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상 평어체를 사용합니다.
내 짧지않은 인생을 관통하며 고통과 회한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기쁨과 즐거움을 남겨준, 그래서 이제는 버젓이 내 인생의 대차대조표에 녹녹치않은 항목으로 자리잡고있는 무협소설이라는 괴물이 내게 처음 접근했을 때 그 이름은 군협지였다.
국민학교 6학년 때의 어느 여름, 친구들과 야구시합을 마치고 땀냄새 풍기며 몰려간 친구의 집 서가에서 그많은 양서(?)들을 제쳐두고 내가 불쑥 뽑아든 책이 어째서 그놈이었는지는 지금도 쉽게 설명할 수 없다.
저자가 김광주 선생으로 되어있었으니 필경 저작권이란 단어가 외계어쯤으로 인식되던 그 당시의 출판계 실정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해적출판물임은 불문가지였지만 그런거 따위는 나도 몰랐고 내 친구도 몰랐으며 필경 그 책들을 사들였을 내 친구의 부친 또한 관심조차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전 6권이었던가 하는 군협지라는 괴물은 각권이 상당히 두꺼웠고 세계문학전집의 표지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는 금박줄따위가 제법 어지럽게 입혀진 고급양장본의 표지를 가지고 있었으니 외양으로만 보자면 참으로 그럴싸한 양서였다.
아마도, 한두놈씩 수돗가로 나가 냄새나는 발을 씻고 들어오는 동안 생뚱맞게도 나는 그 괴물의 내장과 혈관따위들을 살피고 있었으니 군협지라는 괴물이 내 인생에 길고도 지루한 무협소설과의 동거를 강요했다해도 그 원죄는 온통 나 혼자만의 것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첫조우가 나를 사로잡았던듯 싶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옆구리엔 자랑스럽게 그 괴물의 제 1권에 끼워져 있었으니까..
서원평인가..? 소림사를 월장하여 달마역근경을 훔치러 들어가던 첫장면이 그때 왜 재미있었을까..? 빌어먹을 필경 아무런 이유없이 핍박받고있는 듯이 보이는 음.. 스님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로부터 서원평이 달마역근경의 구결을 전수받고 뜻도 모르며 구결들을 외우고 나아가서는 그의 조종에 따라 꼭두각시인형처럼 소림의 승려들과 싸움을 벌이는 장면이 왜 그리 나를 빨려들듯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들었던가...?
스토리의 세세한 내용들이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으니 내 두뇌에 걸린 관절염을 원망할 밖에 달리 방도가 없지만 그러나 소림사를 어찌어찌 탈출한 서원평이 두 자매를 만나고 두 자매와 가슴 떨리는 감정의 유희를 겪어내는 그 이야기들이 내게 남겨준 서정의 기억들은 여전히 생생하니 난 군협지에 정말로 온통 사로잡히고 말았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후, 만화가게에 꽂혀있는 수많은 무협지들이 군협지와 같은 종류의 책들이라는 것을 알게되기까지의 짧지않은 시간동안은 그저 어디가서 또 군협지와 같은 책들을 찾을 수 있을까 안달했던 시간들로 기억된다.
그리고 어느 소년잡지에 연재되던 비룡을 만났다. 나중인지 그보다 앞선것인지 역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비룡은 라디오에서 연속극으로도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룡은 내게 군협지가 남긴 감동을 조금도 되살리지 못했다.
아마 끝까지 다 읽지 못했던거 같다. 스토리도 전혀 생각나지 않으니까..
비룡에 실망한 내게 다시 군협지의 감동을 되살려준 책이 무림천하였다. 좌소백이었던가..? 생검과 살도 두가지의 무공을 배우고 역시 장님 언니와 벙어리 동생 두 자매와 로맨틱하게 얽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무림천하는 카바이트 불을 밝힌 노점의 헌책상에게서 구입했으니 내가 군협지같은 책을 찾아 얼마나 애답지않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누구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후 만화가게의 수많은 무협지가 군협지와 무림천하와 크게 다르지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책들이라는걸 알게된 후의 내 생활이 어떠했는지는 굳이 밝히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할 것이다.
이쯤 이르고보니 감비란에 보잘것 없는 신변잡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은 듯해서 일단 숨 한번 돌리고 애초 하고자하던 얘기로 돌아가보고자 한다.
군협지와 비룡은 무협소설 애독자들에게 거의 비슷한 정도의 사랑과 애정을 받은 명작들에 속한다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군협지는 그처럼 빨려들며 읽었음에도 비룡은 그러지 못했을까..?
몇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첫째, 군협지와는 달리 비룡은 소년잡지에 연재하기 위해 소년용으로 각색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둘째, 비룡을 먼저 보고 군협지를 봤다면 비룡을 끝까지 읽지 못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와 비슷한 경우인지 모르지만,
와룡생의 검검검은 순식간에 다 보았지만 철기문은 끝내 다 읽지 못했다.
고룡의 신검산장이나 애마애검은 두번 세번 보았지만 혈앵무는 끝내 다 읽지 못했다.
야설록의 녹수장산곡-고룡책을 너무 그대로 복사한 부분이 있어서 화가 났지만-은 이불속에 전권을 가져다 놓고 읽었지만 내가위모두위의 책들은 좀체로 읽히지 않았다.
좌백의 대도오나 생사박은 결코 읽는 도중 책을 놓아본적이 없었지만 야광충은 끝내 1권을 다 보지 못했다.
백상의 화산문하는 즐겁게 봤지만 이재일의 묘왕동주는 역시 아직도 1권을 다 보지 못했으며 다시 시도하지도 않는다.
요즘 들어서는 진가소전같은 책은 줄줄이 읽히지만 그 잘나갔다는 학사검전은 끝내 중간에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 말많은 묵향은 6권까지인가 즐겁게 본 기억이 있지만 역시 그보다 더 말많은 비뢰도는 1권의 중간도 다 보지못하고 밀어놨다.
그렇다 해도...
비룡이 군협지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작품이었던가? 철기문이? 혈앵무가?
묘앙동주는 화산문화에 비해 오히려 더 많은 찬사를 받는 작품처럼도 보여진다.
이쯤에서 무협소설 읽기의 본질이 서서히 드러난다고 생각된다.
그것이 바로 아무리 문학적 수사를 혹은 비평적 논설을 외피로 쓰고있다해도 본질적으로 변하지 않는 말 즉 재미라는 것이다.
그리고 재미란 위에서 본바와 같이 지극히 비이성적이다.
개별적이며 탈구속적이다.
그것은 순문학비평과 비교해보면 더욱 극명해진다. 순문학에 있어서 작품의 가치는 구속적이다.
비록 주류와 비주류의 논쟁이 있을 수 있고 또 시대를 흐르는 사조에 종속적일 수는 있지만 순문학에 있어서 문학적 존재가치는 개별적이지 않으며 독자를 구속한다. 나 혼자 지고지순한 감동을 받았다해서 그 작품이 문학적 가치를 획득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무협소설의 가치는 개별적이다. 그것이 재미의 속성이기도 하다.
근자에 이르러 감비란에 화두처럼 등장한 무협매니아란 말을 뒤집어 보자.
무협매니아란 필수적으로 무협독서량과 관련이 없을 수 없다.
무협독서량이 많으니 입맛 또한 까다로워질 수 밖에 없고 그로인해 그 입맛을 구성하는 기준이 까다로워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재미를 불러오는 자극의 구조가 그만큼 복잡해졌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그 속에 우리가 통상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준이라는 말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다만 보다 단순한 자극과 보다 복잡한 자극이 존재할 뿐이다.
나는 아래 남양군님이 설파한 자극의 조건들에 백이십프로 동감하는 부류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이 수준이라는 말로 구분되어질 성질의 것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그저 보다 복잡한 구조의 자극들만이 자극으로 받아들여지는 필터를 소유하고 있을 뿐 거기에는 수준의 높낮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비뢰도를 보고 위에서 언급한 복잡한 자극이 가져다주는 희열에 조금도 뒤지지않는 희열을 느낄만큼 비교적 단순한 자극과 친숙한 독자들이 가진 무협소설독자로서의 권리가 나의 그것에 비해 단 한푼도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어느 한 무협소설을 놓고 그것이 명작이다 아니다의 구분에 있어서는 다른 얘기가 될 수 있다는 주장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명작이란 각각 개별적인것처럼 보이는 재미를 부르는 자극의 상이한 구조들을 넘어서는 어떤 것이 담겨져 있으리라는 모호한 낭만을 아직도 믿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게 군협지는 명작이었다.
비룡은 아니었지만...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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