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엔딩과 새드 엔딩에 대한 얘기가 오가고 있군요.
연재한담
연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합시다.
요 밑에 나카브 님께서 쓰신 글이 있는데, 저랑 취향이 비슷하신 것 같아요.
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도 비극이 더 취향에 맞습니다.
여러가지 영웅담이 있습니다만, 비극적인 영웅담이 더 보편적으로 오래, 널리 사랑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지금 당장 기억나는 것만 해도 중세의 영웅담이라 할 만한 기사도 문학의 대표작 세 개 모두 비극으로 끝나지요. 아서 왕은 사생아인 모드레드에게 배반 당해 생애 마지막 전투에서 목숨과 왕국, 모두 잃습니다. 발뭉 사가로 이름 높은 지크프리드 역시 얀데레 X-걸프렌드(......)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지요. 샤를마뉴의 열 두 팔라딘 중 수좌인 롤랑 역시 롤랑의 노래에서 그의 동료 대부분과 함께 자신의 숙부가 꾸민 계략에 의해 전사합니다.
그리스의 대영웅 헤라클라스, 위대한 왕 오이디푸스, 아르곤 원정대의 이아손은 물론이고 테세우스, 아킬레우스 등 그리스의 영웅들 치고 행복한 최후를 맞이한 인물은 몇 없지요.
켈트 신화의 이름난 영웅들도 대부분 비극으로 그 찬란했던 영웅담의 막을 내리고, 북구 신화는 신화의 엔딩이 망(......)
이런 얘기가 있죠. 민중<괴물<영웅<민중(or 운명)의 먹이 사슬이 존재한다고. 민중은 보통 사람 또는 비영웅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영웅담이란 결국 보통의 인간이 항거할 수 없는 위대한 업적에 도전하여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카타르시스를 보여주지만, 영웅이든 반신이든 끝내 인간의 범주에 들어있다면 결단코 뛰어넘을 수 없는 운명 앞에 패배함으로써 인간을 운명 앞에 겸손하게 만드는 산 제물이 되는 이야기인 셈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을 몸소 보여주면서도, 종국엔 운명과 세계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작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인간 찬가와 더불어 겸허함을 노래하는 존재, 그것이 영웅이라고 생각해요.
무협의 경우는 신화나 영웅담과는 그 발생의 궤를 달리하므로 다른 해석이 있겠습니다만(현대의 무협 소설은 중산층의 욕망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는 비극적 구조를 갖는 것이 더 다양한 재미를 준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비극이 꼭 주인공의 새드 엔딩으로 귀결될 이유는 없죠. 주변 인물들의 비극으로 나타나도 되고, 좀 더 거시적인 형태로 나타나도 됩니다.
예를 들면 로도스도 전기, 다들 기억하시려나 모르겠습니다.
일본식 판타지 소설의 기초를 닦은 명작이죠. 시작은 TRPG의 플레이 로그였습니다만.
로도스도 전기를 혹시 읽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스포일러가 포함되므로 굉장히 죄송한 일입니다만, 말을 꺼냈으니 인용하겠습니다.
결론은 악의 소굴 비스무리한(평면적인 악은 아니죠) 마모의 세력이 로도스 섬 밖으로 쫓겨나고, 로도스의 평화로운 통일을 방해하던 회색의 마녀도 물리치고, 판과 디드리트는 러브러브하고, 해피 엔딩으로 결론지어 집니다.
그러나 주인공 일행에 대항하는 세력인 마모는 따지고 보면 전형적인 악은 아니었지요. 베르도가 마모에서 통일 전쟁을 시작하려 세력을 일으킨 이유도, ‘평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종의 편견 속에 차별 받고 있는 마모의 주민들을 주축으로 로도스를 통일한다면 ‘진짜’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베르도는 ‘비마모’인들에 의해 로도스가 통일된다면 그것은 마모인들이 배제되는 형태, 즉 쫓겨나거나 멸망하는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라 걱정합니다. 베르도의 시선에서 그것은 ‘진정한 통일’이 아니었던 셈이죠.
결과는 베르도의 걱정대로 결판났습니다. 마모인들은 아슈람을 따라 마모와 로도스를 떠나게 됩니다. 이것은 비록 주인공 일행의 비극은 아니지만, 로도스도 전기의 세계에서 봤을 땐 나름의 비극이 됩니다.
또한, 그렇게 로도스에 영구한 평화가 찾아왔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로도스도 전기 엔딩으로부터 백여 년인가 흐른 뒤에 로도스 섬은 다시 전화에 휩싸입니다.
로도스의 통일과 항구적인 평화를 위해 싸웠던 주인공 일행은 반쪽의 성공만 거둔 셈입니다.
이렇듯 주인공 혹은 그 일행이 비참하게 구르지 않아도, 주인공의 업적이 세계 혹은 운명이라고 하는 거시적 관점에서 봤을 때 미완 혹은 큰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것에 불과했다면 그 또한 비극이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비극적인 영웅은 제갈 공명이 떠오르네요, 저에겐.
당시의 의료체계나 평균 수명을 봤을 때, 제갈 승상이 단명하거나 요절한 건 아닙니다. 살만큼 살다 가셨죠. 주유나 노숙, 여몽이 줄줄이 단명한 동오에 비하면(......손권은 그저 웁니다.) 촉한을 위해 할 만한 일은 어지간히 했죠.
그러나 결국 그 눈부신 재능과 재능보다 더 높은 인품과 충의로도 끝내 고착화된 삼국정립의 틀을 부수지 못하고 아쉬움 속에 죽고, 사후 오래지 않아 촉한이 어처구니 없이 망함으로서 그 비극성이 배가 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비극은 단순히 주인공이 구르고 죽는 단편적인 새드 엔딩보다, 나카브 님이 글에서 언급하셨듯 도저히 개인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부조리에 의해 이야기가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면 그 재미와 카타르시스는 극대화 됩니다. 전 그런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쓰다 보니 필 받아서 횡설수설 말이 길어졌네요. 이만 총총.
덧. 제목 수정 했습니다, <비극에 대해서>에서 지금의 제목으로. 제가 의도하지 않은 쪽으로 의견이 개진되는 것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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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띠
- 14.10.06 23:41
- No.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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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 Lv.7 중이염환자
- 14.10.06 23:59
- No. 2
일단 제 글은 소설과 영웅서사의 구조에 대해 논하는 글이 아닌, 비극적 결말도 재밌으며, 비극적 결말이 꼭 주인공의 비참한 최후만을 의미하진 않는다는, 비극적 결말에 대한 제 개인적인 취향을 어필한 글이므로 바람직한 논쟁이 되진 않겠지만, 일단 엔띠 님의 의견에 동의하긴 힘들군요.
소설과 영웅서사 모두 스토리 텔링이며, 신화는 소설의 원형입니다. 어떤 소설과 어떤 신화가 다른 결말을 지닌다면 그것은 두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에 다른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지 소설과 신화이기 때문에 다른 결말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 제 생각입니다. -
- Lv.94 Girlswin..
- 14.10.06 23:46
- No.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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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 Lv.7 중이염환자
- 14.10.07 00:05
- No. 4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