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로 달려고 했는데, 어느 새 너무 길어져서 글로 옮겨 버렸군요 ㅎㅎ...
저는, 말하자면 1인칭 주인공, 관찰자 시점과 3인칭 관찰자 전지자 시점을 모두 섞어 씁니다. 굳이 구분을 하자면 전지적 작가 시점 아래 모든 시점이 하위 호환으로 기능하는 형식이고요.
네, 뭔 dog소린가 하셨죠? 흥미가 이는 분은 아래 글을 읽어주세요.
자유 간접 문체는 이중 목소리(dual-voice)의 담론이라는 말로 그 특징을 가장 분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타난 자유 간접 문체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윤영옥은 적절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어느 틈엔가, 구보는 조선은행 앞에까지 와 있었다.
① 이제 이대로.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그러면, 어데로-. 구보가 또다시 고독과 피로를 느끼었을 때,
② 약칠해 신으시죠 구두에.
구보는 혐오의 눈을 가져 그 사나이를, 남의 구두만 항상 살피며, 그 곳에 무엇이든 결점을 잡아내고야 마는 그 사나이를 흘겨보고, 그리고 걸음을 옮겼다.
일면식도 없는 나의 구두를 비평한 권리가 그에게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거리에서 그에게 왼갖 종류의 불유쾌한 느낌을 주는, 왼갖 종류의 사물을 저주하고 싶다. 생각하며, 그러나 문득 구보는
③ 이러한 때, 이렇게 제 몸을 혼자 두어두는 것에 위험을 느낀다. 누구든 좋았다. 벗과, 벗과 같이 있을 때, 구보는 얼마쯤 명랑할 수 있었다. 혹은, 명랑을 가장할 수 있었다.
윤영옥은 인용한 박태원의 텍스트 중 ① ② ③은 그 목소리의 임자가 불분명하며 필경 작가는 의도한 특수한 효과를 기대하고 고의적으로 그 같은 담론을 구사하고 있으리라고 짐작한다. ① ② ③에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판별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작중 인물의 목소리이면서 동시에 화자의 목소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유 간접 문체는 이처럼 작중 인물의 목소리와 화자의 목소리가 결합되었거나 뒤섞인 문체를 가리킨다.
G. 프랭스는 ‘~그는(그녀는) 말했다’ 혹은 ‘생각했다’와 같은 종결절을 수반하지 않고 재현된 작중 인물의 발화나 사고라고 이 문체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자유 간접 담론에서는 흔히 두 개의 사건(화자의 사건과 작중 인물의 사건)과 두 개의 문체, 그리고 두 개의 목소리와 두 개의 의미론적 가치 체계가 혼합된다고 말한다. 모더니즘 소설이 이 같은 문체를 즐겨 사용한 것은 이 문체가 개인적 심리나 의식의 심연을 드러내는 데 매우 편리하고 효과적이기 때문이며 특히 서사적 담론이 작중 인물의 명멸하고 생동하는 개인 의식을 그 의식 주체의 습벽 그대로 재현하는 일을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 문체는 여러 가지 명칭으로 지칭된다는 사실을 부기한다. 흔히는 자유 간접 담론이 동의어로 사용되며 서술된 독백(narrated monologue), 결합된 담론(combined discourse) 등도 같은 문체 현상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유 직접 · 간접 문체 [Free direct · indirect style] (소설학 사전, 1999.2.25, 문예출판사)
출처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40335&cid=272&categoryId=272
아직 저만의 문체를 찾아가는 중인 초짜 of 초짜라 자유 간접 화법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으나, 저는 기존의 1주,1관,3관,3전 시점 분류가 약간은 낡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틀만 지키고 이미 시점을 구분하지 않고 쓰는 작가들이 허다하고요.
길을 길게 늘여 쓰면 아무도 안 읽으니 짧게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마치겟습니다.
운명에 실망했다. -> 1인칭 주인공
그가 운명에 실망한 것일까 -> 1인칭 관찰자
그의 눈빛은 운명에 실망하는 듯 했다. -> 1,3인칭 관찰자
운명이 실망스럽다고 그가 생각했다. -> 전지적 작가
“운명이 실망스럽군” 그가 말했다. -> 담화
기본적으로는 전지적 작가의 태도를 유지합니다. 가끔 정보를 직선적으로 전달하고 싶지 않거나, 스토리 설정상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수 없을 경우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사용합니다. 위 예시의 ‘그’ 가 운명에 실망했는지, 아니면 아직 희망을 가졌는지가, 후의 전개에 큰 영향을 끼치고, 미리 그것을 이야기 해주기 싫은 경우와 같이 말입니다.
주요 인물들을 묘사할 때는 생략된 3인칭이나, 생략된 1인칭을 사용해 둡니다
.
친한 친구들이나, 대척점에 선 적을 묘사할 때, 만약 특정한 문장이 그 주연을 묘사한다는 사실이 자연스러우면, ‘그’ ‘그녀’ ‘그들’ 과 같은 인칭 명사를 지웁니다.
데미수님이 칼을 높이 들어 그대로 땅 속 깊숙이 내려쳤다. 운명이 실망스럽다고 생각했다.
만약 독자와의 감정적 거리감을 더 좁히고 싶다면 거기에 문장을 1인칭으로 바꿉니다. 다만 “나”“너” 같은 인칭은 되도록 생략해 줍니다.
데미수님이 칼을 높이 들어 그대로 땅 속 깊숙이 내려쳤다. 운명이 실망스러워, 미칠 것만 같아.
위 글을 보면 운명이 실망스러운 이가 누군지는 3살이 봐도 알죠.
그런데 막상 저렇게 생략을 해 놓으면 보기에는 깔끔해 보일지는 몰라도 저런 문체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나, 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약간의 혼동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1인칭과 3인칭을 구분하며 보는 분들은 너그러이 넘어가지 않을 수도 있죠. 그러므로 조연이나, 이름 없는 ‘지나가는 사람1’ ‘시녀1’ 같은 캐릭터에게는 남발하지 않도록 합니다. 이를 테면 문장을 다듬기 위한 필살기 정도로 생각해 둘까요 하하.
많은 분들이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사용하고 계시는 기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위 링크를 찾기 전에부터 가끔 감정을 상세하게, 중요하게 묘사하고 싶을 때, ‘그,그녀’ 같은 인칭 대명사의 지나친 반복이 거슬려서 거의 다 빼버렸습니다. 그리고 마치 인물이 말하는 듯 한 문장을 넣어 감정선을 조금이나마 돋보이게 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면 저렇게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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