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정담에 올리기를, 기존에 좋아하던 여자애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새로이 얻은 여자 친구에게만 헌신하겠다는 다짐 글을 써 올렸건만, 막상 상황에 부딪히니 다짐했던 대로 행동하기가 참 어렵네요.
오전 수업 하나를 좋아하던 여자애(Y)랑 같이 듣게 되었습니다. 원래부터 Y랑 같이 들으려고 그렇게 시간표를 짜둔 것인데, 저번 주 주말까지 마음이 갈팡질팡하느라 시간표 정정 기간을 놓쳐버렸거든요. -_-;; 덕분에 지금 여자친구(S)에게 집중하기로 해놓고서는 한 학기 동안 꼼짝없이 Y와 함께 수업을 듣게 됐지요.;;
살짝 지각을 했는데, Y는 이미 와 있더군요. 자리도 얼마 없을뿐더러 출석을 부르기 시작해서 그냥 아무 자리에나 털썩 주저앉았지요. 1주차인데도 OT 그딴 거 없이 바로 수업 시간을 꽉꽉 채우기로 악명 높은 강의인지라 2시간을 하드코어하게 진행하더군요. -_-; 그래도 도중에 5분(...10분도 아니고 젠장;;) 쉬는 시간을 주던데, 그 사이에 Y가 쪼르르 와서는 필통 놓고 와서 필기구가 없는데 빌려 달라 하기에 그냥 주었습니다. 비싼 것도 아니고 총학생회 광고용 펜(...)이어서 오늘 하루 종일 쓰라고 줬죠.
수업 끝나고 나서 잠깐 얘기를 나눴는데, 제가 저번 학기에 들었던 수업을 Y도 똑같이 듣는데, 교재를 아직 안 샀다기에 그냥 제가 쓰던 교재를 사물함에서 꺼내 주었습니다. 뭔가 오늘 아낌없이 주는구나, 했지만 선배가 학용품(...) 물려주는 거야 미풍양속에 해당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제기랄. 태연히 쓰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히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ㅜㅜ 콩팥 떼어다 줘도 안 아플 것 같다는 말이 이런 건가 싶더군요. 제가 받아먹는 것도 아닌데, 뭔가 주면서 기쁜 마음이 들었으니까요. ㅜㅜ
그냥 제가 좀 더 선량해져서 그런 거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젠장;;; 솔직히 말하건대, 얘기할 때 공연히 긴장되고 두근거리는 건 멈추지 않더군요. 여전히 목소리는 슬금슬금 떨리고, 대답은 영 어색하고...;;; 클랜전에서 스나이퍼 포지션을 맡았을 때 썼던 마인드 컨트롤 기법을 이용하여 심신을 진정시키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했는데 당최 성과가 나질 않아요! 우황청심환이라도 사먹어야 하나...
문제는 전공수업 하나 더 끝내고 점심 즈음에 S랑 만났을 때 발생했습니다. S가 11학번들 밥 사주려고 하는데 같이 식사해도 되겠느냐고 묻기에 흔쾌히 같이 하자고 했지요. 저도 같이 사주면 S의 지출도 분담되니 좋고요.
그래서 어디어디서 만나자고 S가 11학번 애들에게 연락 넣는 걸 옆에서 듣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Y더군요. -_-;;
머리통을 망치로 얻어맞는 듯했습니다. 제기랄. 예측해야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S하고 가장 친한 11학번 여자애는 Y인데 말이에요! ㅜㅜ 아까 전에 Y랑 단 둘이 얘기할 때도 어색어색열매를 처먹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했었는데, S 앞에서 Y를 대면해야 한다니!! 진짜 그 순간에, 진지하게 약국 가서 우황청심환 하나 사먹는 걸 고려했습니다. -_-;;
뒤늦게 없는 약속이라도 만들어서 그냥 자리를 피해야 하나 싶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Y가 빨리 오더군요. ㅜㅜ 그래도 Y만 오면 진짜 불편한 자리가 되었을 텐데, 다행히 Y랑 친한 11학번 남자애인 V가 또 껴들어서 다소 괜찮기는 했습니다. Y는 S랑 얘기하게 내버려두고 V랑 얘기하면 될 것 같았거든요.
근데 문제가 진짜 지랄맞게 터졌습니다. 비속어 써서 죄송합니다만, 진짜 지랄맞았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5월경에 작성한 제 글을 기억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그 때 Y랑 친해지기 위해서 제가 밥 먹여가며 매수했던 멍청한 11학번 남자 후배가 있었습니다. 예. V가 바로 그 후배인데요....
V는 저랑 S가 사귄다는 걸 모릅니다! 당연하죠! 말한 적 없으니까!!
V는 아직도 제가 Y 좋아하는 줄 알아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구요?? 보통 고학번 여럿이 저학번 여럿이랑 식사하게 되면 고학번은 고학번끼리, 저학번은 저학번끼리 앉게 되는 법인데... 물론 100% 그렇게 앉으라는 법은 없고 보통 제약 없이 자유롭게 자리를 선택하게 되면 집단무의식적으로 다들 그렇게 앉게 되잖아요? 그렇기에 저도 자리 배치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 V라는 색히가 저를 신경써준답시고, S 옆에 날름 가서 앉아버린 겁니다!! 4인용 식탁에서요!! 그리고는 나름대로 잘하지 않았느냐는 눈치를 보내는데... 젓가락을 정수리에 꽂아주려다가 참았습니다. 일전에 V가 눈치 없이 행동하다가 Y랑 제가 가까이 앉게 되는 걸 방해한 적이 있어서 저에게 엄청 구박받은 적이 있거든요. 그러니 나름대로 반성해서 신경써준 녀석을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저 말하지 않은 제가 죄죠. 비밀연애더라도 V한테는 말했어야 했는데,... 09학번 이상에게 들키는 것만 신경 쓴 터라 11학번에게 알리는 건 전혀 고려치 않은 게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ㅜㅜ
다행히 S는 별로 신경 안 쓰는 눈치더군요. 어차피 비밀연애인데다 데이트가 아니라 11학번들이랑 교제하는 자리였으니까요. 게다가 저랑 S가 마주보는 구도였고요.
어찌됐든 저에게는 엄청 불편한 자리였습니다. S는 Y랑, 저는 V랑 따로 얘기할 생각이었는데 자리가 좁아서 따로따로 얘기하기에도 어색할뿐더러, 자리도 저랑 V가 대각선, S랑 Y가 대각선이어서 결국 공통화제로 얘기하는 수밖에 없더군요. 이 모든 게 다 V 녀석 때문이니 이런 제기랄;;;;
특히나 바로 옆자리에서 Y 어깨나 팔꿈치가 살짝살짝 부딪히는데 어찌나 신경쓰이던지. ㅡㅡ;; 특히 빌어먹을 지하철에서 같이 귀가할 때 그랬던 것처럼, Y가 저한테 얘기할 때 Y의 숨소리 같은 게 그대로 훅훅 불어 닥치는 게 제일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얼굴 솜털이 찌릿거리고 땀이 조금씩 맺히는 게 느껴지는데 ㅜㅜ
게다가 얘기하는 것도 제기랄, 어떻게 다 불편해! 얘기하던 도중에 시간표 얘기가 나와서 각자 같이 듣는 수업이 있나 알아봤거든요? 근데 저랑 Y랑 오늘 같이 들었던 게 언급되면서 Y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수업 겹치는 사람이 거의 없어갖고 저랑 같이 듣게 되니까 진짜 반가웠는데, 제가 옆자리에 안 앉고 뒷자리 멀리서 휙 앉아버리니까 같이 듣는 의미가 없다고. 다음에는 같이 앉자고 뭐라뭐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그래! 다음에는 옆자리에 앉아주마!' 해야 하나? 코앞에 S가 있는데? 아니, S는 Y랑 친하기도 하고 속도 깊은 아이니까 그런 거 일일이 따지지는 않을 거야. 제기랄. 하지만 여자친구 앞에서 다른 이성친구랑 같이 앉겠다고 대답하는 것 자체가 여자친구의 도량과 상관없이 무신경한 태도 아닌가? 빌어먹을. 자리도 불편해죽겠는데 하필이면 나오는 화제도 뭐 이 따위로 나오나? 진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는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뭐 이런 헛소리를 혼자서 속으로 지껄이고 있었는데
다행히 삐질삐질 땀만 흘리던 와중에 없는 예능감을 최대한 발휘하여, 저는 11학번들을 강하게 독립시켜 키우는 주의라고 개드립을 쳤지요. -_-;; 뭐 그걸로 유야무야 넘어가나 싶었는데, S가 "ㅋㅋㅋ 그래두 11학번인데 10학번이 옆에서 금이야 옥이야 돌봐줘야지~" 하고 말하더군요. -_-;
이보시오, S 양반. 나는 지금 당신에 대한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건만, 당신은 어째 나를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악수만을 둔단 말입니까. ㅜㅜ 동맹이 저글링 붙였더니 그 위로 시즈탱크 포화 쏟는 짓 하지 말란 말이얏!!
....그래도 다 먹고 제가 계산하겠다고 갔는데, 제가 제 메뉴랑 V 메뉴 말하니까 바로 후다닥 끼어들어서 잽싸게 자기 꺼랑 Y 꺼를 계산하더군요. 제가 '-ㅅ-‘ 이런 표정을 지으니까 혀만 낼름 하고 가게 밖으로 휙 튀어나감.;; 뭐, 겉으로만 저런 표정 지었지, 속으로는 S가 분담해줘서 엄청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 S랑 데이트 하느라 자원을 많이 소모했거든요. ㅜㅜ
아무튼 그래도 S가 참 배려심이 많구나. ㅜㅜ 이런 생각을 하면서 Y랑 V 수업 들어가는 거 바래다주고 S랑 같이 동아리방으로 이동하는데, S가 말하더군요. 저랑 Y랑 대화할 때 너무 제가 Y 의식하는 게 눈에 보인다고. ㅡㅡ;; 눈앞에 여자친구가 있으니까 신경써주는 건 고맙긴 한데 11학번들은 10학번들이 그렇게 행동하면 어색해하고 낯설어하니까 그냥 자기 신경쓰지 말고 편안하게 대하라고... 평소라면 '오 S 쿨함. ㅇㅇ 굳’ 했을 텐데, 지금 그럴 때가 아닌데 말입니다?
이건 뭐 남의 속도 모른다고 비난할 수 없고... 정보의 비대칭성이 정말 상황을 엿같이 만든다는 걸 진짜 절절히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아무튼 뭔가 굉장히 많이 허탈하고 기분이 엿같고 그렇습니다. 젠장... 정말 그렇게 다짐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초연하게 행동하기가 힘드네요. 마치 이건 그냥 작고 무력한 생명체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바퀴벌레를 맨손으로 눌러죽이라 하면 끔찍한 기분이 드는 것처럼, 극복할 수 없는 심리적인 문제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젠장. 어렵습니다. 그냥 S한테 털어놓고 도움을 구할까요?? 저랑 S랑 둘 다 21살밖에 안 되기는 하는데, 저는 몰라도 S는 그 정도로 속이 얕은 아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어퍼컷 한 대는 날리더라도 용서해주지 않을까요? 아니면, 여자애들은 다른 건 다 참아도 이런 문제만큼은 참을 수 없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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