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을 접한지 얼마 안된 사람이 있다고 하죠. 마침 이사람은 몇번 본 작품이 죄다 납득할만한 이유도 없이 태생부터 썩어빠진 정파인들과 마찰하며 독보강호하는 주인공의 일대기였습니다. 이사람이 읽은 작품들에 등장하는 구대문파니 오대세가니 하는 자주 나오는 '명문정파' 라는 집단들은 언제나 치졸하고 비겁하고 악하기 이를 데 없는데, 이상하게도 세력이 크고 역사가 유구합니다. 이런 악당들의 집합체가 무슨 이유로 의협이 최고라는 강호라는 세계에서 이토록 유명한건지 알수가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이상한건 명문정파라는 이름 자체입니다. 대체 왜 그들이 명문인지, 바를 정자를 쓰는 정파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치졸하고 편협하다는 인상은 무협을 오래 탐독해온 독자들에게도 그 캐릭터를 밑도끝도없는 악역이나 조연으로 전락시키는 강한 코드가 될 정도죠. 그것은 일반적으로 독자들이 생각하는 '강호'라는 세계가 치졸하고 편협한 사람에게는 그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후덕한 세계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리, 도의, 예의, 배분, 체면으로 인해 갖가지 일들이 벌어지는 무협의 세계인 만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맺음이 무협의 크나큰 원동력이 되어 수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었지요. 세월이 바뀌고 문명이 바뀌어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변하지 않는 화두다 보니, 첨단기술이 난무하는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칼과 주먹을 들고 쌈박질하는 원시적인 무협이라는 세계에 보다 깊이 매료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지네요.
이런 무협에서 거의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소위 명문정파라는 단체는, 그 복잡미묘하기 짝이 없는 강호에서 오랜 세월 세를 유지시켜온 저력이 있다는 것이 당연한 설정이겠지요. 덕이라 칭하는 의리와 도의, 예의를 잃지 않으며. 부덕이라 칭하는 욕심과 자만, 이기심을 견제하고. 멋이라 칭하는 협을 추구하는. 그런 세월이 길었기에 그들을 단순한 무장세력이 아닌 명문정파라고 부르게 된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요즘은 정파입네 사파입네 하는 기존의 세계관을 차용해 글을 전개하면서도 정파로서 명문이라는 평을 얻어낸 그 단체의 유구한 역사나 저력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이 필요에 따라 밑도끝도 없이 저열한 집단으로 그려내는 것이 보통입니다. 문주부터 문지기까지 비열하기 짝이 없으며, 내규도 법도도 희미하고, 사형제간에는 암투를 일삼고, 불구대천의 원수도 아닌데 사소한 분쟁에도 쳐죽이기에 바쁜 인물들이 모인 곳을 '명문정파'라고 기술합니다.
명문정파의 담합이나 타락에서 빚어진 비극이라던가 하는 사건은 물론 매우 흥미롭습니다. 그만큼 많이 반복되어 오기도 했지요. 하지만 그것이 흥미로울 수 있는 이유가 어디서 온 건지 한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혼자 생각이지만. 그 이유란 것은 대다수 독자들의 인상 속에 있는 명문정파라는 설정이, 그것이 역전되었을 경우 반전의 묘미가 충분히 있을만큼 건실한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네요.
예전에는 무협 속에서 이런 명문정파의 고질적인 병폐 운운 하면서 거론되어 온 것은, 명분으로 인해 한없이 무거워지는 엉덩이. 또 선함과 의로움을 표방하되 규모가 큰 탓에 실리를 외면할 수 없어 생기는 위선, 기득권 유지를 위한 제잘못의 기만 등이 대표적이었지요. 이처럼 오히려 명문정파이기 때문에 생기는 행동의 제약이나 구조적 문제로 인한 폐단에서 비롯된 소설적 갈등은 굉장히 흥미를 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갈등이 발생해도 '명문정파' 라고 규정한 관습적 개념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이야기가 진행되지요. 결국 대의는 정의라는 인상을 유지한다고 할까요. 그래야 '명성이 널리 알려진 의로운 단체'라는 서술에 모순이 없으니까요.
요즈음의 무협에서 '명문정파' 라고 쓰고 '힘은 있으나 치졸한 세력'으로 읽어야 하는 모순된 서술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죠. 물론 애초에 주인공으로 악당이나 이단아를 내세웠거나 기득권세력의 담합이나 타락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어 개연성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면, 단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조연으로 등장한 악으로 똘똘뭉친 세력에 굳이 '명문정파' 라고 기술하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쓴웃음이 나오는 일이 됩니다. 게다가 갈등의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구조일 경우(흔히 깽판물) 더더욱 그렇지요.
요즈음의 많은 무협에서 그려지고 있는 명문정파를 가장한 악당이라는 것은 기존의 무협들에서 구축한 명문정파의 이미지를 편리하게 차용하여 사용하면서도, 스스로 차용한 그 세계관을 파괴하는 꼴이라 거부감이 들곤 합니다. 내가 먹은 후에는 버려도 된다는 심보로 보이는 것이죠. 각자의 가치. 각자의 정의. 각자의 입장에 따라 투쟁하는 강호의 군웅들을 다루는 큰 스케일의 작품이라면 무언가 이유가 있는 것이라 미루어 짐작을 해보기라도 하지만, 그저 일인영웅전을 다루는 전기물에서 동정의 여지도 없는 순악질 악당을 등장시켜놓고는 그는 명문정파의 아무개였다는 식의 서술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죠.
예를 들자면 '타락한 거대세력' 이라는 틀을 잡아냄에 있어서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내는 것 보다는 기존의 통념에 기대어 유명문파라던가 무림맹이라던가 하는 세력을 끌어들이는 것이 훨씬 수월한 작법이 되겠죠. 새로운 집단을 기획하고 그 집단이 힘을 가지게 된 배경을 만들고, 적절히 작품의 세계관 안에 녹여내고, 또 그 집단의 구성과 단체, 특색과 무공, 기반 등의 제반설정을 고민하느니, 차라리 기왕에 있었던 화산파니 제갈세가니 하는 걸 따오면 그만이니 얼마나 편합니까. 특별히 설명하지 않아도 그간 굳어진 통념이 있으니 그냥 '그놈은 화산파의 아무개였다' 라고 하면 많은 골치아픈것들이 알아서 설명되지요. 다만, 그렇게 편한 장치를 가져다 썼으면 최소한 그 장치를 훼손하지 않을 정도로 들여와야 하는 게 아닐까요. 통념에 기대려 하면서도 필요한것만 반영하고 불필요하거나 어려운 부분은 알게 뭐냐는 식으로 스스로 빌려온 통념을 망가뜨리는 작법이 횡행함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편의 뿐만 아니라 일부는 '그냥 싫다' 는 이유없는 반항을 이유로 하기도 합니다. 이건 뭐 제임스딘빠도 아니고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주둥이로만 난체하는 선동가도 아닌데 기득권층은 이유도 필요없이 고인물은 썩은물이니 무조건 더럽다 지탄하라 까부수자 우기는 것은 씁쓸한 조소만 불러일으키고 맙니다.
악행을 위해 태어나 살아가는 악당과 싸우는 슈퍼 히어로도 물론 매력적이지만, 사람과 사람이 만나 갈등하고 반목하고 오해하고 이해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목마른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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