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박찬규
작품명 : 천리투안 2권
출판사 :
역시 초반의 벽이 높았던 거다. 힘들게 벽을 넘어 2권 들어서자 무척 재밌었다. 더이상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요요요 타령을 부르는 일도 없어졌고, 평상심을 가장한 무기력 모드도 씻은 듯이 사라졌다. 축늘어진 배추가 사라진 자리에는 열정적인 소년이 남았다.
적절한 무공증진 속도가 우선 마음에 든다. 천재라는 자부심,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 뒤에는 자기도 모르게 자만심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을 어느 순간 깨닫는 장면을 삽입한 것이 절묘했다.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결코 느리지 않은 속도로 발전해 가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고, 절세의 강자는 아닐지언정 위기의 순간에는 투시안을 통해 힘을 발휘하는 것도 즐거웠다.
묘하게 현실적인 면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요즘 많은 소설에서 「천재는 그냥 천재다」라는 느슨한 인식을 느낄 수 있다. 무슨 소리냐 하면 천재는 뭐든지 알고, 뭐든지 꾸며내는 대로 흘러가고, 익숙치 않은 상황에서도 금새 책략을 짜내며, 다 들어맞는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스무 해 가까이 오지에서 태어나 자란 주인공이 중원에 들어오자마자 오만 책략을 다 쓰는데도 척척 들어맞는 소설도 있다. 그러나 세상살이 그런게 아니다. 뭔가를 꾸미려면 남들 아는 것 두배는 더 알아야 하고, 세배는 더 생각해야 한다. 정보가 제한되어 있다면 제 아무리 천재라도 그 제한된 정보 내에서 무언가를 꾸밀 수 밖에 없는 것이고, 당연히 고려치 못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요즘 무협소설의 천재들은 그런 거 따지지 않는다.
반면에 이 천리투안에서 주인공은 철저하게 사부에게서 습득한 정보 내에서 추론해서 계략을 꾸민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정보의 부족으로 큰 실책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 정보는 사천에서 사는 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것이지만, 그래서 사부도 주인공이 알고 있으리라 여겼지만, 사실 노비의 신분에 폐쇄적인 생활을 하며 무공수련에만 힘쓴 소호는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누구나 조금만 아는 이라면 천재라 생각하고, 스스로도 천재라 자부하던 소호가 좌절을 맛보고 거기서 더욱 성장하는 장면도 좋았다. 왠만한 무협소설이라면 위기의 상황에 짜잔하고 주인공이 등장한 이런 구도에서는 '잠룡출해'라느니 '신위초현'이라느니 하는 소제목을 달고 적들 단숨에 다 쓸어버리고 폼나는 모습을 연출했을 것이다. 사실 나도 그런 모습을 예상했기 때문에, 소호의 위기에 더욱 놀랐다.
거기서 이어지는 대제자 윤천회의 심리묘사도 깊이있는 것이었다. 의기있고 책임감도 강하지만 귀가 얇아서 적극적이지 못했던 그가, 노비인 소호에게서 위기감과 경쟁의식을 느끼고 무의식중에 멀리했던 그가, 드디어 소호에게 마음을 열고 서로 다가가는 모습이 참으로 현실적이면서 훈훈했다.
나는 머리 싸움을 좋아한다. 그래서 계략이 난무하고 음모가 판을 치며 속고 속이는 그런 소설이 좋다. 그러나 제대로 된 책략이 아니면 오히려 더 재미가 없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이건 아무리 봐도 너무 엉성하잖아, 하고 느껴버리면 김이 빠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천리투안은 실망시키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현실적인 책략전의 전개도 마음에 쏙 들었지만, 이가 딱딱 맞아들어가는 모략 자체도 즐길 만한 것이었다. 소호는 주어진 정보와 조건 하에서 정말 생각해 볼 만한 책략을 다양한 방면에서 짜내며 사부와 의논을 통해서 행한다. 심리적인 면까지 고려해서 대국적으로 상황을 바라보며 갖가지 방안을 모색한다. 스스로 복수를 위해 암계를 짜낼 때는 교묘한 속임수, 심리적 압박, 외부 상황에 연결시켜서 덮어씌우기 등등 책사로써 사용할 만한 도구를 모두 쓰면서 얽어맨다. 비록 머리싸움이 주가 되는 작품은 아니지만, 무공의 성장 못지 않게 이러한 책략전도 재미있었다.
소호는 참으로 바람직하게 자란 것이다. 어렸을 때는 축늘어진 배추같더니 이렇게 착실하게 자랄줄이야!! 적당히 스스로를 숨길 줄 알고, 그러나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하며, 자기 울타리 안의 것은 지키고자 하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다. 더군다나 책임감도 강하니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드디어 히로인이 등장하는데, 약간 웃기지만 와 모님 소설에 무척이나 자주 등장하던 「음약 먹고 붕가붕가」 상황에서 처음으로 만난 여인네다. 소호는 그 일에 대해 대단히 큰 책임감을 느끼는데, 어렸을 적 대학자 호유용의 아들네미로 자라며 엄격한 교육을 받았을 터이니 그정도는 별 반감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얼굴 기억도 못하는 여자애 좋다고 찾으라는 것도 아니고, 책임진다고 찾아다니는 거니까 말이다.(남자라면 당연한 거 아닐까)
그러다가 둘이 만나는데 이게 또 참으로 묘하다. 둘 다 서로에게 그다지 떳떳한 상황은 아니고, 더군다나 실질적으로는 첫 대면인데도 서로에게 호의를 가진다. 그러나 상당히 급작스런 전개임에도 불구하고 불만은 없었다. 우선 수연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는 게 첫번째 이유이겠고, 두 사람도 어차피 자기들의 마음이 왜 그렇게 움직였는지 잘 모르니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이치대로만 움직이는 것이 절대 아닌지라, 소설에서 이렇게 분위기 잡아주고 나머지는 적당히 상상해라 식으로 나와버리면 오히려 더 납득이 가는 것이다. 하여간 남자다운 소호 멋졌고, 묘한 매력이 있는 수연도 자주 봤으면 좋겠다.
1권 초중반에서 참으로 힘들었지만, 역시 많은 분들이 추천하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이 천리투안으로 박찬규님을 다시 보게 되었고(태극검제는 좀 취향이 아니었다), 3권을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게 되었다. 아, 책이 참 두툼한 것도 내 마음을 훈훈하게 해 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ps.
얼마전 읽은 3권에서는 2권에서 느꼈던 재미가 많이 사그라든 느낌이지만, 어쨌든 2권을 즐겁게 읽었던 흔적입니다..
http://blog.naver.com/serpent/110021959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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