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고건 전 총리는 자신이 대통령권한대행을 하던 지난 4월 북한 용천 폭발사고가 났을 때 한반도 정세가 걱정이 돼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만약 김정일 정권이 갑자기 붕괴돼 북한에 권력 공백 상태가 일어났을 때 중국이 개입해 북한에 ‘친중(親中) 괴뢰정권’이 들어설지도 모른다는 판단과 함께 그런 상황에서 한국이 북한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국의 북한지역 장악 가능성이 가상 시나리오가 아니라 국정의 최고책임자가 잠 못 이루며 걱정한 현실문제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일반국민들도 쉽게 잠들기 어려울 것이다. 북한에 돌발사태가 발생해 정권이 무너질 경우 통일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는 현실 국제 정치에선 통용되지 않는 우리의 막연한 희망일 뿐이다.
북한에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한국이 자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국제법상의 권한은 없다. 북한 주민과 땅이 대한민국 국민과 영토라는 우리 헌법 규정은 국내법적인 효력을 가질 뿐이다.
북한이 급변할 때 한국이 주도적 역할을 하려면 국제정치에서 현실적인 영향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북한 정권이 급작스럽게 붕괴할 경우 한반도에 직·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할 미·일·중·러 4국 중 한국의 북한 개입을 지지해줄 나라가 한 곳이라도 있을지 의문인 것이 지금의 형편이다.
동독정권 붕괴 후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 통일에 반대하고 소련이 미적거릴 때 미국은 확고하게 서독의 통일정책을 지지했고 이것이 독일통일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이날을 위해 서독은 2차대전 후 40여년 동안 초지일관 미국의 신뢰를 얻기 위해 애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독일 통일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한반도의 결정적 순간이 통일로 연결되기는 고사하고 4대국의 치열한 이해 각축장이 되어 한반도 전체가 위기의 소용돌이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은 결코 가상 시나리오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미 간의 상호 신뢰가 동요하고 한·미 동맹의 내일에 확신이 서지 않는 지금 대일(對日)·대중(對中)관계 등 한반도 주변의 4강 외교 전체가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심상치 않은 일이다. 현 정권 핵심부가 이런 문제로 잠 못 이루는 고민을 하고 있는지부터가 의심스럽기 때문에 더더욱 걱정스러운 것이다.
고건 前총리가 털어놓은 '권한대행 비화'
[조선일보 2004-08-27 05:21]
"北 붕괴후 親中 괴뢰정권 설까 용천 사고때 한숨도 못자"
퇴임직전 盧대통령이 각료 제청 직접 부탁
만찬서 거절 어려워 하룻밤 시간달라 말해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 고건(高建) 전 총리는 25일 퇴임 후 처음으로 기자를 만나 “대통령권한을 대행하던 지난 4월 22일 북한의 용천폭발사고가 났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한반도 정세가 걱정돼 그날 한잠도 이루지 못했다”며 대통령 권한대행 시절의 비화를 털어놓았다.
요즘 서울 시내에 사무실을 얻어놓고 독서로 소일하는 고 전 총리는 “만약 용천폭발사고가 김정일(金正日)과 관계가 있고 김 정권이 갑자기 붕괴될 경우 중국이 개입해 북한에 친중(親中) 괴뢰정권이 들어설지 모른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고 전 총리는 “현 북한 정권이 갑자기 붕괴돼 권력 공백의 상태가 될 때 우리가 북측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이 전혀 없다”며 “용천폭발사고 다음날 정세현(丁世鉉) 통일부장관에게 이에 대해 질문을 하니 정부 차원에서 그런 대응전략이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고 전 총리는 중국이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사를 자신의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움직임과 관련해 “향후 남북 통일시대를 맞아 우리 동포가 많이 거주하고 있는 만주(滿洲)의 영토 귀속 문제가 제기될 때를 대비하겠다는 방어적 측면의 해석과 다른 하나는 공세적인 해석이 있을 수 있다”며 “공세적 측면은 향후 북한이 붕괴되거나 통일되는 상황에서 중국이 북한 영토에 대해 종주권을 가지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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