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카이첼
작품명 : 희망을 위한 찬가
출판사 :
편의에 따라 평어체를 사용하겠습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들어가기에 앞서
이 글은 ‘희망에 대한 찬가’(이후 희망찬)에 대한 감상만이 아닌, 여러 가지 ‘잡설’이 섞여 있는 글이다. 분량이 전체적으로 좀 길기 때문에, 각 챕터마다 소제목을 달도록 하겠다. 제목을 보고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챕터는 넘겨 뛰고 읽으시는 것을 권한다. 미리니름이 있는 챕터는 소제목에 미리 언급을 하도록 하겠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미리니름이 강해지므로, 아래부터 갑자기 읽는 일은 가급적 피해주시길 부탁드린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마라… 라는 금언이 있다. ‘희망찬’ 내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말인데, 이 글을 여러 번 읽으면서 감상을 쓰고 싶은 충동이 있었지만 저 금언대로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이 꺼려질 뿐더러, 감상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지에 대한 막막함이 이 글에 대한 감상을 쓰는 것을 막아왔다. 최근, 건강 때문에 걷는 시간을 늘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할 기회가 많아졌는데, 이 때 이 글에 대한 감상을 풀어놓을 방법론이 몇 가지 생각나서, 감상을 풀어보고자 한다. 매우 지루한 글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사과드린다.
1. 나의 독서 취향
뜬금없는 소제목이라 당황하시는 분들도 있으시리라 믿는다. ^^; ‘희망찬’.. 아니 카이첼 님의 글은 어렵다는 평판이 많고, 독자를 가린다는 평가도 많다. 따라서 이 글을 무척 흥미롭게 읽은 필자의 독서 방식이나 취향과 비교한다면, 자신이 이 글과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하시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여 1챕터를 할애한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관심 없으신 분은 뛰어넘어버리시길 권한다. ^^
필자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역으로 말하자면 ‘이야기’가 없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게임도 시나리오 중심의 ‘RPG’ ‘어드벤쳐’ ‘전략 시뮬’ 등을 즐기며, 만화나 소설 역시 ‘단순 자극의 반복’보다는 ‘기,승,전,결’로 이루어지는 서사적 구조가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가급적, 동일한 질의 스토리라면 ‘연애 이야기’가 들어가 있는 구조를 즐긴다. 또한, 역시 동일한 질의 이야기라면 ‘주제의식’이 들어가 있는 이야기를 더 즐긴다. 그것이 전면에 들어간 주제의식이든, 아니면 감추어져 있는 함의적 의식이든, 아니면 단순한 간접 경험을 통한 것이든…
반대로 ‘이야기’가 없는 단순한 자극형, 또는 순간반사형 컨텐츠(슈팅 등의)나, 지나치게 논리적, 사고적, 사유적인 것과는 상성이 좋지 않다. 특히나 철학서 등은 쥐약이다. 독서량이 아주 많은 편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철학과 관계된 것은 교양과목으로 들었던 동양철학개론과 정도가 전부이다. 인문학적 지식도 별로 기반이 높지 못하다. 경제/경영 개론 및 원론, 미시 경제, 거시 경제, 경영심리학, 국부론, 자본론 (그나마 제대로 다 배우지도 못했다. - -;)정도가 사회과학에 대한 필자의 기본적인 지식 경험이 되겠다.
여하튼, 이런 필자에게 ‘희망찬’은 아주 재미있게 읽을만한 소설이자, 이야기였고, 1차적인 이해가 가능했으며, 2차, 3차적인 깊은 이해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학원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짧고(챕터 별) 긴(전체 이야기의), 기승전결이 뚜렷하며, 연애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매력적인 히로인이 여럿 등장한다. 필자는 희망찬을 총 5번에 걸쳐 읽었는데, 연재 시, 쫓아가면서 1번, 연재 완료 후, 문피아에서 1번, 그리고 신청한 개인지를 통해 3번에 걸쳐 읽으면서도, 아직도 머리에 쥐나는 이야기들을 제외하고 ‘이야기’로써 희망찬을 재미있게 즐기고 있다.
따라서, 어려운 것을 별로 고민하지 않으면서도, 이 글을 읽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이 예전부터 필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왜냐하면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망찬’의 또 다른 재미, 즉, 읽어나가면서 생기는 의문을 풀기 위한 사유 또한, 포기하기 어려운 재미인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한번에 반드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 차근차근 접근해보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2. 카이첼 작가님의 두 완결 장편. ‘클라우스 학원’과 ‘희망을 위한 찬가’ 비교 (1)
카이첼 작가님의 작품은 총 5가지를 접해 봤고, 그 중 2개만이 완결된 장편이다. ‘남겨진 아이 버려진 아이’, ‘클라우스 학원’ ‘희망을 위한 찬가’ ‘서브라임’ ‘잃어버린 이름’의 5가지 중, 완결된 장편이 ‘클라우스 학원’(이후 클라우스)과 ‘희망찬’ 2가지이다.
이 2 작품은 꽤 많은 공통점을 가진다. 학원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고, 주인공이 능력이 뛰어난 ‘머슴과’이며, 복수의 히로인이 있고, 히로인이라고 주장하는 조연이 있으며,(아주 주관적인 개인적 독단이다. ^^;) 주인공이 놀라운 전투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 주인공의 ‘무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물론 전투는 다수 등장하며, 주인공의 무력은 그 위기를 해쳐나가는 주요 도구이나, 전체적인 ‘테마’에 있어 주인공의 무력은 ‘부차적’인 요소이다)는 것이 주요 공통점이다.
어찌됐건, ‘완결’되었다는 점에 있어서 이 2작품을 카이첼 님의 작품 중에서 가장 먼저 권하고 싶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며, 이 두 작품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희망찬’을 먼저 읽을 것을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희망찬’ 쪽이 더 독자에게 친근한 접근을 할 수 있는 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클라우스에 비해 희망찬이 더 편안한 설명을 해주기 때문이다. (필자의 감각상). 이것은 클라우스가 학원물의 형태를 취함에도 불구하고, ‘주/조연’급 외의 비중있는 ‘클래스 메이트’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에 기인하는데, 그 자세한 이유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 후술하기로 한다.
또한, 서브라임과 잃어버린 이름은 다른 이유로 희망찬을 감상한 뒤에 읽으시는 것을 권하고 싶으므로, 결국 필자가 주장하는 ‘카이첼’님의 소설 중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소설은 ‘희망찬’이다. (연재란에 완결되어 있으므로 언제든지 무료로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중요, 서브라임과 남버아버를 제외한 모든 소설의 공통점이기도 하지만. ^^;)
3. 필자가 즐겼던 ‘희망찬’의 독서 방법
반드시 이래야 한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사실 읽는 방법을 남에게 가르치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의 극치일 수 있고, 또 즐거움을 제약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기에 매우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더더군다나, 필자 본인이 아직 ‘희망찬’에 대한 본인이 납득할만한 해석을 찾아내지 못한 상황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번 챕터 역시 맘에 들지 않으시는 분은 그대로 넘겨버리시길 권한다.
앞서 ‘클라우스’와 ‘희망찬’을 비교하며, 클라우스 학원에 비해 희망찬의 설명이 더 친절하다고 이야기 했다. 이것은, 클라우스 학원에 있어서, ‘주요 등장 인물’ 특히나 우호적인 등장 인물이 주인공과 거의 ‘동등한’ 수준의 지적 소양을 갖추고 있고, 빈도 높게 등장하는 일반 ‘클래스 메이트’가 없다시피 하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희망찬’은 ‘주요 등장 인물’ 중 주인공과 ‘동등하지 않은 (즉 일반 고등학생 수준의) ‘클래스 메이트’ 들이 다수 등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르쳐야 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클라우스 학원은 이론적인 주요 갈등 요소들이 등장할 때, 대립, 독백, 설득, 사유(주인공, 또는 등장인물의) 를 통해서 그것을 전달하게 된다. 이것은 필히 글을 읽는 대상이 작중 인물이 대사를 하는 인물과 '동일한 높이'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에 비해 ‘희망찬’은 클라우스 학원의 전달 요소에 더해서 ‘해석’ ‘해설’ ‘교수’ 와 같이 급우들에게 그 이론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 해주는 구성이 추가되게 된다. 이로서 독자는 굳이 '소설내의 화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이 ‘해설’이 독자를 등장인물 중 일부에 맞춰 그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입장에 있게 해주므로써, 이론이나 학문적인 전달에 있어서 클라우스 학원에 비해 ‘획기적으로 친절한’ 구성을 띌 수 있게 된 것이 ‘희망찬’의 최고 특징이자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서 기본적으로 ‘친구들의 잡담’ -> ‘문제의 도출’ -> ‘주인공(은결)의 해설’ -> ‘긍정, 부정, 또는 의문’+ 은결의 ‘이야기 하지 않은 부분’ -> ‘앞서 말한 화제의 일상의 적용 사례(사건) or 은결의 ‘사유’ 라는 형식으로 글이 진행되어, 상당히 편안하고 쉽게, ‘어려운 이야기’들을 즐기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대화와 해설에는 명백한 난이도들이 존재한다. 몇 가지 예외는 있지만, 보통 다음과 같은난이도로 생각하면 된다.
우선, 작중의 ‘동물 삼총사’+민성, 또는 미래와의 대화 및 해설이 전체적으로 ‘가장 쉽고 친절하다.’
고등학생의 이해에 맞춰 내용을 설명하고 있으며, 좀 더 어려운 이야기는 은결이 ‘그렇지만’ 이라는 독백을 통해서 넘겨버리므로 가장 편안하게 읽는 것이 가능하다. 이 이야기까지 어렵고, 또 이 이야기까지 짜증난다고 느낀다면, 어쩌면 그 분들은 ‘희망찬’과는 맞지 않는 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슷한 난이도의 이야기가 주인공의 아버지인 ‘수행’의 컬럼이다. 특히나 어느 정도 시사와 경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일 경우에는 더욱 편하게 읽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다음으로 어려운 이야기가 진 히로인(편견과 독단) 쿠로사카 유리에와의 대화이다. 이 대화는 동물 삼총사와 민성, 또는 미래와의 대화 수준에서 은결의 ‘사유’ 사이의 난이도를 왔다 갔다 한다. 비교적 설명이 많고, 또 대화의 응수가 재미있는 편이라… (상대적으로 동물 삼총사와는 ‘셧더 마우스’ 상태가 되므로. ^^;) 가장 선호하는 대화 패턴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등한 난이도의 대화가 히로인 ‘세연’과의 대화이다. 난이도가 전반적으로 낮은 편이지만 후반부에 들어가면 조금씩 어려워지는 경향도 있고, 또 은결이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설명부분을 많이 짤라 먹는 경향도 보여서 역시 난이도는 동물 삼총사와 은결의 사유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그리고 중간 난이도에서 최고 난이도까지를 왔다갔다 하는 것이 은결의 ‘사유’이다. 작중 다른 캐릭터들과 대화를 하거나, 어떤 사건을 보거나, 푸른 이빨에게 심하게 정신적 대미지를 입었을 경우에 나타나는 장면이고, 글에서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각각 난이도는 다른 편이지만 필자의 수준에서는 비교적 이해가 어려운 편인 내용들이 꽤 있다. 이쯤 왔을 때, 처음, 두번째 독서에서는 필자는 정 괴롭다 싶으면 대충 훑어보고 넘어가는 형태로 대응했다.
그리고 동등한 난이도로 나오는 것이 ‘수행’과 ‘은결’의 대화이다. 설명이 대부분 생략되어 있고, 저서의 이름이나, 저자의 이름, 또는 이론의 이름만 덜렁 나오는 경우도 많아서 해석이 아주 어렵다. 보통 뒤에 은결의 사유를 통해서 어느 정도 설명을 해주긴 하지만, 어렵다는 사실 자체는 마찬가지이다. 여기까지 오면, 필자의 이해 포기 빈도가 아주 높아진다. ^^;
또한 사유/수행과의 대화와 비슷한 난이도로 나타나는 것이 '여우'와 '이리세'의 대화이다. 이리세는 의도적으로 몇몇 힌트만을 던져주므로, 그에 대한 대답을 찾아내기가 무척 어렵다. 이야기의 전개상 나중에 그 답을 알려주긴 하지만, 대화의 도중에는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우므로, 거의 최고 난이도의 대화를 자랑하는 것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여우'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특성과도 관계가 있다고 보는데, 자신이 없는 부분이라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
가장 난이도가 어려운 것은 ‘이리세’라는 캐릭터와 은결의 대화이다. 이 부분은 작가가 고의적으로 ‘해석’을 끊어버린다. 외계어가 난무하고, 한번도 못 들어본 (필자의 빈약한 인문학적 지식이 한 몫 하지만)저술이나 인물들의 이름들이 날아다닌다. 5회에 걸친 독서에도 불구하고, 이 둘의 대화에는 끼어들지 못한다. (물론, 필자가 이야기가 없는 책을 싫어하므로, 대화 중에 거론된 책을 읽어보거나 찾아보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이다)
이와 같이, 희망찬에서는, 의도적인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으나, 각 대상과의 대화에 따라 이해의 난이도가 선명하게 구분되어 있다. 따라서, 지나치게 어렵거나 이해가 가지 않는 구문들은, 대화 상대를 보고, ‘이번 이야기에서는 이 인간들 외계어는 대충 읽고 넘어가자’라고 넘어가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 방법에도 불구하고, ‘희망찬’은 재미있는 이야기이며, ‘사유할 만한 거리’가 넘치는 글이다. 한번에 맛있는 음식을 한꺼번에 먹으려다 체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읽고, 이해가 가는 부분에서 시작하여, 흥미가 가는 부분에 대한 사유나 해당 지식을 탐독하는 것으로 차근차근 나가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4. 인간, ‘자아’ 그리고 ‘타자’ [미리니름 많음. 글을 읽으실 예정인 분들은 읽지 말 것]
희망찬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여러 이론은 상당히 불편하다. 특히 이러한 부분은 ‘여우’라는 캐릭터의 시선에 의해서 자주 나타나는데, 부정하고 싶은 이야기를 쉽게 부정할 수 없기에 느껴지는 감정일 것이다. 필자는 이것이 ‘보편성’과 ‘특수성’의 혼재에 있어서 나타나는 문제라고 보는데, 이론에 있어서는 항상 ‘특수성’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이론 전체에서는 예외로서 무시되는 문제이나, 사람의 삶에 있어서는 쉽게 무시될 수 없는 존재이고, 믿음이라고 본다. 따라서, 지식이 부족할지라도 필자는 굳이 그 이론의 전부에 찬동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그 불편함을 덮었다.
희망찬에서 줄기차게 거론되는 이야기는 ‘손’ ‘타자’ ‘주인과 하인’ ‘시선’ ‘보편성’과 ‘특수성’이다. 이것은 인간이 사회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대한, 희망찬에서의 ‘주인공’의 시선이며,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이것을 풀 수 없는 문제로 인식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주인공이 내포하고 있는 필연적인 비극성이 발생하고, 글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어둡게’ 만드는 주요 요소이다.
세 번에 걸친 독서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타자’에 대한 ‘시선’과 ‘관계’의 부족에 대한 은결의 시선을 이해하기가 힘들었고, 최근에야 어렴풋하게나마 그 이유에 대해서 짐작하게 되는 몇 가지 요소를 잡아내었으나, 그 연결고리를 완벽하게 이어내는 데는 실패했다. 그것은 아마도 필자가 ‘은결’ 정도의 넓은 시야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고, 또 ‘은결’처럼 근본적인 해결을 찾으려는 시도에 관심이 없으며, 또한 필자가 종교인인 것에도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글 전체를 통틀어 ‘은결’이라는 캐릭터의 최대의 비극을 만들어 내는 요소는 몇 가지가 존재하지 않는가, 라고 추측해 본다.
하나는 ‘물화’된 세계의 원리인 ‘현자의 돌’이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최초로 ‘깨달음’의 ‘물화’ 즉 보편화의 가능성을 만들어 낸 인물이다. ‘희망찬’의 설정상, 역사적으로 ‘각자’(즉 진리를 깨달은 자)는 존재하나, 그것을 물화할 가능성이 있었던 경우는 없었다. 이것은, 깨달음이란 ‘특수성’이 ‘보편적’인 교육이나 방법을 통해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현자의 돌’은 ‘술식’을 통하여 그 깨달음을 전달한다. 이것은 누구든지 ‘체계를 따른(물론 엄청나게 복잡하고 천재성을 요구하기는 하지만) 술식’의 교육과 전달에 의해 세계의 진리에 도달, 즉 ‘각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이 글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인데, 은결의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관점은 이 ‘현자의 돌’의 존재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본다.
또한 주인공은, 본인이 알 수 있는 한 가장 뛰어난 ‘특수성’을 지닌 ‘존재’의 몰락을 목격했다. 또한 그러한 몰락이 ‘보편적’으로 ‘선량하며’ ‘세계를 걱정하는’ 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을 보았다. 이는 주인공에게 ‘특수성’에 대한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시키는 사건이 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며, 이 또한 주인공의 가치관 형성에 일조를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의 타자에 대한 ‘시선’ 또는 ‘가치 판단’ 및 ‘대상 분류화’에 대한 거부는 ‘보편성’에 의한 인류의 비극에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개인의 욕망 및 욕구, 그리고 평가가 ‘타자’의 시선, 간단히 말하자면 ‘비교’에 맞추어져 있다면, 물질적 풍요는 세계의 비극을 풀어나가는 데 어떠한 도움도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풍족한 것’이 만족의 기준이 아니라 ‘상대와 같은 것’ 또는 ‘상대와 다른 것’ 또는 ‘상대보다 뛰어난 것’에 만족 기준이 맞춰질 경우, ‘더 많은 물자가 세상에 있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극단적인 일례는 현실 세계에 완전히 맞아 들어가지 않는다. 허나, 현재도, 평균적으로 세상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칼로리양’의 음식이 생산됨에도 불구하고, 세계에는 기아가 만연해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은결이라는 캐릭터는 세상의 행복이라는 테마를 ‘개인’ 또는 ‘일정 집단’ ‘일정 문화’ ‘일정 시기’로 볼 수가 없는 듯 하다. 그에게 있어서 특수성이란 너무나도 무너지기 쉬운 테마이며, 그것은 타자에 의해서 간단하게 부정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이 아닐까? ‘보편성’이 아니면 인류에 대한 ‘구제’(과연 은결이라는 개인이 그것을 원하는지는 알 수가 없으나)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러한 ‘완벽함’이 없다고 은결이라는 인물이 손을 놓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햄릿’ 형의 인물은 아니다. 그는 선의를 가지고 있고, 선의를 위해 봉사하며,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특수성’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위해 전진한다. (이 희망이라는 단어는 후에 부정되므로, 아직도 나는 은결이라는 인물을 이해할 수 없기도 하다)
허나, ‘타자에의 전달’이라는 수단을 통해 전해져야 하는 보편성과, ‘타자’의 가치와 생각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자신에게는 ‘자신’이라는 의미를 중요시 해야 한다는 은결의 가치관은 양립할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필자가 이 이야기에서 읽어낸 비극이고, 해결되지 못할 딜레마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아직도 은결이 마지막에 외친 세 문장. ‘나는 희망하지 않는다’ ‘희망하지 않으므로 절망하지 않는다.’ ‘절망하지 않으므로 멈추지 않는다’라는 외침에서 시릴듯한 아름다움을 느끼지만, 공허함과 아픔 또한 느낀다. ‘희망하지 않기에 멈추지 않는다’는 어찌보면, 은결 본인이 그토록 부정하고 싶어하는 ‘역사의 끝’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 ‘나는 희망을 멈출 수 없기에 멈추지 않는다’라는 외침을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5. 희망을 위한 찬가의 마지막, 그리고 다른 이야기 들 (치명적 미리니름. 글을 읽으실 분들은 절대 보지 말 것, 서브라임, 클라우스 이야기의 미리니름도 포함되어 있으니 참고)
희망찬의 마지막은 열린 결말이며, 은결이라는 인물의 전진이 멈추지 않았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 글에 있어서의 비극성을 아직 필자는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좀 더 많은 연결고리를 찾아보면, 어쩌면 다른 시야가 열릴지도 모르겠다.
‘수행’이 마지막으로 제시한 하나의 해법’인 ‘종의 살해’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성공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세계는 어느 순간엔가, 우성적인 특징을 가진 돌연변이들을 인식할 것이고, 그것은 종과 종의 전쟁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이러한 전쟁에서 ‘타인에 대한 이해가 풍부한’ 종은 어떠한 형태의 반응을 보일 것일까? 그리고 그 전쟁은 하나의 ‘종’의 멸망에 이르지 않고 끝날 수 있을까? 필자의 의견은 부정적이다.
서브라임과의 관계
‘서브라임’은 은결,미래,유리에,세연 4인의 캐릭터가 ‘판타지 세계’로 ‘시프트’한 세계의 이야기로 ‘추론’된다.
이 세계에서, 은결은 황녀(미래)의 청혼을 거절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로 전해진다. 그것은 은결이 어떠한 결론에 도달해서 나왔던 것일까. ‘시두리의 노래’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이였을까? 아니면 종의 살해에 대한 필연적 비극을 느낀 선택이였을까… 아니면 그가 배우자로 맞고 싶었던 인물이 따로 있었던 것일까…
어찌됐건 하나의 패러랠 월드에서의 답변이었겠지만, 그 세계에서 사상 최대로 뛰어났던 인간인 ‘실버라이트’가 ‘고룡’으로부터 ‘썩은 동태 눈깔’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것을 보면, 결국 은결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합치에 실패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게 된다.
클라우스 학원과의 관계
클라우스 학원과 희망찬의 비교는 매우 흥미진진하다. 특히나 클라우스 학원에서의 하나의 주제가 ‘보편성’을 찾았던 한 비극적인 ‘천재’와 주인공 ‘데일’의 ‘보편성에 대한 부정’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앞선 작품에서의 주인공의 주지를 뒤의 작품에서의 주인공이 전 부정하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같은 학원물, 비슷한(하지만 전혀 다른)느낌의 주인공, 인문학적, 성격적 매력을 가지는 히로인 들, 비슷한 ‘소재’에서 나오는 ‘다른 이야기’의 매력은 ‘환상적’이라고 칭할만 하다고 본다. 곧 클라우스 학원의 개인지 발간에 필요한 인원 수가 모여지므로, 클라우스 학원과 희망찬을 대조하며 읽어보는 즐거움을 상상하며, 기대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잃어버린 이름과의 관계
잃어버린 이름은 ‘희망찬’ 또는 ‘서브라임’과 연계되는 ‘삼좌 연대기’(내멋대로 네이밍)의 하나로 추측된다. 현재 연재 중이며, 여태껏 보지 못했던 ‘로드 무비’형식의 진행을 보여준다. (서브라임도 로드 무비 형식이였다. 학원물로 변신을 꾀하는 시점에서, 연재가 중단된 상태다. 훌쩍)
무려 거대 로봇도 등장하며, 주인공이 여태까지 소설 중에서는 ‘가장 약하다’. 그래서 반대로 보자면 ‘가장 성장이 빠르다’고도 할 수 있어, 여태 비교적 느끼기 어려웠던 ‘성장물’의 재미를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 (희망찬에서도 몇 번 성장이 있지만, 이건 환골탈태 형의 성장이라 ‘성장물’의 재미로 보기 어렵다)
요즘 가장 재미있게 보고 있는 글이다. 뭐… 여기까지 글을 보신 분들이라면 기본적으로 희망찬을 보신 분들일테고(미리니름을 무시하지 않으셨다면) 그럼 이미 읽고 계시겠지만… 무척 재미있는 글이니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깁니다… 제가 평생 쓴 감상문 중 가장 긴데다가… 아무래도 횡설수설이 많아 의미가 잘 전달될지도 걱정되네요… T_T
제가 평가 내리기가 꺼려질 정도로 좋은 글이니 꼭 일독을 권합니다. 처음부터 모든 재미를 느낄 수는 없으셔도, 읽을 때마다 다른 점을 찾아가는 재미가 점점 쌓일 것이라는 걸 보장할 수 있습니다.
조잡한 감상이 좋은 글의 색을 덮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지만, 열심히 적은게 아까워서라도 감상 업로드를 감행합니다. 부디 이 글이, 한 분이라도 더 좋은 글을 접하거나, 또 접하신 분이 다른 시각으로 글을 살펴볼 수 있는 조그마한 도움이라도 되기를 바라며 감상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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