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 8권, 독자들은 잔인해!
진정 살아있는 소설이다. 꿈틀꿈틀 움직이며 쉴 틈을 주지 않던 스토리가, 어느덧 거대한
실체를 드러낸다. 그래 어느덧 8권이다.
소설 신승은 그 태생의 슬픔을 안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 편에선 그의 발랄함과 재기 넘침에 탄복을 아끼지 않았지만, 다른 한 편에선 그 부모가
환타지 나라 국민이었다는 사실이 은근히 깎아내리는 시선을 갖게 하였다.
하지만 처음 만난 그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은근히 눈을 흘기면서도 그의 관상을 보고 큰
성공을 점쳤다.
시간이 흐르고 신승은 어느덧 8권에 이르렀다. 아직 승승정구(-)하고 있다.
7권에서 잠시 비틀거리자 기다렸다는 듯 냉혹한 시선의 칼날을 맞았지만, 8권에서 오히려
기막힌 반전을 준비해 빠져나온다.
그래, 스토리에 명확하고도 성공적으로 살을 바르는 모습을 1권부터 보아왔다. 이만한 흐
름을 창조하는 작가는 썩어도 준치 이상이다.
반드시 다시 자리를 잡을 줄 알았다.
쉬이 눈치 채기 어렵지만 작가는 대단한 내공을 지녔다.
주인공 정각의 행보를 유쾌히 바라보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잔인하다.
정각은 이제껏 한 순간도 편안하지 못했다. 위기를 넘겨도 또 다른 위기를 만났고 잠깐의
행복에 겨우 목을 축일 뿐이었다. 어떤 좋은 마음을 품더라도 오히려 원한을 샀고, 언제나
다른 이에겐 티끌만한 목숨이었다.
그런데 어느 누가 그를 위해 슬퍼해 주었나!
희노애락이 쉴 새 없이 장각을 스쳐 지나갔지만 독자에겐 모두가 똑같았다. 재미, 약간의
두근거림, 그리고 웃음이다. 우리는 정각에 스며들어 그의 미꾸라지 같은 선택에 감탄을
내뱉기도 했지만, 반대로 주인공을 이지메하는 대열에 서 있기도 했다.
작가는 짓궂게도 주인공을 끊임없이 괴롭혔지만 이에 동참한 건 독자도 마찬가지였다.
낙양야색때 정각이 피골이 상접했는데, 이 때 이를 동정한 사람이 있던가?
똥 뒤집어쓰고 온갖 추잡한 짓을 벌여야 했는데, 이 때 정각을 연모하여 머리를 쥐어뜯은 게
당신이었나?
아니다. 당신은 분명 웃었다. 어느덧 당신은 이 거대한 이지메 현장의 방관자였던 것이다.
이 정도로 주인공을 제어할 수 있는 작가는 보기 드물다. 오히려 그런 강한 개성의 주인공
에 끌려 다니기 십상인데 오히려 한 수 위를 보이는 형편이다. 작가가 소설 속의 주인공에
게 오히려 스토리를 끌려 다닌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면 아직 당신은 펜을 잡지 않은 거다.
8권 마지막에 들어서 작가는 아예 정각을 내다 버린다. 한 점 틀리지 않고 정확한 비유다.
아니 오히려 모자라다. 좀더 명확히 현실적 예를 취사하자면 다음과 같다.
장소는 화장실. 변을 보는 자는 절세신마. 정각은 휴지 한단. 화장실 주인은 작가 정구.
8권말 : 절세신마는 휴지로 밑을 닦고 구겨서 버린다.
스포일러를 배제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건 대단히 적절한 비유이자 실제 상황이다.
피도 눈물도 없을 정도로 잔인한 상황이지만 아무도 정각의 그 기구한 운명에 슬퍼하지 않
는다. 그가 드디어 세상 전체와 싸워야 할 지경에 이르지만 어느 누구도 비장미를 느끼지
않는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유사 이래로 이렇게 독자에게 버림받은 주인공은 없다. 오히려 사람들은 박수치며 재롱을
떨지 않는다고 소란이다. 짐승으로서의 면모가 이번 권엔 없다고 아우성이다.
그래. 이제 좀 무서워 졌는가? 그대 가학심리가 있다.
신승엔 웃음 유발 인자가 가득하다.
용노사의 군림천하 권수가 너무도 당연하듯 신승 또한 권수만으로 판단할 소설이 아니다.
그 어떤 소설도 사람 모두를 만족시키진 못한다. 아무리 회자되는 소설이라도 어느 누군가
에겐 욕을 먹기 마련이다.
신승은 많은 이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오히려 그 재미를 느끼지 못함을 슬퍼해야 하지 않을까?
즐기기 위한 것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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