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동생 얘기입니다. 남자고, 현재 고1이었나 2였나 합니다. 아마 고1일 거예요. 방금 전에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왔는데, 고민이 많은 것 같아서 도움을 주려 합니다만.... 오히려 제가 고민에 빠졌네요.
일단 걔는 공부를 잘합니다. 모의고사 계속 111 맞았고, 이과 중에서는 내신이 한 손에서 꼽힐 정도래요. 한 전교 5등 정도 하나봐요. 당연히 내신도 111 정도 하겠죠?
그런데, 정작 자기는 공부가 싫답니다. 공부를 잘 하는데, 정작 하기는 싫다는 것. 자기는 나중에 공부로 먹고 살고 싶지 않은데, 일단 그냥 해보는 거라고. 자기 꿈은 미술 쪽이라고.
그래서 제가 말했죠. 공부 열심히 해서 서울대 미대 가면 되잖냐, 하고.
그런데 그게 안되나 봅니다. 이태까지 계속 쌓아왔던 학업 스트레스가 지금 터진 것 같다고. 공부에 손이 안 간다고. 과연 자기가 이렇게 공부한 것이 쓸모가 있을지, 그런 것들에 대해 고민도 가고, 회의감도 느끼는 모양입니다. 그리고 대학 가지 않아도 되는 분야라고 말하더라고요.
그래서 꿈이 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 미술하는게 꿈이라더군요. 근데 제가 물어본 건 직업이 아니었죠. 다시 물어보니 잠시 고민하더라고요. 그러더니 말합니다.
행복하게 하고싶은 것 하면서 사는 것.
저 역시 항상 고민하던 문제였고, 그걸 실험적으로 해보던 중이라 여러 말을 해줬습니다. 행복하려다 더 불행해질 경우도 충분히 고려해라. 지금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미래에 행복에 더 가까운 것은 공부 쪽인 것 같다. 등등.
하지만 공부엔 싫증이 났데요. 자기가 공부를 왜 해야하는 지를 모르겠고, 그림으로 먹고 살기로 결정하면 공부는 다 무용지물이 된다고. 그리고 그걸 다 떠나서, 그냥 공부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저도 공감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솔직히 어느 특별한 학과가 아니면, 다 필요 없거든요. 특히 예체능은 다 쓰레기가 될 거고, 컴공같은 경우도 하다보면 다 알게 되는 거라 다 필요 없거든요. 친구 말로는 기공, 화공, 전공같은 것들도 그냥 잠깐 몰아치기 하면 된다고 하고. 쯧.
국어? 수학? 영어? 사회? 역사? 도덕? 한문? 과학? 뭣 하나 사회 생활에 도움 된 것이 없습니다. 국어 배워도 문학성은 없고, 말귀, 눈치는 변함이 없어요. 수학이야 초등학교 떄 외웠던 구구단만 주구장창. 아니어도 그나마 중학교 때 것까지. 영어는 미국인 앞에서 버벅버벅. 사회,역사,도덕,한문은 다 까먹었고, 도움은 쥐뿔. 과학은 가물가물. - 물론 과장이 섞인 사견입니다.
제가 말합니다....
동감이지만, 대학 간판이 없으면 좀 힘들어. 그리고 만약 다시 그림 말고 프로그래머 같은 게 되고싶으면 어떡해. 그러면 대학 간판이 엄청 중요해지는걸? 한국을 지배하는건 다 서연고야. 큰 회사 사장들만 봐도 거의 다가 서연고야.
대학 어디 나왔는지 회사에선 모르잖아요. - 라고 동생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씁쓸하게 말했죠.
그거 다 맞긴 맞아. 근데, 서연고 앞에 열린 회사 부스들은 뭐게. 걔네들은 왜 서연고 앞에만 부스를 열고 오라오라 하는 걸까? 그리고 왜 그렇게 취직하는 애들이 정당하게 간판 가리고 취직하는 애들보다 더 많을까? 물론 옛날 얘기일 수도 있지만, 내 때는 그랬어.
좀 충격 먹은 모양이더라고요. 그래도 웹툰 같은 데는 대학 안보고 그림만 보면서 하지 않느냐 그러더라고요.
아냐. 사람들은 같은 웹툰이면 더 똑똑한 애들이 그리는 웹툰을 더 좋아해. 그냥 왠지 더 그럴 듯 하거든. 그리고 나중엔 웹툰 시장이 더 넓어져서 프리랜서가 아니라 회사에 취직하는 식으로 변할 수도 있잖아? 그러면 원래 작가들은 몰라도 신인들은 다 실력이 비등비등해. 그러면 거기서 조금이라도 더 튀어나올 방법은? 대학이지. 대학 간판은, 성실함의 증명이거든. 아무리 거지같은 교육 과정이지만, 오히려 그걸 멍청하게 따른 놈들은 회사에서도 멍청히 따라줄 가능성이 더 높다는 거지.
그러면 고졸, 중졸? 눈에도 안 들어와. 그리고 조금만 더 지나면, 그림 실력이고 뭐고간에 그냥 서울대 미대, 이런 데 몰려가서 똑같이 부스 차리고 기다리고 있을 때가 올 지도 모른다는 거지.
그러면, 공부에 집중이 안 되는데 어떡해야 하냐고 묻더라고요.
부정적으로 보자면, 대학 간판이 네 얼굴이라고 생각해. 서울대 미대 나온 웹툰 작가가 지금 하나 있는 걸로 아는데, 그 위에 서울대 의대짜리 하나 뙇, 생겨봐. 잉여들이 얼마나 찬양하겠냐?
긍정적으로는, 그냥 예비 바닥 생성. 고졸/중졸의 바닥과 인서울 대졸의 바닥은 차원이 다르거든. 그리고 서울대 의대 같은 경우는 그 바닥이 오히려 웹툰 작가 천장 만큼 높지. 바닥에 떨어졌을 때나,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때도 그 깊이가 다르잖냐? 그리고 웹툰이야, 지금 말로 나중에 대학 가서 그려도 안 늦어. 뭐 급하다고 계속 그러냐.
뭐, 대충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 공부하면 돼.
정신이 멍-해 보이더라고요. 쯧, 사회 생활 안 해서 아직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물론 저도 사회 생활을 많이 해본 건 아니지만요....
그런 말 듣고 또 들어도 공부보다 미술 쪽으로 꼴리면요?
그러면 그림 한 번 그려보라 했더니, 노트 한 장 찢어와 뭔갈 열심히 그리더라고요. 그러더니, 순식간에 원피스 주인공을 그리더라고요. 이름이 뭐였는지는 까먹었는데, 그 고무고무 펀치 쓰는 그런 장면이었어요. 학원 조금만 다니면 완성 가까이 될 것 같았어요.
하지만 웹툰은 스토리도 생명. 스토리나 세계관 짠 거 있으면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문피아에서 읽은 책이 한두 권이 아니기에, 아마추어로서 대강 평가할 수는 있을 것 같았거든요.
보니까 현대레이드...? 물어보니까 나귀족에서 오마주를 따왔다고 했는데, 제가 따금히 말해줬죠.
멍청아, 웹툰 검색이라도 좀 해봐. 위키 보면 웹툰 사건사고 있거든? 그거라도 지금 보고 와봐.
사실 웹툰계는 엄청 치열합니다. 정확히는, 독자들끼리 엄청 치열합니다. 같은 게임 웹툰이기만 해도 서로 표절이라며 싸우고, 진짜 표절인 게 밝혀지면 그냥 어느날 웹툰이 사라지기도 하는.... 문피아에선 상상도 못할 일이죠. 굳이 비유하자면, 문피아에선 [플레이 더 월드] 말고는 모든 레이드/게임물이 죄다 표절이라며 지워질 정도랄까요. 물론 웹툰 작품이 소설 작품보다 적은 점도 있기는 합니다만, 어쨌든 좀 심한 편이죠.
동생은 후다닥 달려 와서는 파일을 바로 지워버리더라고요. 푸하하 웃었죠. 동생은 다른 파일을 보여주더라고요. 언뜻 보니 대여섯 개 정도 짜논 모양이더라고요.
전형적인 판타지 세계에서 무협 쪽 애들이 튀어나와 차원 간 전투? 그런 모양이더라고요. 그래서 무협쪽 그림체를 보여달라 했더니, 아직 못한다고.... 뭐, 학원 다니면 어떻게든 되겠죠.
판타지랑 무협이랑 싸우는 건 그림만 받쳐준다면 (정확히는 두 개의 그림체가 완벽하게 따로따로 숙련되서 두 명의 작가가 같이 그리는 것처럼 될 정도면) 성공할 것 같더라고요. 하지만 중요한건 그림이나 세계관 보다는 일단 스토리죠.
뒤져보다 하나 맘에 든 게 있었는데, 보니, 현대가 배경인데 유물들에게 이상한 힘이 부여되고, 그 유물들을 서로 빼앗기 위해 싸우는, 그런 거더라고요. 음, 좀 참신하군. 적어도 웹툰 계에서 겹칠 일은 없으려나. 세계관 말고 스토리도 그럭저럭.
소질 얘기는 대충 이 정도에서 끝내고. (설마 저 소재로 소설을 쓰실 생각이라면...;;)
어쨌든, 그림이랑 스토리는 대강 평작정도. 웹툰계에 몸담은 건 아니라 정확히는 몰르아요. 작업한 건 있냐고 물어봤더니, 아직 타블렛도 안샀다고 하더라고요. 부모님께 말도 안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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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걔는 정신이 거의 그림 쪽으로 넘어간 상태입니다. 공부를 해야 할 이유같은 것들을 여러 각도로 제시해도, 귀에 잘 안들어오는 상황입니다. 물론 억지로 학원에서 시킨다면, 하기는 하겠지만 회의감이 드는 모양입니다.
그림을 할 거면 확실히 정하고 빨리 해야하는데, 아직 부모님께 말도 잘 못합니다. 부모님이 걔한게 기대가 커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혼자서 그러는 건지는 몰라요. 그냥 부담스러운 것은 확실한 것 같네요.
혹시 걔한테 충고를 해주시겠다면, 어떻게 해주실 수 있을 것 같나요?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어릴 때부터 서로 돕고 돕던 사이라 신경이 많이 쓰이네요. 괜히 저 때문에 인생 무너지면.... 하는 걱정도 드네요.
어쩌면 걔가 지금 사춘기가 왔거나, 헛바람이 들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워낙 평소에도 저보다 더 어른 같은(...?) 모습을 보여줘서 생각하진 않았는데, 지금 되짚어 보니 그럴 수도 있겠더라고요. 이 가능성도 고려해 주셔서 조언을 던져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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