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제 연담 글에 달린 댓글중 좋은 의견들이 많고 또한 미쳐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지적해주신 분들도 있어 그나마 좋은 기분을 유지 할수 있어 다행입니다.
제 신조가 철없는 아이에게라도 배울것이 있으면 찾아서라도 배운다 입니다. 그렇다고 밑에 제글에 댓글을 달아 주신분들을 철없는 아이라고 비하하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하고 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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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 무협소설이 나쁘고 판타지소설이 나쁘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문학적 가치를 충분히 내포한 소설들도 있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무'와 협'은 오히려 불의와 타협하지 않은 올바른 정신수양의 수단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여기에 제가 바램하는 것이 추가 되길 바랄 뿐이죠. 괜한 곡해와 확대 해석으로 논란이 일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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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그리고 사대주의가 아니냐? 라는 두개의 댓글만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 들지 않기에 **넌픽션**으로 하나의 가상적인 상황을 적어 올려 봅니다.
미래는 언제나 불투명 합니다. 99.99%의 불가능이라 할지라도 나머지 0.01%의 확률에 당첨될수도 있기에 미래는 미래 인겁니다.
밑에 언급 할 내용은 지극히 추상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배제할수 없는 경우로써 발생할지도 모르는 사태를 꾸며 본것입니다.
사내아이 하나가 있다. 이 사내아이는 독서를 상당히 좋아하여 활자중독이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도 책을 탐닉했다. 특히 이 사내아이가 즐겨 읽은 것은 ‘장르문학’으로 대변되는 판타지 소설이 주를 이루는 것만이 아닌 다른 일반교양 서적이나 지식습득을 위한 탐구서적등도 있다.
하지만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넘어가는 사춘기의 아이들이라면 쉽사리 빠져들기 좋은 ‘영웅’혹은‘용사’들의 활약을 실감나게 서술한 ‘장르문학’쪽 마음이 기울기가 쉬운 관계로 이 사내아이 역시 시간이 갈수록 ‘장르문학’쪽으로 편향된 소설들을 주로 탐독하게 되어갔다.
그 후 십년 뒤 그 아이가 성장을 하여 현실을 깨달고 사회에 적응하면서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한 아이의 아버지요 한 여인의 지아비가 되어 나름 행복한 삶을 살아갔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고달픈 법, 현실에서 쌓인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서 성장한 사내는 취미로 운동도 하고 어릴적 즐겨 읽던 통쾌한 장르문학을 다시금 접하게 된다.
그렇게 하나둘 소장 또는 대여를 해온 책들이 쌓이면서 사내의 자식(아들 혹은 딸)도 아비를 따라 쉽게 장르문학을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어느 날 사내의 자식이 자라서 학교를 다니게 된 이후로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귀가를 하면서 아비인 사내를 원망어린 시선으로 노려보는 게 아닌가?
이에 아비된 입장으로 사내는 자싱을 불러다 호통을 치며 그 연유를 물으니 자식이 답하기를 ..
“학교 친구들이 나더러 근본도 모르는 무식한 녀석이라고 했단 말이야!”
허! 이무슨 청천벽력과도 같은 황당한 괴변인가? 하여 사내는 크게 화를 내며 자식을 닦달하여 보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하였고 그 연유는 이러했다.
평소 아비가 즐겨 읽던 장르문학의 통쾌한 영웅 소설들을 따라 읽으면서 자식의 민족 관과 세계관이 요상하게 어린자식의 의식에서 자라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민족 보다는 소설속의 민족들에 대한 동경을 막연하게 품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자식의 의식을 잠식해 나갔고 급기야는 자신의 뿌리인 민족을 완전히 부정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이민족의 역사와 민족적인 우월감에 빠져들어 무심결에 자신의 민족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게 됨으로써 학교의 급우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이후 사내에게는 두 개의 선택을 해야 만했다.
하나는 자식을 감싸고 자신의 자식을 따돌림으로써 마음의 상처를 입힌 아이들을 찾아가 호통을 치는 것과 자신의 사소한 부주의로 민족의 경계가 모호해져 일명 ‘킬링 타임용’혹은 ‘대리만족’용으로 구분되어버린 장르문학을 이제라도 멀리하며 자신의 자식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 줄 것인가 하는 선택이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이 두 가지 이외에도 보다 많은 선택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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