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이영도
작품명 : 드래곤라자
출판사 : 황금가지
드래곤라자
1.서론
내가 드래곤라자를 접하게 된 것은 중학교 시절 때였으며, 점심시간 후 지루한 남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학교 도서관을 찾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도서관의 한 곳에 진열 되어 있던 드래곤라자. 그때의 나에게는 판타지라는 장르가 매우 생소했고 흥미가 일었기 때문에 시간 때우는 셈치고 한번 보자는 심정으로 책을 펴본 것이 판타지라는 장르에 시선을 돌리게 되었고, 인생에서 약간의 전환점이 되었다(그때의 나에게도 책보다는, 컴퓨터게임이라는 것이 더 익숙하다고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인간, 그리고 드래곤. 수많은 타종족. 이영도 작가의 재치 있는 입담. 맛깔스러운 문장과 타자만의 생각이 깃든 철학. 나는 해리포터를 보듯 그의 이야기에 동화되어 들어갔다.
나에게는 책을 읽고 진지하게 써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과연, 진지하게 쓸 수 있을까 염려가 된다.(웃음)
2. 본론
드래곤라자. 인간과 드래곤을 이어주는 존재. 이 이야기의 주제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단순히 시간을 때우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평생 동안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단지, 판타지라는 장르로 본다면 깊게 생각할 필요 없이 가볍게 읽는 인식이 크지만 이 책을 본다면, 의외로 판타지라는 장르로도 나름의 사색을 할 수 있는 거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이 놀라울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줄거리를 간단하게 나열해보자면 이렇다.
바이서스라는 나라의 어느 작은 핼턴트라는 시골에서 사는 후치네드발이라는 17세 소년의 시점에서 시작되며, 핼턴트를 위협하는 아무르타트라는 검은 드래곤에게서 벗어나려 왕의 드래곤인 캇셀프라임을 데려와 아무르타트에게 싸움을 걸면서 시작된다.
화이트 드래곤인 캇셀프라임이라는 드래곤이 낀 대대적인 제9차 정벌이 실패하면서 왕에게 그의 드래곤인 캇셀프라임의 전사 소식을 전하는 겸, 아무르타트에게 잡힌 포로들을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떠난 여행. 여러 가지 사건이 겹치고 이내 결국 몸값을 마련해 돌아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인 후치 이외에 개성 넘치는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17세 핼턴트 소년이자. 초장인 후치. 독서가이자, 독설가인 칼. 든든하지만 무식해서 오거다운 샌슨. 이쁘고 잘빠진 몸매를 지닌 엘프 이루릴. 땅딸막한 키를 지닌 드워프 엑셀핸드 등등.
이런 나름의 개성이 있는 캐릭터를 이용해 타자는 자신이 생각했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작은 주제 위에 보다 큰 주제를 우선, 제목인 드래곤라자라는 문구를 이용해 시작한다.
이야기를 진행하는 동안, 자주 등장하는 드래곤라자라는 문장은 타자가 말하려는 가장 큰 핵심이자 인간 외에 다른 종족이라는 시점에서 말할 때 역할을 한다.
그럼, 우선 큰 주제이자 핵심인 드래곤라자에 대해 설명을 해보자. 타자는 칼이라는 캐릭터를 빌려 인간과 드래곤을 이어는 라자를 부부의 결혼서약에 비유했다. 12권의 끝에 송경아씨의 비평에서 설명이 되었지만, 드래곤라자는 부부들이 서로 결혼을 하고 서약 맺으면 매일 다시 서약을 나눌 필요가 없다. 이에 드래곤라자에서 라자가 그에 해당된다. 라자는 드래곤이라는 완전성을 가진 종족과 맺어지고 나면, 인간과 교류가 가능한 드래곤이라는 상징성을 남겨주는 의미 이외에는 없다.
라자에게는, ‘나’라는 사람이라는 개념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를 빌려서 타자는 말하고 있다. 인간은 교류를 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에게 치우치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서서히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이다.
상대와 나의 잘못된 점을 서로 바라보며 조금씩 나아가며 수정을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이는 대미궁에서 드래곤로드의 대담에서, 후치와 칼을 입을 빌려 자아와 타아는 자신이 바라보는 자신. 타인이 바라보는 자신을 서로가 바라보게 될 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점은 서로가 가지고 있는 그 사람에 대한 기억,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시점에서 그 사람을 평가하게 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자아와 타인이 알고 있는 자신을 비교하며 나아가는, 그러니까 위에서 말했듯이 서로가 교류하며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타종족(타인), 인간(자신)이 바라보는 항상성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드래곤라자 안의 대사인, ‘엘프(타인)가 하늘을 바라보면 별이 되고, 인간(자신)이 하늘을 바라보면 별자리가 생긴다.’는 말도 서로가 같은 대상을 바라보더라도 다른 시점에서 바라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타자는 이 대사를 빌려 ‘사람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보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라는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그리고 두 번째로, ‘자아와 타아’라는 큰 주제 아래에 ‘변화’라는 작은 주제를 적으며 인간이라는 동물에 대해 전체적으로 사색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드래곤라자에서 나온 변화를 지칭하는 대표적인 대사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은 짝사랑이고, 가장 무서운 병은 상사병이다. 그 두 가지는 서로를 변화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짝사랑은 자기 혼자서 그 마음을 간직하기 때문에 상대를 변화시키지 못하고, 상사병은 그 사랑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지만, 역시 혼자 간직하기 때문에 역시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타자는 인간은 서로 타인을 변화시키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점은 아무르타트와 핼턴트 주민간의 대립에서도 드러난다. 핼턴트 주민은 아무르타트를 정벌하면서 아무르타트가 변화하기를 바란다. 약간 가볍게 이야기를 해보자면, 핼턴트 주민이 아무르타트에게 뭐라고 말을 해도 아무르타트는 그냥 ‘어디 남의 집의 강아지가 짖나.’라는 대처를 보인다. 드래곤과 인간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점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따른 대처도 다르다.
핼턴트 주민이 ‘넌 살인자야’라고 말해도. 아무르타트는 ‘그래. 맞는데?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대응을 보인다. 그에 지친나머지, 핼턴트 주민 쪽에서 아무르타트를 받아들이는 반응을 보인다.
자신에 의해 타인이 변화가 없자. 자신이 타인에 맞춰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간단하게 커플을 생각하면 쉬울 것이다. 서로가 자신에게 맞춰주기를 바라는 모습을 ‘타인을 변화시켜 관계를 만들어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3. 석양의 감시자 아무르타트.
드래곤라자 안에서 아무르타트는 큰 역할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이야기의 시발점이자. 이야기를 결말짓는 도착점(아무르타트에 의해 시작되고, 아무르타트에 의해 끝나기 때문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무르타트는 다른 드래곤, 예를 들면 크라드메서. 지골레이드. 캇셀프라임. 드래곤로드 등과 다른 드래곤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위의 드래곤들은 다 한 번씩은 라자의 상징성을 가진 드래곤이라면, 아무르타트는 처음부터 최후까지 라자가 없는 드래곤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면, 같은 드래곤이라도 타인을 바라보는 시점이 라자를 거치며 인간화된 드래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랄까. 아무튼 간에 내가 바라보는 아무르타트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무르타트의 ‘석양의 감시자’라는 말은 이 소설 전체에서 감시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다른 드래곤과는 바라보는 저울대가 다를 수밖에 없다(12권 말미에 아무르타트의 대사에서도 나옴).
4. 결론.
타자는 이 소설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해서 전체적인 사색을 하며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닌가 한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점. 상대에게 변화를 주어 관계를 지음. 서로에게 자신을 나누어주며 갖는 교류라는 무리지음. 말미의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결국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타자는 인간이라는 종족에 대해서 나름의 정의를 내린 것이 아닌가 한다. ‘상대에 맞춰 무리를 지으며 무한한 가능성을 잠재한 인간.’이라는 것이랄까(웃음).
5. 마치며
으으,,, 글을 2시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서 달랑 3쪽을 써내려갔다.
드래곤라자는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을수록 이 책을 접하는 시선이 차이가 확 날 정도로 다른 신기한 책이라고 해야 할까. 중학교 때는 그저 이해하기 난해한 책이었고, 중학교 말미에는 이해를 할 듯 말 듯 했으며, 고등학교에 들어서야 이 작가가 인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구나 하는 정도였고 대학교에 들어서 작가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듯한 책이다. 시간이 더 흘러서 다시금 본다면 어떤 얼굴을 보여줄지 나름 기대가 되기도 하고, 판타지에 타자처럼 철학을 넣을 필요는 없을지는 몰라도 판타지라는 장르에 철학이라는 하나의 얼굴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한다(판타지가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만 하는 것 아닌 작가 개인의 생각을 넣어 문학성을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줘서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은 격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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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한번 심심하던 차에, 감상글 한번 써보자 하고 써본 글입니다. 괜찮나요? (사실 감상, 비평은 중딩 때 이후로 독후감 몇 번 쓴 거로 끝이었는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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