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비적유성탄
작가 : 좌백
출판사 : 북이랑
좌백의 비적유성탄은 '결여된 인간'에 대한 글이다.
주인공 왕필(王必)은 삶의 목적, 의미, 정체성이 완전히 결여된 자이다. 그의 이름은 필(必), '반드시'라는 뜻이지만 이 이름 자체가 그의 역설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이 이름 자체가 포쾌를 통해 구입한 가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는 무공의 고수이며 자객이지만, 무림의 상례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사실 그는 무림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모른다. 의욕도, 이유도, 삶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 자로서 극한으로 치달은 자.
물론 그는 백치도, 노예도 아니다. 그에게는 천하제일의 무공과 그를 위해 배운 수많은 학문, 아내를 치료하기 위해 배워놓은 의술, 사리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의 목적을 갖지도, 가지려 하지도 않는다. 그의 삶은 우연적인 마주침들에 의해 이끌려 갈 뿐이다. 그가 삶에 대한 자각을 하는 대목들은 일상에서 느끼는 짜증과 분노, 사소한 자존심들이며, 그러한 자각을 거치면서도 그는 여전히 목적 없이 방황 할 뿐이다.
이러한 결여된 인간에 대한 묘사는 극중에서 다른 방식, 다른 인물들을 통해 반복된다. 자신들만의 이상향 건설을 위해 고군분투하다 부하들의 배신으로 자신이 이루어놓은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강중행, 대의에 동참해 스스로 도구라고 자임하나 그 대의를 추구하던 지도자를 잃고 텅 빈 인간이 되는 공손혜수, 항상 이방인으로서 맴돌다가 이용 당하고 버려지는 로저. 이 모든 주요한 등장인물들이 마침내 왕필처럼 '결여된 인간'이 되는 것이 비적유성탄의 결말이다. 그리고 좌백은 이러한 결말에서 어떠한 희극도, 비극도 추가하지 않는다. 이 인간군상들은 그 곳까지 흘러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흘러갈 것으로 묘사된다. 그 흘러감은 때로는 비극적이고, 때로는 비극적일것이다. 작품 안에서의 삶의 흘러감이 그러했듯이.
이러한 결여된 인간의 특징은 세상의 규범, 규칙 속에서 튕겨져 나왔다는 점에 있다. 이들의 결여된 무언가는 개인적인 차원이자 동시에 사회적인 차원 양쪽 모두에 있다. 이는 좌백의 전작들(대도오, 생사박같은)과 비교했을때 더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좌백의 전작들 역시 규범, 규칙 속에서 튕겨져 나온 인간 군상들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단순한 안티 테제 영웅으로서의 대도오, 결국 스스로의 정체성을 버리고 타협하는 생사박, 처음부터 끝까지 온건한 상식인으로서 중도를 지키는 독행표, 규범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야광충과는 달리, 비적유성탄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규범에서 튕겨져 나오며 그 규범 안으로 다시 편입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 이미 이들에게는 규범 안으로 재편입되려는 의지와 욕망의 지점 자체가 결여된 것이다.
이러한 작품의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왕필이 자신의 과거와 마주치는 장면들은 매우 중요하다. 이는 세상의 규범 속에서 일탈된 자가 그러한 자신의 상황을 자각하고, 거부할 수 없는 세계의 지평(하이데거적인 의미의)을 만나는 장면이다. 그는 이러한 상황들 속에서도 목적없는 방황을 계속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마침내 자신의 ‘원죄’를 대면하고 해결하려 한다. 그가 그의 사부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들을 모두 박살내고, 만인 앞에서 자신이 자객 비적유성탄임을 공표하는 장면은 세계의 지평, 그 지평이 만들어낸 규범 체계 앞에서 방황을 포기하는 자포자기한 주체로서의 그를 보여준다. 그러나 고작 좌백이 허무주의적인 주체의 숙명론적 결말, 세계의 지평 안에 갖혀있는 인간을 그려낸 정도였다면, 이 글은 쓰여질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다. 비적유성탄이 갖는 의미를 이를 훨씬 넘어선다.
‘비적유성탄’ 왕필은 ‘강남일괴’ 왕필을 넘어서지 못 한다. 그의 죄를 증명해줄 유일한 자인 왕상택은 그를 알아보지만, 그를 비적유성탄을 사칭하는 괴짜로 취급하며 비웃어버린다. 그를 통해 왕필의 커밍아웃은 세인들에게 강남일괴의 괴이한 기행들, 규범에서 튕겨져 나온 인간이 세계 안에서 무작위로 자신을 그려낸 행위과 맞물려 해석되고, 결국 이러한 선언 자체가 또 다른 기행으로 간주되고 만다. 규범 안으로 재편입되려는, 죽음을 선취하는 결단은 이렇게 철저하게 분쇄된다. 이는 허무주의적 주체의 본질이 숙명론이 아니라 세계의 우연성에 있음을 보여준다. 세계 전체의 우연성, 타자의 실존에 의존한 이 우연성은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가 가지는 지평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결국 왕필은 스스로가 갇혀있던 지평을 우연성에 의지해 넘어서지만, 이는 맨 처음 소설의 도입부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 나름대로 유쾌하다고 해도, 왕필과 그의 일행들이 여전히 결여된 인간이며, 이들에겐 순간적인 충동 이외의 어떠한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를 굳이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으로 놓을 필요도 없다. 적어도 좌백은 그렇게 말하는 듯 하다. 이러한 좌백이 의도하는 결말은 라캉 정신분석의 욕망과 충동의 변증법을 나름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듯 하다. 항상 대상적이고 목적적인, 그러나 끝내 대상을 통한 좌절을 맛보는 욕망과 이러한 욕망을 통해서만 드러나고 충족된다는 충동의 구도. 이에 대해 좌백은 <비적유성탄>을 통해, 결여된 인간으로서의 목적 없는 행위야말로 충동의 본질, 인간의 본질이라 말하는 듯 하다. 선악의 구도를 초월하는 현존재로서의 인간, 우리 자신은 항상 세계의 규범에서 일탈된 방식으로 현전하고, 이러한 삶은 타자의 실존으로 인해 그들 자신의 세계 지평을 항상 넘어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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