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소설, 읽는 영화 (남부의 여왕 추천사 발췌)
세상에는 잘 읽히는 소설과 잘 읽히지 않는 소설이 있다. 대개의 독자들은 잘
읽히지 않는 소설을 재미없는 소설이라고 규정한다. 물론 잘 읽히고 재미있는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는 근거는 없다. 마찬가지로 잘 읽히지 않는다고 해서
나쁜 소설이라는 근거도 없다.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에 대한 판단 기준은 왕왕
복잡하고 골치 아픈 논쟁을 불러온다. 대중소설과 순수소설의 논쟁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잘 읽히고 재미있으면 대중소설, 잘 안 읽히고 재미없으면 순수소설
이라는 묘한 등식이 논쟁의 저변에는 깔려 있는 것 같다.
나는 소설에 대한 도식적인 분류에 동의하지 않는다. 대중소설과 순수소설의
논쟁 따위는 이제 식상할 대로 식상한 메뉴라 소설에 문외한인 독자들에게도
씨알이 먹히지 않는다. 문제는 분류가 아니라 독후감이다. 소설을 읽은 독자의
뇌리에 어떤 후감이 남고, 그것이 그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가 가장
큰 관건이 되는 것이다. 만약 소설을 읽은 독자가 독후감의 영향으로 곧바로
범죄를 저지르러 간다면 그것은 보나마나 나쁜 소설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대중소설이건 엽기소설이건 추리소설이건 환상소설이건 소설을 읽은 독자에
게 인간의 인생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소설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소설이 인간과 인생을 다루고 있고, 인간과 인생을 위해
쓰여지기 때문이다. 한 권을 다 읽었는데 생각할 건더기를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있으나마나 한 소설이 되는 것이다. 그런 소설을 도대체 왜 쓰나.
(中略)
'남부의 여왕'을 읽는 내내 나는 영화적 서사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약 밀매
업계를 다룬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처럼 스릴 넘치는 소설의 장면들이 절로
영화의 화면으로 재구성되었기 때문이다. '뒤마 클럽'과 '플랑드르 거장의 그림'
이 그랬던 것처럼 이 작품도 영화로 만들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작가가 애초
부터 영화를 염두에 두고 쓴 소설 같다는 혐의도 짙다.
아무려나 소설을 영화로 보는 건 어렵지 않지만 영화를 소설로 읽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남부의 여왕'은 '읽는 영화'의 재미가 뭔지를 만끽
하게 해준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나의 뇌리에서는 마약 운반을 위해 쾌속정을
모든 테레사 멘도사, 빗발치는 총탄 사이를 달려가는 남부의 여왕이 스러지지
않는다.
'보는 소설'과 '읽는 영화'라는 말을 수첩에 메모해 둬야겠다. 그것을 곰곰 되새
기다 보면 소설의 새로운 영역이 떠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때문이다. 남의
나라 소설의 재미에만 빠질 게 아니라 우리나라 소설의 재미도 개척해야 할 것
이다.
- 박상우(소설가)
추천사를 읽으면서 상당히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뭔가 남아있어야 소설
이다. '읽는 영화'가 어쩌면 소설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은 평소에도 제가 품고 있었던 생각입니다.
'24' 같은 미국드라마를 보면서 무협도 이런 식으로 써보면 어떨까 생각했고,
만일 그렇게 쓴다면 이것이 과연 소설이라 부를 수 있을까? 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십이국기' 같은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애초부터 애니메이션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을 쓴다면 과연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단지 추천사에 지나지 않지만 가슴에 와닿는바가 있어 글을 남겨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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