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줄 알았던 동호회가 아직 남아있네요...-_-;;;
한국사 동호회였는데 태조 왕건이 한창 잘 나갔을 때 작성한 글이 있어 옮겨 보았습니다...^^;
딱딱한 글이라도 양해를...-_-;;;
견훤이 신라의 경애왕을 죽이고도 물러간 이유는...?
1. 견훤은 농민 출신으로 진성여왕 때 농민반란을 진압할 목적으로 군역에 뽑혔
는데 그 재주가 뛰어나 하급군관으로 등용되어 공을 세운 뒤, 군인으로 출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신라 장군 아자개의 아들이라는 설과 다른 이야기지요...)
그 후, 진성여왕 6년 무진주(관주)에서 반기를 들어 완산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
를 세우게 되는데 이때 그 지지세력 또한 농민이었고 결국 이 이야기는 견훤 역시
무지한 농민이었기 때문에 그의 야심 또한 신라 못지 않은 떵떵거림에 있었을 뿐,
삼국통일과 같은 대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2. 1번과 같은 이야기를 지지하는 증거는 또 있는데 견훤이 경애왕을 살해할 때,
그가 경순왕 김부를 앉히면서 가져간 물건이 신라의 진보와 제기들이었다는 것입
니다. 신라는 1000년간을 이어져 내려오는 정통성을 가진 나라로서 그들이 보관
하고 있는 진보와 제기들 또한 그 유래와 귀함이 천하에 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견훤이 이것들을 가져간 것은 역시 자신의 힘을 보여주기 위함도 있지만 이것들을
가져감으로서 자신이 세운 나라도 신라 못지 않은 나라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죠...
3. 견훤이 백제 의자왕의 원한을 갚겠다고 하며 일어나 나라를 세웠지만 그 자신은
신라인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합니다.. 신라인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은 앞서 이야기한 1,2번도 그 근거가 되겠지만 가장 큰 근거로 역시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 김부를 즉위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라는 내물왕 이후, 김씨가 왕을 하고 박씨가 왕비족이었습니다. 이
른바 권력투쟁에서 석씨가 밀려난 것이죠. 그 이후, 김씨가 두 갈래로 갈려져 무열
왕 이후 혜공왕까지는 무열왕계가 왕권을 유지하다가 진골귀족들간의 다툼이 일어
나며 내물왕 10세손인 선덕왕이 혜공왕을 시해하고 다시 내물왕계가 왕권을 잡게
되는데 무열왕계인 김헌창의 난이 실패하게 됨에 따라 무열왕계는 그 씨가 마르게
되고 내물왕계끼리의 정치적 실력과 무장력의 우열로 왕권을 쟁탈하는 시대가 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데 정치적 실력과 무장력의 우열로 왕권을
쟁탈하게 되면서 박씨도 이 쟁투에 참여하게 되고 결국 효공왕 다음으로 박씨인
신덕왕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자고로 왕은 내물왕 이후, 김씨들의 자리로서
박씨인 신덕왕이 왕위에 오르자 정통성이 없다는 이유로 귀족들의 반발을 사게
되고 쿠데타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원인이 되니 이것은 신라인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지는 부분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리하여 견훤은 자신이 신라의 정통성을
돌려 놓겠다는 생각으로 박씨인 경애왕을 죽이고 김씨인 경순왕을 왕에 앉힌 것이
며 신라가 아무리 힘이 없었다고 해도 왕이 죽었는데 가만히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3대에 걸친 박씨 정권이 신라인들에게 그리 신망을 얻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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