아한다는ㅠㅠ)
주인공의 실력에 대해서도 감쪽같이! 속였다고 해야 하나...
나중에 결국 주인공의 과거에 대해 살짜쿵 밝혀지는데, 보고 깜딱! 놀랐죠. 앞에 몇 번이나 무림의 소문 형식으로 이야기했었으면서 이렇게 의뭉스럽게 넘겼었다니... 요즘 많이 나오는 전지적 작가 시점 사용자들은 그쯤에서 참지 못하고 ‘사실 그게 주인공 이야기야’라고 언급했을지도 모르죠.
그렇다고, 절대로 독자들에게 뭔가 있을 둥 말 둥 낚시만 하면서 놀리는 소설 아닙니다. 그냥 읽다보면 앞뒤가 연결되면서 앗! 하는 것 뿐.
무언계의 경우 에피소드 형식의 탄탄한 스토리, 주인공의 귀여움(취향이 이런 쪽이라...), 개성넘치는 조연들(개인적으로 진부영 넘 좋아해요! 으아으아ㅋㅋ), 잘 안배된 연애(...과연 그걸 연애라고 해야할지는 의문이지만...) 등등이 맛깔난 소설이죠~
요즘 소설들처럼 주인공의 인기를 실감시키기 위해 무조건 여자가 달라붙는 그런 하렘물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 양판소에서 여자는 주인공의 가치를 돋보이게 하거나 위험에 처하게끔 만드는 역할이므로 나중에는 ‘얘가 어떤 애였지?’하고 캐릭터의 존재조차 희미해지는데 반해... 무언계에서는 모든 조연이 생생히 살아있는 느낌이랄까요?
어, 글이 갑자기 추천글이 되었네요.(먼산)
최근에 [말도 안되게 강하지만 다 퍼주는 주인공+뭔가 굉장했던 과거를 회상이 아니라 그저 서술-가끔 우수에 찬 눈동자를 하는데 왜 난 그게 웃기지?-+주인공은 담백하지만 만나는 여자마다 족족 반하는 상황+등장하는 주요인물의 80%는 여자]의 조합글을 보았더니 뭔가 그에 대해 반박이 하고 싶었달까...;;;
1,2,3번 알고보면 좀 비슷한 이야기죠.
말해두지만 이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판타지라는 게 취향 문제라서 논란이 다분할 수 있겠죠.
다만 제가 지금까지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소설 싫어! 이게 왜 싫을까? 뭐가 문제지?’라는 의문에 대해 나름대로 일반화시켜서 얻은 결론입니다. 절대 충고가 아니라 한번쯤 이런 면을 생각해 달라는 거랄까요.
노다메는 그 후에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치아키 선배는 너더러 엉터리라고 말하지는 않았는걸."
"[표현이 재밌다]던가, [앙상블은 안 되지만 소울은 좋다]면서 칭찬했어-"
"그러니까 연습하자, 응? 제대로 맞추면 무척 기분 좋은 곡이야."
5000천자도 넘는 글 읽어주신 분 감사합니다.(있으려나...;;)
2탄도 있습니다. 1,2,3이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다면 올릴게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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