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명 : 진여
작품명 : 기괴십팔전
출판사 : 스카이 미디어
1.
뜬금없는 이야기로 시작해 보겠습니다.
어떤 영화가 있다고 칩시다. 그 영화는 '지구상에서 남자만 몽땅 죽어버린 세기말적 근미래'를 배경으로 시작한다고 가정합니다. 영화는 여자들끼리 어찌어찌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그럼에도 종족 유지를 위한 '번식'의 불가능으로 인해 찾아드는 절망 등을 참으로 멋지게 표현합니다.
이때, 관객이 관심과 흥미를 가져야 할 부분은 '그런 세상'에서 '어찌 되는가' 입니다. '그런 세상이 올 리가 없으니 이건 말도 안되는 영화!'라며 근간 자체를 부정할 필요는 없는 겁니다. '만약 이런 세상이 있다면' 에서 출발하는 영화인데, '그런 세상은 없다'며 영화를 부정하는 것은 그릇된 판단이겠지요.
제가 소설을 읽을 때의 관점이 위와 비슷합니다.
작가분께서 '15세가 성인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소설이 극사실주의 작품이 아닌 이상, 게다가 그 작품이 팬터지(무협 포함)인 이상 인정하고서, 출발점을 거기에 둡니다. 독자일 뿐인 저 자신을 세뇌시키죠. 아! 난 15세에 성인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어! 라면서요. 주인공이 혼자서 200명을 칼로 썬다고 해도 그런 것이 가능한 세상이 있다고 믿고 봅니다.
물론, 소설의 전반부에서는 그게 불가능한 듯 나오다가 후반부에서 먼치킨으로 변신하는, 스스로 구조의 톱니바퀴를 망가뜨리는 소설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만..
출발부터 가능하다고 한 소설은 가능하다 믿고, 출발에선 아닌데 나중에 모순적으로 가능해지는 소설은 망가진 것이라 보죠. 독자로서요.
2.
자, 이제 기괴십팔장에 대해(이거 참 발음이;) 이야기하자면, '참 간만에 맘 잡고 볼 만한 글이 나왔다'는 것이 제 개인적 감상입니다. 물론 취향의 차이는 고려해 주십사 부탁드립니다.
첫인상은 '인간과 인간이 처음 접촉(만남)할 때의 그림을 묘사하려 애썼구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효과적이었습니다.
사부와 제자의 만남, 제자와 호위의 만남, 제자와 여인의 만남, 여인과 사부의 만남, 그 모든 만남들 감정적인 바탕이 되는 이별들.
감정의 흐름 묘사에서 건너뛰는 듯한 느낌이 드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충분히 행간을 읽음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여집니다. 글을 볼 때나, 마술공연을 볼 때 기계 설계도 보듯 분해하여 하나하나 꼬집으려는 성격의 사람만 아니라면요.
혼자서 수백 인원을 쓸어버린다는 부분에서 먼치킨 소리가 나올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제 입장에선 눈에 밟히지 않는 먼치킨이었습니다. 위 1번 항목에서 말한 것처럼 애초에 그런 사람이 사는 세상일 뿐이니까요. 그렇다고 하고 보면 됩니다.
하지만 먼치킨인데 긴장감이 있겠느냐? 라고 물으실 분도 있겠죠.
대답해드리자면, 작가분의 관심사가 거기에 있지 않은 듯합니다. 강력한 무공으로 쓸어버리고 무림일통이라거나, 갈고닦은 실력으로 깽판적 복수 같은 것이 아닌, '그런 세상'에서 '만남을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즉, 말 그대로 '무림은 배경일 뿐, 봐야 할 것은 그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아직 본격적으로 그 이야기라는 것이 시작되지는 않은 듯한데, 다음 권에서부터 시작될 냄새를 풀풀 풍깁니다.
3.
아쉬운 점도 이야기해야 공평하겠지요.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그냥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들에 의미를 가집니다. 그렇지 않은 소설이 어딨느냐고요? 많습니다. 아무 책이나 들춰 보세요. 길에서 만나서 얼굴 한 번 보고 사랑에 빠졌다로 시작되는 글도 있습니다. 반면, 기괴십팔장은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는 부분은 같지만, 왜 그때 사랑에 빠졌는지, 그의 과거가 어찌 영향을 끼쳤는지 등이 차곡차곡 쌓여 그 만남을 이루어 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감정 흐름을 묘사할 때 아까도 말했듯 점프jump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상황적으로는 등장인물을 이해할 수 있겠는데, 작가분도 그 상황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셨는지 마치 언급을 일부러 하지 않은 듯한 감정의 선이 있어서 어색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크게 거슬리지는 않습니다.
하나 더 아쉬운 점.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본격적으로...
...
...모든 준비가 끝났다...
...하기만 하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준비를 두 번 하더군요^^ 1권 중반쯤입니다.
4.
재밌다고 쓴 글인데 다시 읽어보니 안 그렇다고 쓴 글 같군요;;
다시 말씀드리는데 <무공과 쟁투>에 시선을 두고 무협을 읽으시는 분들 보다 <그들이 펼치는 드라마>에 시선을 두고 읽으시는 분들께 더욱 좋을 듯합니다.
ps. 참..다시 생각해봐도 저 감상문 진짜 못 쓰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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