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내가 삼초식을 양보하도록 하겠다.
(상당히 건방진 필자. 지나가던 협객들이 손볼 결심을 한다.)
협객 1: 은거기인 “선인지로!” => 캑! 눈깔 찔렸다.
협객 2: 무당도사 “무당면장!” => 짜작! 뺨에 손자국 났다.
협객 3: 소림무승 “백보신권!” => 꾸엑! 아침 먹은 거 다 쏟았다.
아이고... 초면에 실례해서 죄송합니다...
(몇 대 맞더니 정신 차리고 이제야 공손해진 필자.)
갑자기 정담란에 무협소설의 세계관에 대한 고찰이 화두로 등장하고 있네요. 이유야 어찌됐건 앞으로 어떤 식으로 귀결이 되건 간에 이러한 현상은 상당히 고무적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제가 이렇게 필을 든 것은 무협소설계에 만연한 듯 보이는, 특히 소설의 내용에 대한 오해와 시비를 거론하고 거기에 제 나름대로의 변명을 붙임으로써 이해를 돕고 무협계의 부활을 꿈꾸고자 해서 입니다.
첫째, 진부함에 관한 시비!
무협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고대 중국 역사의 한 장입니다. 삼국지나 초한지 등 그네들의 방대한 역사서와 소설에서 시작된 호쾌한 영웅들의 이야기가 남자들의 본능(?)을 자극함으로써 전세계 독자들의, 특히 지금은 골수팬들의 사랑을 아직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작가들은 무술의 발원지인 소림에서부터 무술이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많은 문파들이 형성되고(구대문파 등) 그에 상응하는 사파 및 마도가 만들어지면서 대립각을 세우는 스토리의 정형 아닌 정형을 만들어 왔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뛰어난 작가들을 거치면서 무협소설의 세계관이 오늘날에 이르도록 정립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작가들이 만들어낸 무공이나 문파들이 많기는 하지만 본 바탕은 그네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답습이 많다느니, 참신성이 없다느니 하는 공박을 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는 판타지 소설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금의 판타지 소설은 그 세계관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관계로 겉으로는 무협소설에 비해 참신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도검과 같은 무기도 나오고 권력을 향한 암투와 음모도 나오며 야릇한 이성간의 관계도 나옵니다. 무엇 하나 무협소설과 판이한 점은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등장인물과 대화에서 말투나 화제 정도에 차이가 있을까? 그들의 마법 또한 무공처럼 황당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나요? 경신술을 써서 하늘을 나는 것과 순간이동 마법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소설은 그 안의 설정에 대한 부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작가는 소설 안에서 작가의 말하고자 하는 부분, 보여주고자 하는 부분을 드라마에 녹여냅니다. 드라마 안에 사랑, 원한, 복수, 은혜, 눈물과 감동 그리고 웃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협소설이 진부하다는 말은 화살의 방향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에 대한 설정에 대한 성토보다는 작가가 그려낸 드라마에 대해 비판과 격려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무협소설의 발전을 위한 초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뻔한 얘기일 거라는 선입견!
예전에 제가 한참 무협 소설을 읽을 때는 이런 말도 있었습니다. ‘무협지는 맨 앞을 읽고 그리고 맨 뒤를 읽으면 중간은 보지 않아도 안다!’ 맞습니다. 거창한 별호를 지닌 많은 사람들을 등장시켜 놓고는 주인공의 한 방에 전멸! 어디를 갔든지 간에 모든 여자들은 주인공한테 끌려 치마끈 풀지 못해 안달이고, 어떤 원한을 지녔든지 간에 마지막에 가서는 무조건! 이유 없이! 주인공이 이기고 말지요. 무엇 때문에 나왔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인물을 보았을 때, 생각했던 대로의 뻔한 결말을 보았을 때 내가 왜 이런 책을 읽느라고 시간을 허비하는지 자책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당시 80년대에는 대여방이 우후죽순처럼 생기면서 구색을 갖추기 위한 책이 필요했기 때문에 찍는 대로 팔려나가던 때였습니다. 출판사는 무협지 맨 뒤편에 광고를 싣고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때였지요. 때문에 고등학생들까지 아이디어만 들고도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는 시대였습니다. 사실 대부분은 아이디어만 빼앗기고 용돈조차 받지 못한 일이 허다했지요.
당시의 무협세계는 사상 최고의 출판 실적을 자랑하면서도 공저라는 허울을 단 이름 빌려주기, 대필, 차명, 짜깁기 등 갖가지 편법을 동원하여 종수 늘리기에 바빠서 양적인 성장만 있었을 뿐 질적인 재고에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 대가가 오늘날의 불황으로 자리 매겨진 것입니다.
그러나 위기 뒤에 기회가 오듯, 이제 우리의 무협은 과거와는 사뭇 다릅니다. 요즈음의 작가들은 참신하기만 할 뿐 아니라 정성을 다하고, 진지한 구상으로 작품을 꾸미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 필력이 완성되지 못해 조악한 부분이 있을 수는 있겠지요. 완성도 높은 좋은 원고를 찾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뻔한 이야기가 아닌, 작가의 최선이 담긴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더 좋은 작품을 위한 발전은 결국 작가만이 아닌 독자와 출판사, 그리고 대여방과 서점 등 모든 부분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좋은 작품을 발견하고 읽는 일은 마치 처녀봉을 첫 등정하는 일과 같이 설렘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기분은 많이 나누면 나눌수록 좋지 않을까요? 저는 독자여러분께 뭇매보다는 당근을 주실 것을 권해드립니다.
당시 세계에 대한 자세한 고증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또 아예 시대상에 맞지도 않은 물건이나 관제(官制)가 나오고 역사 속 실재했던 인물이 엉뚱한 시대에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장력 한 방에 건물이 무너지고 수십 명이 몰살을 하는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현장이 그려지기도, 강호 사람이 판타지 세계로 날아갔다 돌아오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설정을 꼭 억지라고만 몰아붙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픽션을 최대한 배제한다는 다큐멘터리를 생각해봅시다. 남극과 같은 천년 빙하의 대 평지를 유명한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만약 두 팀이 찍는다고 할 때, 한 팀은 자연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또 다른 팀은 인간의 자연훼손으로 인한 빙하 파괴의 심각함을 찍었습니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빙하를 찍었다고 해도(같은 영상자료를 썼다고 해도) 전혀 다른 내용의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그 차이를 느끼는 것은 영상보다는 다큐의 내용이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설정에 대한 지적보다는 작가가 쓴 내용을 보아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PS 1 => 무협을 읽어줍시다. 사랑해줍시다. 그러면 더 좋은 작품, 더 좋은 작가가 많이 탄생할 것입니다. 이들은 결국 다시 독자에게 돌아갑니다.
PS 2 => 작가로서 쓴 글이 아니므로 태클은 사절!!!
(아픔이 가셨는지 조금 건방져지기 시작한 필자.)
PS 3 => 그래도 혹시 한 초식 날리고 싶은 사람은 .... 살살 해줘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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