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담

연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합시다.



작성자
Lv.1 궈징밍
작성
05.10.10 13:26
조회
692

* 미야모토 무사시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현재 일본 검도의 원류로 불리는 사나이를 번역, 소개합니다.

일본어 한자음, 못 찾아서 미치겠습니다. 아시는 분 좀 알려주세요.

검성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 노부츠나

고즈케 국(上野國: 군마[群馬] 현) 아카기(赤城) 산 남쪽 기슭(마에바시[前橋] 시)에 작은 성이 있었고 그 성의 성주는 대대로 大胡씨였다.  1508년, 당시 성주의 정실 부인은 한 남자 아이를 낳고 이름을 히데츠나(秀綱)라고 지었다. 이 아이가 바로 훗날의 검성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 노부츠나(上泉伊勢守信綱)이다(이세노카미[伊勢守]는 이세 국[伊勢國]의 수령을 말하며 지금의 미에 현 현장에 해당한다).

히데츠나는 어릴 때부터 부친에게 병법, 문학, 역사 등을 배웠고, 22세 되던 해에는 부친의 허락을 얻어 히타치국(常陸國) 가고시마(鹿島: 이바라기[茨城] 현 남부 가고시마 시)로 떠났다. 당시 가고시마에 머물던 검술 명인 愛洲移香齋를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기 위해서였다. 본래 이세 국 사람인 愛洲移香齋는 ‘원비지술’(猿飛之術)에 능숙하고 스스로 ‘가게류’(陰流)라고 칭했으며, 한때 각국을 주유하며 검술을 수련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무술의 수호신을 모신 가고시마의 明神社에 참배하려고 잠시 가고시마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愛洲移香齋는 찾아온 청년이 大胡 성주의 적자라는 이야기를 듣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비지술의 수행은 대단히 힘들다. 참아낼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어떤 고행이라도 참아내겠습니다.”

愛洲移香齋는 미소를 지으며 히데츠나를 데리고 뜰로 나갔다. 그가 나무 밑동에 비끄러맨 밧줄을 잡아당기자 갑자기 원숭이 한 마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먼저 원숭이가 나무에 오르는 것을 보고 배워라.”

히데츠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愛洲移香齋의 명성을 흠모해 말을 타고 먼 길을 달려온 자신에게 고작 원숭이를 보고 배우라니?

히데츠나의 속내를 눈치 챈 愛洲移香齋가 내처 목검과 대나무 막대기를 집어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 목검으로 내 정수리를 내리쳐라. 네 목검이 빠른지, 아니면 내 막대기가 빠른지 한 번 시험해 보자. 사양하지 말고 힘껏 내리치거라.”

히데츠나는 할 수 없이 목검을 들고 두 손으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러고서 검끝을 愛洲移香齋의 두 눈 사이에 겨누고 정면으로 자세를 취했다.

移香齋는 오른손에 대나무 막대기를 쥐고 그 끝을 비스듬히 아래로 향해 하단(下段) 자세를 취했다.

혈기왕성한 히데츠나는 비쩍 마른 노인을 앞에 두고, 무시를 당했다는 느낌에 분노하여 정식으로 목검을 내리쳤다.

히데츠나의 목검이 막 노인의 정수리로 떨어지는 순간, 노인이 쾌속하게 몸을 피하며 뛰어올라 막대기로 히데츠나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명실상부한 원숭이의 몸놀림이었다.

“내 손에 들린 게 목검이었으면 넌 벌써 비명에 갔을 것이다.”

히데츠나는 휘둥그래 눈을 뜬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나무 밑에서 원숭이가 캑캑대며 자신을 비웃고 있는 듯했다.

꼬박 석 달 동안, 히데츠나는 원숭이 뒤를 따라다니며 나무 오르기, 뛰어 오르기, 뒤집기 등의 ‘원숭이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또 두 계절이 흐른 뒤에야 히데츠나는 겨우 ‘가게류’ 검술의 초보적인 단계를 마쳤다. 移香齋가 못내 아쉬워하며 제자에게 말했다.

“내가 가르쳐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앞으로는 혼자 반복해서 연구하며 네 초식을 만들어내거라. 나는 늙어서 그만 고향에 돌아가 편하게 여생을 보내고 싶다.”

히데츠나는 스승을 大胡성에 초대해 며칠 동안 머물게 했다. 헤어지기 전, 늙은 스승이 또 간곡히 말했다.

“너는 앞으로 大胡성의 운명을 책임지는 성주가 될 운명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노파심에서 나온 것이라 해도 잘 귀담아 듣거라. 이른바 성주라 하면 검술만 출중하다고 태산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성주는 가장 중요한 책무로서 어떻게든 적의 공격을 격퇴하고 생명을 바쳐 성과 병사들을 지켜야 한다. 내가 네게 전수한 검술은 사실 전쟁터에서는 하등의 쓸모가 없느니라. 너는 반드시 병법과 전술을 익혀야 하며, 시나노(信濃) 국(나가노[長野] 현) 오가사와라(小笠原) 가에 가서 오가사와라류 병법을 익히는 게 가장 좋다. 어쨌든 일단 성을 잃으면 성주인 너는 모든 걸 잃는 것이다.”

“안심하십시오. 이 제자는 스승님의 지시대로 전력을 다해 오가사와라류 병법을 익히겠습니다.”

스승과 제자의 이 이별은 결국 영원한 이별이 돼 버렸다. 愛洲移香齋는 이세 국의 고향집에 은거하다가,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 규슈 히무카(日向) 국(미야자키[宮崎] 현)에 이르러 신관(神官)이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87세를 일기로 숨을 거뒀다.

히데츠나는 25세에 시나노 국 후카시(深志: 나가노 현 마쓰모토[松本] 시)로 건너가, 성주 오가사와라?(小笠原氏隆)를 만나 오가사와라류 병법을 전수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가사와라 가는 12세기 말 가마쿠라 막부 시대부터 대대손손 막부와 황실의 총애를 받은 병법 사범 집안이었다. 이 가문은 병법 외에 예법, 궁술, 승마술에서도 일가를 이뤘다.

氏隆은 히데츠나가 大胡 성주의 아들이라는 말을 듣고 융숭히 그를 대접했다. 하지만 가문 대대로 전해 내려온 병법을 허투루 타인에게 전수해줄 수는 없었다. 氏隆은 성에서 검술이 가장 뛰어난 무사 세 명을 부른 뒤, 히데츠나에게 가게류 검술을 보여달라고 청했다.

세 무사는 대나무 막대기를 든 히데츠나를 보고, 옛날 히데츠나가 移香齋의 대나무 막대기를 보고 그랬던 것처럼 그가 자신들을 깔보는 줄 알고 속으로 화가 났다. 하지만 히데츠나가 그 막대기로 대수롭지 않게 그들의 목검을 공중으로 퉁겨 버리자 사람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히데츠나는 오가사와라 가에서 꼬박 석 달을 머물며 오가사와라류 병법의 정수를 전수 받았다. 그가 이별을 고할 때, 氏隆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부디 자네가 배운 병법으로 大胡성을 굳게 지켜주게나. 틀림없이 가이 국(甲斐國: 야마나시[山梨] 현)의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부친)가 기회를 틈타 고즈케 국을 침공할 거라네. 우리가 있는 이곳도 대단히 위태로운 형편이지…….”

氏隆의 말이 옳았다. 전국시대에는 누구도 내일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점치기 힘들었다. 인생 전반기의 히데츠나는 한 성의 후계자 신분이었다. 그러나 후대인들이 그를 ‘검성’으로 추존하게 된 건 후반기의 그의 불우한 삶 때문이었다. 그런데 훗날 히데츠나가 ‘검술 명인’의 길에 들어서는 데 영향을 미친 다케다 신겐은 그해 갓 12세의 젖비린내 나는 애송이에 불과했다.

히데츠나가 45세이던 해, 사가미(相模) 국(가나가와[神奈川] 현) 오다와라(小田原)의 제 3대 성주 호조 우지야스(北條氏康)는 군대를 파견해 간토(關東) 지방의 간레이(管領: 무로마치 막부가 간토 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가마쿠라에 둔 재상직)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를 치고 성을 점령했다. 성을 버린 노리마사는 에치고(越後) 국(나가타[新潟] 현)으로 도망쳐, 간레이의 권한과 자신의 성(姓)을  ‘에치고의 용’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 본명은 나가오 도라치요[長尾虎千代]였음.)에게 넘겼다. 이때 가신의 한 사람이었던 히데츠나는 병력을 모집하고 말을 사들이는 등 전쟁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히데츠나가 48세이던 해, 드디어 호조 우지야스의 군대가 大胡성으로 쳐들어왔다. 大胡성은 지형이 험했고 히데츠나도 여러 가지 방비를 해두었지만 역시 작은 성은 작은 성이었다. 천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했지만 끝내 호조의 5천 대군에게는 중과부적이었다. 히데츠나는 별 수 없이 大胡성을 고스란히 내주었다.

전국시대, 이런 상황에서는 성주가 배를 갈라 자결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호조는 히데츠나를 살려주었다. 나중에 그를 설복시켜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그후 간토 지방은 호조 우지야스,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 이 세 패주(覇主)가 패권을 두고 다투는 각축장이 돼 버렸다. 이때 히데츠나의 신분은 미노와(箕輪) 성 성주의 무장 중 한 사람이었다. 미노와 성 성주는 줄곧 간토 간레이 휘하의 가장 강력한 충신이었다. 그런데 간레이는 이미 권한을 우에스기 겐신에게 이양한 상태였으므로 곁에 16명의 비범한 무장들이 없었다면 그때까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16명의 무장들 속에 히데츠나도 끼어 있었다.

몇 년간의 고군분투 끝에 미노와 성 성주도 마침내 쓰러지고 말았다. 그의 후계자는 당시 겨우 18세에 불과했다. 그 이듬해, 다케다 신겐은 2만 대군을 일으켜 미노와 성을 공략했다. 젊은 성주는 천 5백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죽을 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결국 중상을 입었다. 그는 “봄바람 간간이 불어오니, 매화꽃과 벚꽃 하염없이 떨어져, 사방으로 풀풀 날리네, 오직 성의 이름 청사에 남으리니, 아아 미노와 성이여!”라는 이별시를 남기고 서슴없이 배를 갈라 이승을 하직했다.

당시 성 후문을 지키던 히데츠나는 성주가 자결했다는 비보를 접하고 비통한 마음에 남은 부하들을 이끌고 성주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했다. 드디어 돌격의 진용을 갖추고 막 군기(軍旗)를 휘날리려 할 때, 부하가 달려와 그에게 보고했다.

“다케다군의 사자가 왔습니다!”

이 순간이 바로 히데츠나의 후반생의 운명을 바꿔 놓은 전환점이었다.

다케다 신겐이 보낸 사자는 다케다 신겐의 사위이자 ‘다케다 24 무장’ 중 한 사람인 아나야마 바이세츠(穴山梅雪)였다. 다케다 신겐은 히데츠나의 목숨을 살리려는 일념으로 그토록 중요한 인물을 사자로 보낸 것이다.

아나야마 바이세츠가 낭랑한 목소리로 신겐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이며 이 신겐은 적은 수로 많은 적에 맞서는 귀하의 충정에 감복하는 바요. 단지 귀하는 이미 무사의 도를 다하였으니 더 이상 생명을 헛되이 버리지 마시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부디 무장을 해제하고 앞으로 귀하의 재주를 펼쳐 천하를 이롭게 해주기를 부탁드리오.”

신겐의 전언은 은근하고 예의가 있었으며 한마디 한마디가 다 조리가 있었다. 그래서 히데츠나는 그의 말을 좇아 가이 국으로 갔다.

히데츠나는 가이 국에서 후한 대접을 받았다. 신겐은 그에게 자신의 이름 속 글자 ‘신’(信)을 하사하고 ‘이세노카미’(伊勢守)에 봉했다. 검성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 노부츠나(上泉伊勢守信綱)는 이렇게 탄생했다.

사실 신겐이 매료된 건 그의 검술이 아니라, 무장으로서의 오랜 경력과 병법의 조예였을 것이다. 그해 노부츠나는 55세, 신겐은 42세였다. 천하 제패의 큰 뜻을 이루기 위해 신겐은 당연히 노부츠나가 자신의 수족이 되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노부츠나는 좀처럼 응낙을 하지 않고 객장(客將) 신분을 고집하며 임시로 다케다 가의 무술 사범을 맡았다.

노부츠나는 신겐 곁에서 2년을 지냈고,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신겐을 찾아가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저는 이제 어떤 제후, 다이묘를 위해서도 일하고 싶은 뜻이 없습니다. 남은 생은 오직 검술에 몰두하고 싶습니다. 그러니 제가 멀리 수련 여행을 떠나는 것을 용납해 주십시오.”

지난 2년 동안 어느 정도 노부츠나의 심중을 파악한 신겐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헤어지기 전, 신겐은 호탕하고 거리낌 없는 그답지 않게 마치 아내를 내치는 남편처럼 노부츠나에게 서약서를 쓰게 했다. 즉, 다케다 가를 제외한 어떤 다이묘의 신하도 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노부츠나는 당연히 흔쾌하게 그의 뜻을 따랐다.

얼마 후, 57세가 된 노부츠나는 두 제자를 데리고 다케다 가를 떠나 교토로 향했다. 그 시대, 특출한 재주를 가진 이들은 모두 어떻게든 교토로 가서 두각을 나타내고자 했다.

1714년에 씌어진 『본조 무예소전』(本朝武藝小傳)이라는 고서에서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두 제자를 데리고 오와리(尾張) 국(아이치 현)의 어느 농촌 마을을 지나가던 노부츠나는 마을 사람들이 한 농가 앞에 모여 웅성대는 광경을 목격했다. 제자를 시켜 무슨 일인지 알아보니, 감옥을 탈출한 죄수가 길가에서 놀던 아이를 인질로 잡아 그 집을 점거하고 있다고 했다.

“낭인(浪人) 무사 출신인 그 놈은 칼을 갖고 있답니다. 누가 집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아이를 베어 죽이겠다고 을러댄다는군요. 아이 엄마는 옆에서 대성통곡을 하고 있고 마을 사람들도 밤을 새가며 이틀째 집을 포위하고 있지만 별로 뾰족한 수가 없답니다.”

제자가 말을 마치자마자 노부츠나는 집 앞에 가서 불안에 떨고 있는 한 승려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제 머리를 밀고 스님의 법의(法衣)를 잠시 빌려주십시오. 제가 방법을 강구해 아이를 구해보겠습니다.”

승려는 당장 노부츠나의 머리를 밀고 승복을 벗어주었다. 승려로 변장한 노부츠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주먹밥 두 개를 만들어 오게 했다. 그러고서 주먹밥을 든 채 집문을 열어보니, 과연 죄수가 아이의 가슴에 칼을 겨누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중놈이 왜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게냐? 들어와서 뭘 하려고? 한발자국만 더 들어오면 이 아이놈은 즉시 황천행이다!”

노부츠나가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말씀 마시고 좀 진정하십시오. 이보세요, 아이가 배가 고파 울고 있지 않습니까? 아이가 가엾지도 않은가요? 소승이 주먹밥을 가져왔으니 아이도 먹이고 당신도 허기를 달래십시오. 소승은 승려라서 소승의 눈에는 악인도 다 똑같은 불제자랍니다. 자, 이 주먹밥 두 개 중에 하나는 당신 것이니 받으십시오.”

말을 마치고서 노부츠나는 휙 주먹밥을 던졌다. 이 급작스러운 동작에 죄수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 없이 본능적으로 손을 내밀어 주먹밥을 받았다. 노부츠나는 다시 남은 한 개도 던졌고, 죄수는 자신도 모르게 긴 칼을 놓고 오른손으로 받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죄수의 오른손은 주먹밥을 받는 대신, 노부츠나에게 틀어잡혀 등 뒤로 꺾여 버렸다. 죄수는 매의 발톱에 잡힌 병아리처럼 옴짝달싹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에피소드는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가 자신이 감독한 『7인의 사무라이』라는 영화 속에 삽입한 바 있다. 어쨌든 거의 예순 살이 다 된 노부츠나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무사였지만 한 아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고강한 무공을 자제하고 경솔한 행동을 삼갔다. 그는 먼저 승려로 변장해 죄수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고, 또 아이의 위험을 고려해 주먹밥으로 죄수의 무기를 무력화시켰다.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춘 뒤에야 민첩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과연 ‘갑주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이 굳이 서약서를 받고서 그를 풀어줄 만했다.

노부츠나의 일생에서 두 번째 전환점은 바로 야규 무네요시와의 결투였다.

야규 일족의 마을은 나라 동쪽 20킬로미터 지점의 깊은 산 속에 위치해 있었다. 영주는 야규 무네요시의 부친이었다. 이때 무네요시는 마침 어느 전쟁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그곳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무네요시는 츄조류(中條流) 검술과 신도류 검술의 고수로서 ‘긴키제일검’(近畿第一劍: ‘긴키’[近畿]는 혼슈[本州] 중서부 지역을 가리킴.)이라는 호칭까지 있었다.

어느 날, 무네요시는 나라 호조원의 인에이 사부가 부친 편지를 받는다. 살펴보니 자신을 초청하는 내용이었다.

“고즈케 국에서 유명한 병법가 몇 분이 오셨습니다. 교토로 가는 도중에 저희 누추한 곳에 머물고 계십니다. 한번 내왕하시어 서로 기량을 겨루실 수도 있으니 참고하십시오.”

호조원의 인에이 사부는 무예를 매우 좋아해서, 무술 수련을 위해 교토로 가는 여러 나라 무사들을 항상 융숭하게 대접했다. 당시 호조원 안에는 이미 수십 명의 뛰어난 검객들이 기숙하고 있었지만, 인에이 사부가 굳이 사람을 보내 편지를 전하게 한 걸 보면 정말 대단한 고수가 나타난 게 분명했다. 무네요시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곧장 말에 올라 호조원으로 달려갔다.

무네요시는 그때까지 ‘신가게류’(新陰流)라는 호칭도, 카미이즈미 노부츠나라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부츠나는 당시 간토 지역에서만 유명했을 뿐, 간사이 지역에서는 아직 무명의 ‘시골 검객’에 불과했다. 이런 이유로 당시 특수한 장기가 있는 ‘예인’(藝人)들, 즉 음유시인, 다도 전문가, 검객, 배우 등은 하나 같이 전국을 주유한 뒤, 교토에 모여들어 솜씨를 다퉜다. 이런 사람들을 통틀어 ‘게이샤’(藝者)라고 불렀다.

무네요시는 노부츠나와 인사만 나누고서 다짜고짜 결투를 청했다.

“그렇게 하시지요. 먼저 저의 제자, 분고로(文五郞)와 겨뤄 보십시오.”

노부츠나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이 말을 듣고 무네요시는 단박에 안색이 변했다. 긴키제일검의 자존심이 무참히 구겨진 것이다.

‘이 촌놈들이 감히……그래, 오늘 내가 너희의 안목을 넓혀주지. 진정한 검술이 뭔지 보여주마!’

인에이 사부의 도장은 각계의 검객들과 호조원의 승려들로 만원이었다. 그들은 숨을 죽이고 결투의 경과를 지켜보고 있었다.

분고로는 수척한 몸집에 초라한 옷을 입은 사내였다. 무네요시는 다시 노부츠나에게 눈길을 돌려 아래위로 훑어 보았다. 역시 어떤 점이 대단한지 통 알 수가 없었다.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시골 노인일 뿐이었다. 무네요시는 당시 긴키 지역에서 명성을 떨치던 신도류의 시조, 쓰가하라 보쿠덴을 떠올렸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닐 때, 항상 옆에 말 세 필과 제자 80명을 대동했다. 더욱이 수입이 3천 석에 달했다. 사실 그 정도는 돼야 진정한 병법의 대가가 아니겠는가!

무네요시는 목검을 들고 자세를 상단으로 취했다. 그는 단 1초만으로 상대를 무릎 꿇릴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분고로는 늠름히 본래 자리에 서서, 손에 든 죽도를 아무렇게나 한쪽에 늘어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어떤 자세도 아니었다!

‘안 되겠군.’

무네요시는 분고로가 결코 깔봐서는 안 될 상대임을 알아챘다. 온 정신을 집중해 분고로의 허점을 찾았다. 그런데 상대가 아무 일도 없는 듯 눈앞에 서 있는데도 마치 사방에 산들이 둘러쳐져 있는 듯 틈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사정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무네요시는 등골이 오싹하고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다.

계속 담담하게 무네요시를 바라보고 있던 분고로가 불현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오.”

그의 목소리가 채 끊기기도 전에 무네요시는 머리에 일격을 당했다. 노부츠나와 그의 제자들은 언제나 자루 죽도를 사용했다. 대나무를 몇 줄기로 잘라 가죽 자루 속에 담은 그 죽도는 결투시 상대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다. 이것은 노부츠나가 발명한 연습 도(刀)로서 그의 여섯 번째 계승자가 다시 개량해 현재의 것과 유사한 죽도를 만들고, 아울러 방호구까지 발명했다. 이것들은 4백 년간 지속적으로 사용되며 개량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아무리 해가 없는 자루 죽도라 해도 고수의 일격을 맞은 무네요시는 순간적으로 숨이 막히면서 눈앞이 어지럽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무네요시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다시, 다시 한 수 부탁 드리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무네요시는 먼저 뛰어올라 목도를 휘둘렀다. 다소 비겁한 수법이기는 하지만 만인이 보는 앞에서 긴키제일검이 어찌 이대로 물러설 수 있겠는가?

“미안하오.”

또 웃음 섞인 외마디 소리가 들리고, 무네요시의 머리에 다시 일격이 적중되었다.

‘이게……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무네요시는 상대가 언제 죽도를 들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이게 무슨 괴이한 초식이란 말인가?

상식대로라면 무네요시는 이미 노부츠나의 제자에게 패했으므로 노부츠나 본인에게는 더 이상 결투를 청할 면목이 없었다. 그러나 한 수 더 배우고픈 의욕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무네요시는 염치 불구하고 노부츠나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노부츠나도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무네요시는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노부츠나와 대치했다. 그러나 분고로의 사방에 산들이 둘러쳐진 듯했다면, 노부츠나의 사방에는 수많은 강과 시내가 휘돌아 흐르고 있었다. 무네요시는 결국 능력이 미치지 못함을 깨닫고 탄식하며 목검을 버렸다. 그리고 땅에 무릎을 꿇어 노부츠나를 스승으로 모셨다(위의 이야기는 1696년 씌어진 『무공잡기』[武功雜記]에서 참고).

이때 노부츠나는 57세, 무네요시는 36세였다.

무네요시는 노부츠나 일행이 야규 마을에 머물며 임시로 일족의 검술 사범이 돼주길 열렬히 바랐다.

노부츠나는 야규 마을에 얼마나 머물렀을까? 이 점에 관해 갖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각종 고서에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단지 노부츠나가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접한 뒤, 제자 분고로만 야규 마을에 남겨 계속 신가게류 검술을 가르치게 하고 자신은 다른 제자 한 명과 야규 가의 가신 한 명을 데리고 그곳을 떠났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떠나기 전, 노부츠나는 “맨손으로 칼을 빼앗는 기술”을 숙제로 남기고 무네요시에게 새로운 검술을 연구, 개발하라고 명했다. 이것이 바로 ‘야규 신가게류’의 기원이다.

노부츠나가 교토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맞이한 사건은 키요미즈데라(淸水寺)에서 행한, ‘규슈제일검’ 마루메 구란도노스케(丸目藏人佐)와의 결투다. 마루메 구란도노스케는 비고(肥後) 국(구마모토 현) 다이묘 사가라(相良) 가의 계보로서 당시 25세의 나이로 황궁을 경호하는 ‘북면무사’(北面武士)였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키요미즈데라에 ‘천하제일 검객’이라는 푯말을 세우고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고수들과 대결을 했다고 한다. 노부츠나가 그를 무릎 꿇리기 전까지 확실히 아무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신가게류’의 명성을 만천하에 떨치게 한 진정한 공로자는 사실 야마시나 ?(山科言繼)였다. 조정의 유력자로서 외교관을 겸임한 그는 조정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일년 내내 돈을 융통하러 각 지방의 다이묘들을 찾아 다녔다. 노부츠나의 선친도 山科言繼의 간청을 받아들여 조정의 급한 일에 돈을 쾌척한 바 있었다. 아마도 이런 인연 때문이었는지 山科言繼는 노고를 마다 않고 막후에서 최선을 다해 노부츠나를 도왔다.

山科言繼는 먼저 아시카가 13대 쇼군 요시테루(義輝)에게 노부츠나를 추천했다. 그래서 노부츠나는 마루메 구란도노스케와 함께 쇼군을 알현하고 검술을 시연했다. 이 시기 쇼군의 존재는 이미 유명무실해진 상태이긴 했지만, 그래도 일개 검객이 장장 240년을 이어온 무로마치 막부의 장군 앞에서 검술을 선보인다는 건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가엾게도 이 13대 쇼군은 이듬해 5월 어느 날 밤, 반역자 마츠나가 히사히데(松永九秀) 등의 습격을 받아 자살로 30세의 짧은 삶을 마감한다. 이때 노부츠나는 공교롭게도 한 달전 제자 무네요시를 만나러 야규 마을에 가 있었기 때문에 그 정변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있었다.

노부츠나는 어지러운 외부 세계와 무관한 야규 마을에서 무네요시가 “맨손으로 칼을 빼앗는 기술”을 완성한 것을 보았다. 기쁜 나머지 그는 당장 무네요시에게 ‘신가게류’ 검법의 증명서를 내줬다. 이 증명서는 이후 야규 가 후예들의 가보가 되었다. 호조원의 인에이 사부와 마루메 구란도노스케가 받은 증명서도 거의 완벽한 형태로 현재까지 남아있다.

1570년 노부츠나가 62세가 되었을 때, 전국시대의 혼란도 거의 말기에 접어들었다. 이 해, 오다 노부나가와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연합해 ‘아네가와(姊川) 전투’에서 아사이 나가마사(淺井長政)와 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의 연합군을 격파함으로써 천하통일의 계획이 마침내 제 궤도에 올랐다. 그러나 노부츠나는 이제 나이 든 검객일 뿐이었다. 山科言繼가 쓴 『言繼일기』의 그해 부분을 보면 노부츠나 언행이 빈번히 출현한다. 노부츠나는 조정의 문관들과 바둑을 두거나 공개 강연에서 오가사와라류 병법을 해설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또한 세상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검술 전수에 전력을 기울였다. 당시 교토 각지에서 그를 스승으로 삼은 이들이 수백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해 6월, 천황이 노부츠나의 입궁을 허가하고 ‘종사위’(從四位)의 관직을 제수한다. ‘종삼위’(從三位) 이상이 섭정, 관백(關白), 대정대신(大政大臣), 좌대신(左大臣), 우대신(右大臣) 같은 ‘공’(公)이거나 대납언(大納言), 중납언(中納言) 등의 ‘경’(卿)이므로 ‘종사위’라면 대단히 높은 관직이다. 일본 역사에서 이처럼 천황의 은혜를 입어 고관이 된 검객은 오직 노부츠나 단 한 사람뿐이다.

이듬해 7월, 노부츠나는 다시 교토를 떠나 8월에 고향 上州 카미이즈미 촌(上泉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10월에는 숙적인 오다와라 성주 호조 우지야스가 병사한다. 또 2년 뒤에는 다케다 신겐마저 도쿄로 가던 중 병사한다. 이런 소식을 듣고 과연 노부츠나는 속으로 어떤 느낌이 들었을까?

야사의 기록에 의하면 노부츠나는 1577년 1월 22일, 카미이즈미 촌에 西林사를 창건하고 죽은 아들의 3주기 법회를 치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향년 69세였다. 교토를 떠나 죽을 때까지 수 년간 그가 고향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아내와 다른 친척에 관한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노부츠나의 제자들 중에는 걸출한 인물이 적지 않다. 신가게류 제 2대 계승자인 오쿠야마?(奧山休賀齋)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검술 사범을 지냈으며, 야규 무네요시의 아들 야규 무네노리는 토쿠가와 막부의 제 2대 쇼군, 제 3대 쇼군의 검술 사범이었다. 그리고 마루메 구란도노스케는 규슈로 돌아가 스스로 ‘타이사류(大捨流)’를 창립해 메이지유신 시대까지 검법을 전했다. 오늘날 일본에는 수많은 검술 유파가 있지만 기원을 따져보면 모두 노부츠나의 신가게류로 소급된다. 이것이 후대인들이 그를 ‘검성’으로 추존하는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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