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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추상도가 높은 글, 그러나 문학성을 넘보는 수준의 복잡하고 정교한 쟝르 소설에 대한 비평이라면 분명 해당사항이 있는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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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1:
당신은 좋은 비평의 조건으로
1) 그럴듯 하고
2) 일관성 있으며
3) 수사(학)적으로 효율적일 것
을 들었다.
그런데, 페미니스트와 남성 우월주의자에게 세가지 모두가 성립할 경우 당신은 '논거'라는 것이 그 차이를 갈라 놓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답변 1:
상대적 우열을 가리기 위해서라면 2)와 3)에서는 같아도 1)에서는 차이가 나야 할 것이다. 1)은 얼마나 많은 양의 논거에 의해 얼마나 강하게 지지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날 것이다. 동일한 작품에 대한 전형적인 잘쓰여진 자유휴머니즘적 비평과 전형적인 잘쓰여진 페미니즘적 비평에서 후자가 더 낫다고 결론내리려면, 후자의 해석은 전자의 해석보다 많은 양의 논거에 의해 더 강하게 지지되어야 한다. '더 많은 양의 논거'는 '하나의 전체로서의 작품에 더 충실함'으로 대체될 수 있을 듯 하다. 작품을 구성하는 사실들 가운데 더 많은 것들을 설명해준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질문 2:
앞의 기준들은 '논리적'이고 '형식'에 관한 기준들이다. 다시 말해서 '메시지', '의미'에 대한 기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원주의'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위와 같은 기준에 뛰어나게 만족한다 하더라도 좋은 비평이라는 필요조건은 될지 모르나, 충분 조건이라고 말하긴 힘들 것 같다. 더 나아가 이와 같은 형식이나 논리들은 도구화 되버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진정으로 좋은 비평과 그렇지 않은 비평을 골라내는데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준다.
답변 2:
위 논의가 하나의 전체로서의 비평에 대한 것이 아니라 비평의 한 계기인 해석, 그 중에서도 더 그럴듯한 해석과 덜 그럴듯한 해석을 준별하는 기준에 대한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해석된 내용은 평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해석이 그럴듯 하지 않다면 그 해석을 가지고 비평의 평가적 계기로 넘어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질문 3:
'포괄적인 논거, 해석'이라는 기준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포괄적이기는 하지만 일관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작품이 '다면적인 자아를 담지하고' 있거나 더 나아가 작품을 감상하는 '비평가', '관람자'가 융해하기 힘든 다면적인 면을 담지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 기준은 그런 다면적인 자아와 정체성에 대한 억압으로 작용할 수 있는 위험의 소지가 있는 듯 하다.
답변 3:
사실은 위 기준들에 의거해도 논거들의 상대적 비중이나 신뢰도에 대한 의견불일치로 인해 제일 그럴듯한 해석을 가리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해석이 제일 그럴듯한 해석이라고 계속 주장할 수 있다. 아니,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고 이미 벌써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내 해석이 더 그럴듯 한 해석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을 아예 닫아놓은 것이 아니라면, 권력을 이용해 내 해석만을 교과서에 실리게 하지만 않는다면, 그렇게 해도 된다. 내가 그럴듯한 해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해석이 권력을 등에 업고 더 큰 표현의 자유를 누린다면 나는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당신 해석도 내 해석만큼이나 그럴듯하다는 다원주의적 관용은 포우즈로만 가능하다. 그것은 실제로 당신이 갖고 있는 표현의 형식적!!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 이상은 아니다.
나는 제일 그럴듯한 해석을 가리는 것이 내 자신이 해석자인 경우에도 무망한 경우들이 있을 수 있음을, 더 그럴듯한 해석과 덜 그럴듯한 해석의 차이가, 따지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작은 경우도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나는 또한 내가 덜 그럴듯한 해석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이들의 해석들을 이해하려고, 왜 그 해석들이 다른 이들에게는 내 해석보다 더 그럴듯하게 보이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즉 나의 해석(이론)은 다른 이들의 해석조차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그리고 가끔 더 그럴듯한 해석보다는 더 재미있는 해석에 몰두할 줄도 알아야 한다.
질문자의 첨언:
위의 질문 2는 다원주의적 접근의 한계에 대한 이야기이고, (왜냐하면, 사람들은 뭔가 특정 감수성과 가치관을 갖기 마련이기 때문에) 질문 3은 다원주의의 필요성에 가까운 논의였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한 가지 이상의 다면적인 자아를 갖기 마련이므로) 사람들 자신이 특정한 사회와 문화적 맥락 속에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볼 때, 다원주의가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점. 반면에, 그 특정한 사회와 문화적 맥락이라는 것 또한 한 가지로 획일화 되었다기 보다, 지배적인 것들의 투쟁의 장이 될, 또는 지배적인 헤게모니와 인간의 욕망 사이의 대립의 장으로서 다면적인 자아가 형성되고, 감수성이 형성되는 상황에서 예술작품이 소통되고 해석, 비평되는 것을 제대로 담아내기 위한 다원주의적 틀의 가능성. 다원주의적 해석을 가할 때, 이 두 가지 가능성과 한계를 인지하는 것이 다원주의라는 이름의 '덧없는 틀'을 잘 써볼 수 있는 최소한의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첨언에 대한 답변자의 코멘트:
내가 하고 싶고 해왔던 바로 그 얘기이다. 우리는 어떤 실현가능하고 바람직한 다원주의도 특정한 하나의 조직원리를 갖는 사회,즉 단원적 사회에서만 가능함을 인식해야 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다원들은 언제나 백화점이라는 단원 '안'의 스토어들이다. 다원적인 것은 언제나 최소한의 어떤 보편성과 공통성의 원 속에서의 다양성이다. 좋은 삶에 대한, 상정할 수 있는 모든 의견들의 평등한 표현과 그 의견에 상응하는 삶의 실천을 '모두' 혹은 '평등'하게 허용해준다는 의미에서의 다원주의 사회는 불가능하다. 다원주의는 언제나 특정한 사회에서의 제한된 다원주의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스스로를 자유다원민주주의 사회라고 칭하는 후기자본주의 사회는 유일하게 가능한 그런 다원주의 사회조차도! 아니다. 이 사회는 다원주의를 실질로서가 아니라 포우즈나 표현의 자유라는 형식으로만 갖고 있다. 그러므로 이 사회에서 우리 역시 그 '아님'을 직시하고 다원주의 사회를 만들어내는 투쟁의 이데올로기로서만 다원주의를 견지해야 한다. 어떻게 실질적인 다원주의 사회를 만들어낼까라는 고민에 의해 한정되지 않은, 표현의 자유 그 자체를 절대시하는 다원주의는 이 사회의 나쁜 단원성을 은폐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할 뿐이다. 내가 굳이 비평에서 더 그럴듯한 해석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 가능성의 인정과 실현이 그 고민이 비평에 가하는 한정의 내용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자본주의 사회의 나쁜 (다원주의를 불가능하게 하는) 단원성에 대한 더 그럴듯한 이론, 실질적으로 다원주의적인 사회의 구성원리에 대한 최소한의 더 그럴듯한 청사진은 예술작품의 진실과 가치를 더 잘 보게 하는, 더 그럴듯한 해석이론과 평가이론을 함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백화점과 다원주의에 대한 답변자의 보충:
다원주의에 대한 나의 정확한 유비는 '한 백화점 안에 있는 다양한 스토어들'이다. 나는 이 유비를 부정적인 뉘앙스로, 즉 다문화주의가 실제로는 말그대로 상호평등한 다양한 문화들(특수한 것들)의 공존보다는 특권적인 하나의 문화(보편적인 것)의 틀 속에서 그 틀에 의해 관용되고 제한되는 다양한 문화들을 가리키고 있음을 주장하기 위해 쓴다. 중립적인 뉘앙스를 준 채로 다원주의의 유비로 쓸 수도 있는데, 이 경우 백화점은 특권적인 단원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다원주의 사회도 최소한의 공통원리나 통일적인 사회형태를 가져야 한다고 할때의 그 공통원리나 통일적인 사회형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진정으로 다원주의적인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이 비유를 써서 표현하자면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백화점의 허울일 뿐 백화점은 아니다'가 될 것이다. 물론 계속해서 '백화점'을 허울뿐인 다원주의에 대한 비유어, 즉 다원들을 실체가 없게끔 자신에 종속시키고 있는 [자본의 논리로 소급되는] 실체적인 단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쓸 수도 있을 것이고 백화점의 이미지가 자본의 논리와 갖는 친근관계상 어쩌면 이 용법이 직관적으로 더 어울릴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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