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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호정담

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외출

작성자
Lv.1 [탈퇴계정]
작성
12.12.10 09:03
조회
1,765

그그저께, 집에서 키우는 개에게 비스켓을 주다가 펄쩍펄쩍 뛰는 녀석의 앞발에 부딪혀 안경테가 휘어져 버렸었다.
시야가 온통 어질어질하였지만 안경 수선은 잠시 미루기로 했다.
어차피 하루나 이틀 뒤면 두어 가지 용건을 처리하기 위해 시내로 나가 봐야 하니까 안경 수선도 그때 함께 해치울 생각이었다.

그렇게 별렀으면서도 막상 당일이 되자 미적미적거리다가 그만 출발이 늦어 버렸다.
그냥 양치만 할까 하다가 그래도 기분이 그렇지 않아 샤워까지 마쳤더니 이미 오후 세 시 반이 넘어 있었다.
그 동안 쭈욱 반바지로 버텨 오다가 오늘 처음 긴 바지를 꺼내 입고 집을 나섰다.

쭈삣거리면서 안경점에 들어섰다.
'나도 참 염치가 없지....'
'이번 한 번만 더 여기서 수선 서비스를 받고 다음 번에는 꼭 돈 주고 새 안경테를 하나 팔아 줘야지' 하면서 이 집을 찾아오는 일이 벌써 대여섯 번은 넘은 것 같다.
늘상 싱글싱글 웃던 사람 좋은 주인남자는 안 보이고 아가씨 한 명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다.
"여기서 하신 안경 맞아요?"
어째 아가씨 얼굴이 좀 낯설다 했더니 그 새 사람이 바뀐 모양이었다.
전에 있던 아가씨보다 더 동글동글하니 인심 좋게 생긴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 오히려 더 깐깐하게 군다.
'원래 이 집 사람들은 사장이고 점원이고 물건은 안 팔아 주면서 허구한 날 무료 서비스만 받으러 찾아오는 내가 황송해질 정도로 깍듯이 대접을 하면서도 푸근하게 대해 주곤 했는데.... '

아가씨는 내 안경테가 너무 낡아 수선 중에 자칫 부러져 버릴 위험이 있으니 각오하라며 잔뜩 겁을 주고 나서야 수리에 들어갔다.
고맙게도 안경테는 부러지지 않았다.
아가씨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안경점을 나섰다.
신호등을 건너고, 신포동 윤락가와 대우백화점을 차례로 지나친 다음, 어시장 도로변 약국에 들어가 물파스 한 통을 샀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내게 있어 물파스의 용도는 두통 퇴치에 있다.
걸핏하면 뒷목이 뻑뻑해지고, 그렇게 뻑뻑한 기운이 또 걸핏하면 두골이 욱신거리는 증세로 넘어가곤 하는데 물파스를 발라 주면 그런 메커니즘을 더러 중도 차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음 목적지는 우체국이다.
신춘문예 응모작이라고, 신문사에서 요구하는 대로 붉은 글씨로 적어넣은 원고 봉투를 등기 담당 아가씨에게 내놓으면서 별 수 없이 낯이 뜨거워진다.
이것이 작가 지망생의 비애다.
신문사나 잡지사에 글을 보내기 위해 우체국 창구 앞에 한번 서는 일이 곤혹스럽기 그지없는 것이다.
똑같이 자신이 걷고자 하는 길에 아직 궤도 진입조차 못하여 본격적인 삶을 유예당한 상태라 해도 작가 지망생에게는 다른 행정고시나 사법고시 지망생들은 갖지 않은 특유의 허황된 분위기가 배여 있으리라 짐작된다.
사십이 넘은 멀쩡한 남자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레이스 손수건을 꺼내는, 게다가 그 레이스 손수건이 그의 자발적인 선택임을 인정해야 하는 그런 상황에서나 느껴질 법한 그런 류의 민망함이랄까....

우체국에서 은행으로 이동한다.
현금인출기에서 6만 원을 뽑는다.
통장 잔고가 얼마인지는 겁이 나서 일부러 확인하지 않는다.
오늘은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다.
은행을 나와, 이 날의 마지막 용무인 도서 대출을 위해 도서관으로 향한다.
동절기라 대출실 폐문 시간이 한 시간 앞당겨졌을 가능성이 높으니 서둘러야 한다.
그렇게 발걸음을 서두르면서도 콧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요즘 자주 부르는 양희은의 '느티나무'를 부른다.
'내 목청이 한창 좋던 젊은 시절에 이 노래가 나왔으면 좀 좋아.'
이제 이런 식으로 유유자적할 수 있는 나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통장 잔액이 바닥이 날 때가 다가오니 조만간 다시 사출공장이나 다른 어디 새로운 일자리를 알아 봐야 하는 것이다.
나이가 늘수록 구할 수 있는 일자리가 점점 줄어든다.
하지만 내가 아직 한번도 가져 보지 않은 아파트 경비원 직종도 있고, 또 실버 취업인지 뭔지 하는, 정부의 노인정책의 일환으로 제공되는 일자리에도 몇 년 뒤면 연령 해당이 되니 별로 걱정은 되지 않는다.
어떻게든 먹고 살 길은 있을 것이다.

전번에 빌렸던 책들을 도서관에 반납하고 새로운 책 네 권을 빌린다.
오늘도 '다빈치 코드'는 빌리지 못했다.
그 소설을 읽으려는 사람들이 밀려 있어, 한 번에 두 명까지만 받는 대출 예약 명단에도 끼이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항상 일정하다.
상남 복개천을 거쳐, 불종거리를 거쳐, 옛 '시민극장' 자리로 이어지는 샛골목으로 접어든다.
도서관에서 돌아올 적마다 들르던 생과일 쥬스 가게를 오늘은 그냥 지나친다.
부림시장을 거치고, 지하 상가를 거치고, 녹지 공원을 거치고, 마산 박물관을 거치고, 아파트 단지를 통과한다.
조금 지친다.
집까지 거진 다 와서 갑작스런 충동으로 수퍼에 들어가 아이스크림 한 통을 산다.
천 원짜리 쥬스 살 돈은 아껴 놓고 더 비싼 아이스크림을 산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다 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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