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으면서도 잘 팔리는 글을 쓰는 것. 모든 작가님들의 꿈일 겁니다. 많은 작가님들이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서 지금도 노력하고 계시죠. 하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글을 쓰는 목적에서 그런 부차적인 것들이 아닌 본질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작가님들은 소설을 ‘왜’ 쓰십니까? 어떤 분들은 전업작가로서 생계를 위해 통조림을 당하며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딘가. 내가 소설을 쓰는지 소설이 날 쓰는지 모르겠다. 검은건 글씨요 흰 건 내가 채워야 할 여백이로다.’하며 정신줄을 놓고 자판기를 두드리실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재미있는 소설을 쓰겠다며 재미를 추구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소설을 쓰셨습니까? 처음엔 ‘무언가’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소설을 쓰지 않으셨나요?
소설은 문학의 한 갈래로서 작가의 의도를 이야기, 스토리텔링을 통해 전달합니다. 운수 좋은 날은 일제 강점기 시절 하층민의 애환을, 허생전은 조선 후기의 사회, 경제적인 문제들과 그에 대한 대안을, 삼국지는 전란의 시대를 살았던 장수들의 욕망, 의리 등등을 보이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소설을 통해 작가가 보이고자 하는건 무엇이든 가능합니다. 로맨스 소설처럼 사랑과 배신을 그릴 수도 있고, SF소설처럼 미래 세상을 그릴 수도 있으며 스포츠 소설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팀이 현실에서는 못하는 우승과 성공을 그려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판타지 소설은 이영도 씨의 드래곤 라자입니다. 예전에 논술이 강조될 때 교재에도 등장했죠? 나는 단수가 아니다. 또 작품 전반적으로 다른 종족들을 자기들처럼 물들이는 ‘인간’을 통해서 작가의 생각과 의도를 소설에 담아냈습니다.
또 좋아하는 소설로는 휘긴경의 월야환담 광월야가 있네요. 전 이 작품에서 한세건의 자기파멸적인 광기가 정말 좋습니다. 처음 봤을 때는 이 미친놈(욕이 아닙니다!)의 광기에 전율마저 느꼈을 정도죠.
최근에 본 작품으로는 글라딘 님의 더스트. 아포칼립스 세계관에서 인간과 괴물의 중간에 선 주인공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인간성, 윤리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셨습니다. 조아라에서 연재한 전작(제목이 기억 안 나네요)에서는 반신으로서의 주인공의 고뇌를 그리기도 하셨죠.
테니스의 신도 정말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재능 없던 선수의 독기, 인내. 소설 내에서는 재미가 있다 없다를 넘어선 그냥 인생이라고 표현하였죠. 선수단의 순위 결정전에서 라이벌과 게임 도중에 기절하는 장면은 감동마저 줄 정도였습니다.
뭔가 좀 많아지긴 했지만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들 아시겠죠? 작가가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야기가 명확하게 소설에 드러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반대로 작가의 의도가 전혀 짐작가지 않는 소설을 꼽아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비뢰도. 몇 권까지 나왔나 모르겠네요. 예전엔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진짜에요. 한 16권 까진가? 1부인가 2부까지는 재밌게 봤었죠. 17권인가 18권에서 갑자기 주인공이 여장하고 나오더니 어떤 섬에서 하루도 안 되는 내용으로 1권을 채워버리더군요. 한 권의 내용이 소설 내의 하루조차 안 돼요. 뭐 엄청난 전투나 심리 묘사, 전개상의 중요 포인트를 묘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놀러다니는 내용으로요! 전 거기서 손을 놨습니다.
두 번째로 달빛 조각사. 이 녀석도 십 몇 권까지는 봤을 거예요. 말도 안 되는 개그는 제쳐두고라도 하루 종일 사냥, 노가다, 퀘스트, 남들 등골 빼서 대형 공사, 가끔식 현실에서 여자들의 들이대기, 돈을 노리는 줄 아는 둔감함! 이게 다에요. 에픽 퀘스트는 끝이 보이지도 않고 흑막처럼 보이는 박사는 뭘 꾸미는지 안 꾸미는지도 모르겠고 주인공은 아무리 돈에 쪼들려 살았더라도 머리 한 구석이 진짜 훼까닥 해버렸는지 여자가 들이대는 상황에서도 성욕이라곤 1mg도 보이질 않고. 대략 40권 후반까지 나온것 같은데 안 봐도 계속 노가다, 퀘스트, 공사나 하는 내용일걸요?
세 번째는 며칠 전 정담에서 뜨거웠던 작품입니다. 환생좌. 재밌다고 해서 보긴 봤는데... 으음... 제가 생각하는 이 작품의 문제는 긴장감이 없다는 겁니다. 최근에는 80명쯤 되는 로드 패거리를 그냥 혼자 뭉게버리더군요. 요즘엔 삼관에 도전하는데 1달에 될지 안될지 모른다 뭐 그런 밑밥을 깔지만 보나마나 다 깰 겁니다. 여기 주인공에게는 뭔가 사명감을 느낄 수도 없고, 사랑이나 의리와는 천만광년 떨어져 있으며 그렇다고 뭔가 처절하거나 숨막히는 전투를 그려내는 것도 아닙니다. 작가가 독자들에게 뭘 보여주고 싶은지 전혀 모르겠어요. 요정이 어떤 참신한 통수로 사람들을 괴롭힐까에 대한 흥미로 보는 작품입니다.
뭐 엄청난 의도를 가지고 쓰라는 뜻이 아닙니다. 위에 쓴대로 우정, 사랑을 보여줘도 좋고 각종 모험들도 좋으며 요즘 코드인 회귀 후 성공하는 인물을 묘사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에는 정도란 게 있습니다. 보여주고 싶은 것을 다 보여줬다 싶으면 끝맺음을 해야지 20권, 30권... 보여주고 싶은 것에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여러 요소들을 막 버무린 짬뽕도 문제지만 끝내지 않고 질질 끄는 소설도 시청률 나온다고 계속 연장 편성하는 드라마만큼이나 문제가 많습니다.
차라리 원피스, 드래곤볼 같은 만화라면 그나마 낫습니다. 별다른 작가의 의도 없이도, 스토리가 산으로 가더라도 그림 특유의 볼거리가 있으니까요. 하지만 소설로 장편에 걸쳐서 긴박한 전투씬을 쓰기는 불가능하고(삼국지같은 볼륨의 소설이라면 또 모르겠네요) 그림같은 볼거리가 없는 글의 특성상 계속되는 내용에는 질리기 마련입니다.
디다트 님의 유적포식자가 이런 경우였습니다. 계속 사냥하고, 요리하고, 먹고, 문닫고, 수련하고. 일구이생 때는 정말 재밌게 봤는데 유적 포식자는 어느 순간부터 필체가 건조하다는 느낌이 들고 내용이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참 성실하고 믿을 수 있는 작가분인데 다음 작품부터는 거르는 중입니다.
잘 쓰다가 내용이 망가지거나 연중하는 분들의 문제도 동일합니다. ‘독자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해줄까’가 아니라 ‘어? 이 소재 재밌겠는데?’하고 소재만으로 시작을 하니 처음엔 참신하고 재밌다가도 3권, 4권으로 점점 진행하면서 무엇을 써야할지 스토리가 막히게 되는 것이죠.
저는 뭐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많은 소설을 써 본 작가도 아니며 그냥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장르 문학의 본질은 대리 만족이다, 재미일 뿐이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굉장히 속상하네요. 장르문학, 대중문학은 작가의 이야기를 더 설득력있게, 재미있게, 참신하게 풀어내기 위해 현실에 없는 소재들을 이용하는 것뿐이지 순수문학에 비해 열등한 장르가 아닙니다. 장르문학도 ‘문학’이라는 점을 모두 다시 한 번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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