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강호정담

우리 모두 웃어봐요! 우리들의 이야기로.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작성자
Lv.20 jangnoru
작성
04.04.09 10:02
조회
225

세상살이가 원래 그러한 것이겠지만... 쉬이 분노하거나 무척도 가볍게 웃음만

짓기는 또 그렇지 않겠습니까?

안도현 님의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글인데...

잠시 쉬어도 갈겸... 분주와 경망의 어느 어귀쯤에서 잠겨보는 생각도의미있지

않을까 싶어 퍼 올립니다.

"세상을 보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1980년대 시인들이 망원경으로 세상을 보았다면, 1990년대 시인들은 현미경으로 본다는 사실을 일단 인정한다고 하자. 그러나 모든 것을 현미경으로만 보려고 하는 1990년대적 세상 읽기 방식이 나를 슬프게 한다. 거기서 싹트는 새로운 상투성이 나를 슬프게 한다. 망원경과 현미경을 번갈아가며 보자. 때로는 그따위 것들 없이,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자. 광장이 지겹다고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어서야 쓰겠는가.

시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런데 시로써 말할 수 있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를 더욱 슬프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 한 줄 없이 자기 뱃속에 든 것을 줄줄이 쏟아놓기만 하는 시는 나를 슬프게 한다. 얼마나 말을 하고 싶었으면 시라는 형식을 빌려 일방적인 고백을 할까 싶기도 하지만, 시의 옷을 입고 이리저리 시달리는 그 언어는 또 얼마나 몸이 아플 것인가. 말을 하고 싶어도 참을 줄 알고, 노래를 시켜도 한 번쯤은 뒤로 뺄 줄 아는 자가 시인일진대, 어두운 노래방에서 혼자만 마이크를 잡고 있는 시인은 나를 슬프게 한다.

또한 시인이란, 감정의 물결을 슬기롭게 조절하면서 헤쳐 나갈 줄 알아야 할 터다. 시쓰기란 깊은 강물 위의 노젓기와 같아서 감정을 밀었다가 당기고, 당겼다가 미는데서 그 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데,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하고 한자리에서만 뱅뱅 도는 시는 나를 슬프게 한다. 앞으로 나아가야 뒤가 보이고, 뒤로 물러서야 앞이 보이는 법이 아니겠는가. 술을 한 잔도 하지 않고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이는 시가 있다. 아침에 한 말을 저녁에 또 하고, 3년 전에 한 말을 5년 후에 또 되풀이하는 시는 나를 슬프게 한다. 수많은 ‘역전앞’과 ‘고목나무’와 ‘서해바다’와 ‘풀장’의 동어반복이 나를 슬프게 한다.

밤톨만한 돌멩이에다가 설탕물을 바른 시도 나를 슬프게 한다.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 소중하고 고귀한 게 사랑이라는 것을 그 누가 모르랴 만은, 암컷과 수컷의 달콤한 속삭임만 옮겨 적는 대필자가 되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모든 암수가 밥을 먹고 똥을 싼 뒤에 짝짓기를 한다는 사실은 왜 관심을 두지 않는가. 때로 사랑이 독약이라는 것, 희망도 아편이라는 것을 왜 모르는가. 알면서도 왜 모르는 척하는가. 시에서 구체성은 감동의 원천이고, 삶의 생생한 근거다. 구체성의 습지에 몸을 비벼댄 흔적이 없는 시는 나를 슬프게 한다. 미당의 시에 나오는, 옛날의 ‘누이의 손톱’보다 나는 말년의 ‘할망구의 발톱’이 더 좋은 것이다. 누이는 재기 넘치는 허구이고 할망구는 깊어진 현실이기 때문이다.

나를 슬프게 하는 시들을 앞으로도 내가 더 읽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생각하는 일은 나를 슬프게 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내가 이제까지 낸 시집은 나를 슬프게 한다. 너무 많은 언어를 너무 쉽게 다루었구나. 시집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나무들한테 지은 죄 크구나. 모든 후회는 또 다른 후회를 낳는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오늘 다시 뉘우친다. 뉘우침은 그 내용이 무엇이든지 간에 순도 백퍼센트여야 한다. 그럼에도 내 뉘우침은 뼈가 아프도록 간절하지도 않고, 다만 묽고 싱거운 것 같구나."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강호정담 게시판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20971 2004년 4월 17일자 빌보드 싱글 TOP 40 +3 Lv.11 백적(白迹) 04.04.09 185
20970 처음으로 스타크래프트가 싫었다. 한번 읽어주세요~(자작... +4 Lv.1 마징가제투 04.04.09 300
20969 [삽] 선관위, 포털 상징색.로고 "특정정당 연상" 경고 + @ +3 Lv.1 [탈퇴계정] 04.04.09 350
20968 지금 몇시죠??????? +3 미소창고㉿ 04.04.09 265
20967 꼬셔라꼬셔라 +1 미소창고㉿ 04.04.09 495
20966 아! 나쁜맘인줄 알면서도.. +6 Lv.62 횡소천군 04.04.09 346
»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Lv.20 jangnoru 04.04.09 226
20964 아래, 첫경험 - 노래 해설 및 가수 이름. +6 리징이상훈 04.04.09 432
20963 셜백령 작가 추몽인의 어느날? +5 리징이상훈 04.04.09 273
20962 펌)) 초등생부터 대학.. 10여년 두딸 성추행 +15 Lv.1 미우 04.04.09 523
20961 [퍼옴] [대한노인회]노인집단폭행 +5 Lv.1 미우 04.04.09 491
20960 아함~~ 졸려요... +1 Lv.8 느루 04.04.09 134
20959 아 웜이다! +4 Lv.1 행운 04.04.09 256
20958 참으로 황당한 목사님들..... +7 Lv.1 묘왕동주 04.04.09 501
20957 뜨거운 논쟁+_+!!(남자분들 리플 좀~!) +17 Lv.1 제마 04.04.09 505
20956 황홀한 첫경험 +19 리징이상훈 04.04.08 607
20955 오~ 배경이 바겼네요.. +1 Lv.1 04.04.08 170
20954 아홉살 인생 +2 Lv.1 하얀여우 04.04.08 255
20953 토요일날 이사를 갑니다 +2 Lv.23 바둑 04.04.08 193
20952 나는 원합니다. +6 Lv.15 千金笑묵혼 04.04.08 232
20951 녹정기2000이 재밌나요 아님 양조위의 녹정기가 더 재밌... +3 Lv.18 永世第一尊 04.04.08 347
20950 경혼기 지존록에 대한 질문.. +3 Lv.1 풍류남아 04.04.08 306
20949 쓰레기 분리수거 D-7..... +5 Lv.1 [탈퇴계정] 04.04.08 190
20948 안녕하십니까.처음글을남김니다. +4 Lv.1 동성무림 04.04.08 402
20947 오늘 인생의 갈림길에서. +3 Lv.17 억우 04.04.08 180
20946 난 아직 사라이따..쿨럭..ㅠㅠ +3 Lv.1 술퍼교교주 04.04.08 249
20945 예전 임준욱님의 인터뷰중에요. +11 Lv.5 용호(龍胡) 04.04.08 761
20944 은은한 달빛 +2 리징이상훈 04.04.08 318
20943 [펌]양산형 판타지 종합 감상편 -시- +4 Lv.56 日越 04.04.08 405
20942 혈담- 오늘의헛소리 (2) +2 Lv.56 치우천왕 04.04.08 214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genre @title
> @subject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