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한담

연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합시다.



작성자
Lv.1 궈징밍
작성
05.10.10 09:55
조회
645

안녕하세요, 궈징밍, [환성]을 연재하고 있는 신화입니다.

모로 미야라는 일본인이 중국어로 쓴 책을 번역하다가 미야모토 무사시에 관한 이야기가 재미 있어 올립니다.

미야모토 무사시, 관심 있으신 분들 많으시죠?

일본어 한자음을 몰라 그냥 한자로 올린 것들이 있어요. 일본어 잘 하시는 분들 덧글 좀 올려주셔요. 그럼 재밌게 보셔요.

미야모토 무사시

현대 일본의 유명 작가, 나오키 산쥬고(直木三十五: 일본의 양대 문학상 중 하나로서 대중문학 작품에 주어지는 ‘나오키상’은 바로 그를 기념하여 이름이 지어졌다.)는 1931년 『요미우리신문』(讀賣新聞)이 주최한 좌담회에서 나중에 ‘나오키상’의 창립자가 되었으며 역시 유명 작가였던 기쿠치 간(菊池寬)과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가 과연 강했는가.”에 관해 얼굴을 붉혀가며 설전을 벌였다. 당시 나오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오륜서』(五輪書)에서, 자신이 13세에서 28, 9세까지 병법과 검술을 연마했고 60차례가 넘는 결투에서 한번도 지지 않음으로써 천하무적의 검객이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택한 결투 상대들은 일류 검객이 아니었습니다. 평생 간사이(關西) 지역에 틀어박혀 사느라 간토(關東)의 유명 검객을 상대해본 적도 없었고 말이죠. 이랬으면서 어떻게 천하무적의 검객이라고 자칭할 수 있습니까?”

기쿠치 간은 미야모토 무사시를 지지했으므로 당연히 침을 튀겨가며 나오키 산쥬고와 이 문제를 격렬히 논했다. 당시 공교롭게도 저명한 역사소설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가 그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나오키 산쥬고는 이번에는 그를 향해 창끝을 겨눴다.

“요시카와 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요시카와 에이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는 기쿠치 선생과 비슷한 의견입니다.”

나중에 나오키 산쥬고는 당시 일본 대중문학의 대표적 잡지였던 『분게이슌쥬』(文藝春秋)에서 또 “미야모토 무사시는 본래 강하지 않았다.”는 논조를 펼치면서 공공연히 요시카와 에이지의 이름을 들먹여 논쟁을 유도한다. 하지만 요시카와 에이지는 내내 침묵을 지키다가 1935년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그 유명한 『미야모토 무사시』를 연재하기 시작한다. 이 대작은 아마도 나오키 산쥬고의 주장을 뒤집기 위한 요시카와 에이지의 ‘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오키 산쥬고는 그 전 해에 세상을 떠났다.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오키 산쥬고는 정말 진심으로 미야모토 무사시의 검술을 부정했을까? 나는 그의 저서, 『일본검호열전』(日本劍豪列傳), 「미야모토 무사시권(卷)」을 보고 실은 그렇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오키 산쥬고는 단지 맹목적으로 세상의 고정 관념을 따르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확실히 미야모토 무사시는 동시대의 검객이었던 야규 무네노리(柳生宗矩) 등과 검을 겨뤄본 적이 없었다.

사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미야모토 무사시가 강했는가?”라는 문제는 일본 남성 작가들의 논쟁의 초점이었던 것 같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다. 여성의 입장에서 나는 간혹 “이 문제가 그렇게 중요한가?”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한편으로 “남자들은 정말 할 일도 없군. 딴에는 귀엽기도 하네.”라는 생각도 든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강한지, 강하지 않은지 관심이 있는가? 어쨌든 죽은 사람들을 대질 시킬 방법은 없다. 설마 미야모토 무사시와 야규 무네노리를 되살려내 방송국에서 공개 결투라도 시킬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여성의 관점이지 남성의 관점은 아니다. 따라서 “미야모토 무사시가 강했는가?”는 일본 남성들 사이에서 여전히 침이 마르도록 논쟁이 오가는 의제이며, 영원히 결론이 나지 않는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미야모토 무사시의 검술이 대체 얼마나 강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가 평생 고독한 검객이었다고 믿는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1584년 오카야마현(岡山縣) 아이다군(英田郡) 오하라정(大原町) 미야모토촌(宮本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신멘 무니사이(新免無二齋)는 본래 그곳 지주 아래 가신(家臣)들의 우두머리 자리(현재의 촌장)를 세습 받을 수 있었는데도 무슨 이유에선지 시골 무사로 전락하여 두메 산골에 은거하였다. 무사시의 어머니인 率子는 무사시가 세 살 때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집을 나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그래서 무니사이는 阿政이라는 여자를 다시 아내로 맞아들인다. 그런데 무사시는 자신의 유년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일언반구도 남기지 않았다. 생전에 다른 사람에게 양친의 일을 언급한 적도 거의 없었다. 이런 까닭에 그의 진정한 경력을 파악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지금으로부터 4백여 전의 어느 날, 미야모토촌의 이라키 신사(荒木神社)에서 제전을 열었다. 어린 무사시는 마을 사람들 사이에 끼어 북 치는 사람이 민첩하게 양손을 놀리는 광경을 보았다. 자유자재로 두드리는 그 빠른 리듬에 무사시는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사시는 집에 돌아와 아버지에게 물었다.

“열심히 연습하기만 하면 오른손, 왼손으로 다 검을 휘두를 수 있나요? 그렇게 하면 편리하잖아요?”

무니사이는 생전에 스스로를 ‘태양 아래 둘도 없는 병법가’(日下無雙兵法術者)라고 칭했으며, 이 칭호를 당시의 아시카가 쇼군(足利將軍)이 하사한 것이라고 사방에 자랑했다. 우리는 이 칭호의 사실 여부와는 무관하게 어쨌든 무니사이의 검술이 상당히 고명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사시는 어린 시절부터 수시로 나뭇가지를 들고 훌륭한 스승 밑에서 검술 실력을 쌓았을 것이다.

“멍청한 녀석. 네 말이 맞긴 하다만, 그런 걸 보고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한 마리도 못 잡는다.’고 하는 거다. 아마 두 손 다 제대로 쓰지 못할 걸?”

“열심히 연습하면 할 수 있을 거예요.”

“너도 검술을 좀 알지 않느냐. 검 한 자루를 두 손으로 쥐고서 왼손은 힘을 쓰고 오른손은 힘을 빼야 검끝의 기세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왼손과 오른손이 합일을 이뤄야 완전무결해질 수 있지. 왼손, 오른손으로 다 검을 휘두를 수 있으면 당연히 좋겠지만 그 상태에서 쌍수합일(雙手合一)은 힘들다. 한손으로 뭘 할 수 있겠느냐?”

“하지만 전쟁터에서 장군들은 말 위에서 한손으로 검을 휘두르고, 다른 손으로는 말고삐를 조이잖아요.”

“기마전의 주된 무기는 긴 창이다. 말이 달려가는 힘을 이용해 겨드랑이 밑처럼 적의 갑옷이 닿지 않는 부분을 겨눠 찌르는 거지. 이런 창법은 검술과는 완전히 다르다. 두 손으로 칼을 휘둘러도 갑옷을 벨 수 없는데 한손으로 어떻게 가능하겠느냐? 말을 탄 장군이 직접 검을 휘두르며 적을 쫓아가는 건 이미 적을 무찌른 다음이다.”

“하지만 집 안이나 숲속, 골목 같은 좁은 곳에서 양손으로 장검과 단검을 휘두르면 혹시 오른손을 잘리더라도 왼손의 단검으로 몸을 보호할 수 있잖아요.”

“이 녀석아, 오른손이 잘리면 모든 게 끝난 거나 마찬가지야. 달랑 왼손만으로 뭘 할 수 있겠느냐? 너는 아직 어려서 검술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해.”

“보통 무사들은 몸에 장검과 단검을 다 차고 다니잖아요. 두 손으로 장검 한 자루만 쓸 수 있다면 단검은 뭣하러 가지고 다녀요? 오른손이 잘렸을 때 왜 왼손을 쓰지 못한다는 거죠? 수련도 안 해 보고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저는 꼭 수련을 해봐야겠어요. 아빠처럼 단도로 하루종일 이쑤시개나 깎고 싶지는 않아요…….”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한 자루 단검이 휙, 날아왔다. 바로 무니사이가 이쑤시개를 깎는 데 쓰던 그 단검이었다. 무사시가 재빨리 몸을 숙이는 바람에 단검은 뒤에 있던 기둥에 들이박혔다. 전설에 따르면 그때 무사시는 겁을 먹기는커녕 깔깔 웃으며 그 단검을 뽑아 무니사이에게 되던졌다고 한다. 당시 무니사이는 이미 반백의 노인이었고 무사시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아이의 한 마디 말에 수중의 단검을 던진 걸로 봐서 무니사이는 보통의 ‘자애로운 아버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릴 때 어머니의 사랑을 잃은 무사시는 성인이 된 후,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해 일절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이로부터 우리는 그의 유년 시절 환경이 매우 복잡하고 혹독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 역시 나중에 그의 인격을 괴팍하게 만든 주된 원인일 것이다.

천재와 광인은 본래 종이 한 장 차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천재들은 저마다 그 재능만큼의 광기를 가졌었다.

무니사이는 무사시가 7살 때 세상을 떠났다. 고아가 된 무사시는 여러 친척들의 집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에는 어느 암자에 머물렀다. 무사시가 만년에 발휘한 예술, 서예의 재능은 아마 이 암자에 살던 시절 기초가 닦였을 것이다.

무사시는 13살 때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다.

당시 무사시가 살던 암자는 오카야마 현 부근 효고(兵庫) 현에 있었고 오사카 부(府), 교토 부와 매우 가까웠다. 때는 바야흐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정권을 장악한 시대로서 사, 농, 공, 상의 봉건적 신분제도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전란으로 주군을 잃은 수많은 무사와 낭인들이 천하가 안정될까 두려워 곳곳에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사고를 치는 바람에 치안이 극도로 불안했다. 특히 솜씨가 뛰어난 무사들은 사방으로 고수를 찾아다니며 대결을 벌였다. 그런 방법으로 명성을 얻어 그 지역 실권자의 눈에 들려 한 것이다. 운만 좋으면 기회를 잡아 벼락출세를 할 수도 있었다.

신도류(新當流)의 검객 아리마 요시베(有馬喜兵衛)가 바로 그런 낭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정오, 무사시는 마을에 포고문이 붙은 푯말이 세워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푯말에는 “모든 무예의 고수에게 가르침을 받길 바라오.”라는 말이 씌어져 있었다. 말하자면 “배짱이 있으면 모두 덤벼라!”라는 뜻이었다.

건장하고 힘센 무사시는 마을 개구쟁이들의 두목이었다. 허구헌날 말썽을 일으키는 그는 어른들도 길에서 만나면 슬슬 피해가는 존재였다.

이때 무사시는 포고문의 문구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암자로 돌아가 붓을 가져왔다. 그는 붓으로 그 문구를 지우고 옆에 “소생이 내일 함께 하겠소! 미야모토 무사시.”라고 적었다.

마을 사람들은 당연히 서명을 한 그 ‘소생’이 누구인지 알았다. 이 소식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저녁 무렵이 되자 암자의 늙은 주지 스님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늙은 주지는 깜짝 놀라 아리마 요시베의 숙소로 달려가 거듭 사죄했다.

“그 ‘소생’은 진짜 젖비린내 나는 어린아이에 불과합니다. 아직 상투도 틀지 않았지요. 대인께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리마 요시베는 자신에게 도전한 자가 그런 코흘리개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마을 전체에 소문이 퍼지고 인근 마을의 주민들까지 구경거리를 보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막도 올리지 못하고 판을 거둬 버리면 앞으로 무슨 낯으로 전국을 누비겠는가? 난처해진 아리마 요시베는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다 결국 무릎을 치고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이러면 되겠군요. 스님, 내일 그 꼬마를 결투장으로 데려오십시오. 사람들 앞에서 절로써 사죄하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거양득 아닙니까? 꼬마는 피비린내 나는 고통을 면하고 저도 체면을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껄껄.”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는 자신의 저서 『정설 미야모토 무사시』(眞說宮本武藏)에서 아리마 요시베를 이렇게 소개했다.

신도류는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미카와 국(三河國: 아이치[愛知] 현 동부)의 주군으로 있던 시절, 인근 여러 나라에서 유행하던 검술 유파다. 당시 아리마 토키사다(有馬時貞)라는 검술가가 미카와 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신도류 검술의 증명서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이에야스는 그를 매우 존중하고 스승으로 삼았으며 그로부터 신도류 검술의 비결을 배웠다. 얼마후 토키사다가 죽자 이에야스는 차마 아리마 가의 명맥을 끊을 수 없어, 아리마 일족의 아키시게(秋重)라는 남자를 양자로 정해 부젠노카미(豐前守)로 삼았고, 나중에 기슈(紀州: 와가야마[和歌山] 현 남부. 주군은 이에야스의 열째 아들이었다) 이에야스 가문의 검술사범으로 임명했다. 신도류는 에도시대 중엽까지 기슈 부근 검술 유파의 주류를 이뤘다. 아리마 요시베는 아마 그 일족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신도류의 시조 쓰가하라 보쿠덴(塚原卜傳)은 검성(劍星) 카미이즈미 이세노카미 노부츠나(上泉伊勢守信綱)와 같은 시대의 인물로서 역시 역사상 유명한 검성이다. 만약 아리마 요시베가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신임한 아리마 일족이었다면 결코 서투른 검객이었을 리 없다.

그리고 미야모토 무사시의 『오륜서』 서문을 보면 “나는 13세에 처음 신도류의 아리마 요시베와 겨뤄 승리를 거뒀다. 16세에는 다지마국(但馬國: 효고 현 북부) 검객 아키야마(秋山)와 겨뤄 역시 승리를 거뒀다.”라고 씌어져 있다. 전자는 명확히 ‘아리마 요시베’라는 이름 전체를 밝혔지만 후자는 성씨인 ‘아키야마’만 밝혔다. 이것으로부터 ‘아리마 요시베’라는 검객이 당시 그 지역에서 상당히 유명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면 이 유명하고 검술이 뛰어난 검객이 왜 궁벽한 시골까지 와서 죽음을 맞았던 걸까? 아마도 그는 전국을 주유하던 도중에 무사시가 살던 마을에서 하룻밤 숙식과 술자리를 구하려 했을 것이다. 그것은 당시 검객들이 습관적으로 쓰던 수법이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결투의 날이 밝자 늙은 주지는 부랴부랴 무사시를 결투장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는 아리마 요시베와 그의 제자가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주지가 무사시의 손을 끌고 아리마 요시베 앞으로 갔다. 그리고 무사시의 어깨를 누르며 소리쳤다.

“어서 대인께 절을 하고 사죄해!”

무사시는 아무 대꾸 없이 날카로운 눈으로 아리마 요시베를 노려보고 있었다.

요시베는 앉아 있기가 좀 불안했다. 주지가 데려온 ‘어린아이’는 추한 용모에 체구가 크고 건장했다. 키만 해도 170센티가 넘어 보였고 체중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 ‘어린아이’의 손에 들린 긴 몽둥이를 보면서 요시베는 속으로 ‘정말 이 어린 놈이 아직 상투도 안 튼 나이란 밀인가?’라고 생각했다. 이어서 주위를 휙 둘러보니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모두 다 소리를 죽이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당당한 무사의 신분으로 만인이 보는 앞에서 코흘리개와 싸울 수는 없지 않는가? 요시베는 눈 앞의 이 ‘어린아이’가 좀 철이 있어 알아서 꼬리를 내리고 빌어주기만을 바랐다.

“이 놈, 어서 무릎을 꿇고 빌어라!”

이 말을 듣자마자 무사시는 다짜고짜 수중의 몽둥이를 들어 휘둘렀다. 그것은 무사의 결투 규칙과는 거리가 먼, 무모하고 비열한 기습이었다. 요시베는 하마터면 화를 당할 뻔했다.

“이 꼬마놈이!”

요시베는 분노가 치밀어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런데 무사시가 몽둥이를 집어 던지며 큰 소리로 외쳤다.

“맨손으로 하자!”

“그래, 하자는 대로 해주지!”

요시베도 장검을 던져 버렸다. 개구쟁이인 상대를 얕잡아 보고 잠시 방심한 것이다.

두 사람이 하나로 어우러진 뒤, 무사시는 천부적인 근력으로 요시베를 높이 치켜들었다 냅다 땅에 메다꽂았다. 요시베는 황급히 자세를 추스르려 했지만 무사시는 그에게 숨 돌릴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엉덩이로 그의 몸을 누르고 내처 몽둥이를 다시 집어들어 마늘 찧듯 이마를 내리쳤다.

무사시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가랑이 밑의 요시베는 벌써 사지를 뻗고 절명해 있었다. 늙은 주지가 곁에 무릎을 꿇고서 중얼중얼 염불을 외웠다. 구경 나온 마을 사람들은 하나 같이 넋이 빠져 침묵에 잠겼다.

시바 료타로는 언젠가 “무사시의 병법은 살육이 출발점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오륜서』의 제 1장 「지편」(地篇)을 보면 검술 학습에 필요한 마음의 자세에 관한 항목에서 “몸에 지닌 무기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무사시의 타고난 거구와 비범한 완력도 무사시가 말한 ‘몸에 지닌 무기’ 중 하나가 아닐까?

살인을 한 후, 마을에 더 머물 수 없게 된 무사시는 곧 암자를 떠나 떠돌이 새 같은 삶의 여행을 시작한다.

만약 무사시가 20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사방에 봉화가 피어오르고 전투가 빈발하던 전국시대에 큰 공을 세워 다이묘(大名)의 지위까지 올라섰을 것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무사시는 전국시대와 에도시대 사이의 과도기에 살았다. 무사시가 14세 되던 해, 당시 천하의 실권자였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들 히데요리(秀賴)와 훗날의 화근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당시 시대의 조류는 토쿠가와 막부의 평화롭고 폐쇄적인 ‘에도시대’로 급속히 흘러가고 있었다.

무사시는 16세에 효고 현 북부에서 성이 아키야마인 검객과 결투를 벌였다. 그는 또 천부적인 힘과 체구를 효과적으로 이용해 적을 제압했다. 이 아키야마라는 자의 정확한 이름과 나이, 유파는 모두 미상이다. 『오륜서』 서문에서도 ‘뛰어난 검객’이라는 한 마디로 간단히 소개했을 따름이다.

그후 메이지시대 이전, 일본 최대 규모의 내전인 ‘세키가하라(關之原) 대전’이 발생했다. 그것은 토요토미 히데요시 정권과 토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이 천하의 대권을 걸고 벌인 전쟁이었다. 동군의 대표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였고 서군의 대표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총애했던 가신 이시다 미츠나리(石田三成)였다. 간단히 말해 이시다 미츠나리는 토요토미 정권을 계승하고자 하는 보수파의 대표자였으며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구정권을 뒤엎고 신정권을 수립하려는 개혁파의 대표자였다. 전쟁의 장소는 濃國(기후[岐阜] 현)에 있는 세키가하라 분지였다.

당시 17세였던 무사시가 ‘세키가하라 대전’에 참가했는지에 관해 여러 의견이 존재하지만 감히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미야모토 무사시』 제 1막은 무사시와 그의 죽마고우 마타하치(又八)가 시체가 가득 널린 평원 위에 누워 멍하니 창공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하지만 요시오카 에이지는 「수필-미야모토 무사시」에서 그것은 창작이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솔직하게 밝혔다. 또한 무사시가 ‘세키가하라 대전’에 참가했더라도 잡병의 신분으로 참가했을 거라고 말했다. 무사시는 자기 입으로 “여섯 차례 전쟁에 나갔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여섯 차례 전쟁’이란 말인가? 4백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알아낼 방법이 없다. ‘시마바라(島原)의 난’이 증거 자료가 있는 것 외에 나머지는 모두 수수께끼다.

21세가 되기까지 무사시의 행적은 눈밭의 기러기처럼 미미해서 현재로서는 현미경을 들이대도 거의 찾을 수 없다.

전국시대 말기부터 에도 초기까지 대부분의 검객들은 명성을 얻기 위해 힘들게 전국을 주유하며 검술을 연마했다. 그 목적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려 관직을 얻고 가문을 빛내기 위해서였다. 또한 이 시대의 무기는 검이나 도 외에도 창, 대도 등 있어야 할 것은 전부 다 있었다. 보통 검객 스스로 발명하고 개량한 것들이었다.

이가국(伊賀國: 미에[三重] 현)에 시시도 바이켄(戶梅軒)이라는 사슬낫의 고수가 살았다. 사서에서는 그의 성 ‘시시도’만 기록되어 있고 ‘바이켄’이라는 이름은 요시카와 에이지가 지었다. 시바 료타로는 ‘텐젠’(典膳)이라는 이름을 지어 붙이기도 했다. 이 고수의 무기는 본래 농가에서 쓰는 낫이지만 자루에 3미터 길이의 쇠사슬을 묶고 그 끝에 저울추를 달았다. 그는 보통 왼손으로 낫을 쥐고 오른손으로 저울추가 달린 쇠사슬을 던져 상대의 무기를 옭아매거나 저울추로 직접 상대를 공격했다. 이처럼 무기의 쓰임새가 상당히 다양했다.

무사시는 바이켄을 만나기 전까지 ‘비행 무기’를 대적해 본 적이 없었다. 눈앞에서 익숙한 솜씨로 쇠사슬을 돌리는 거한을 바라보면서 무사시는 비록 자기 무예에 자신감이 있기는 했지만 속으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쇠사슬이 마치 뱀처럼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며 무사시를 향해 육박해 들어왔다. 허공에서 저울추와 쇠사슬이 춤을 추며 쉭쉭대는 소리가 무사시의 귓가에 전해졌다.

무사시는 연달아 여러 초식을 피했고 하마터면 몸에 맞을 뻔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왼손에 장검을, 오른손에 단검을 뽑아 들었다. 바이켄은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이건 도대체 어느 문파의 수법인가? 바이켄은 이가국에서 스스로 일가를 이뤄 각종 문파의 고수들과 대결을 벌여왔다. 하지만 이처럼 일정한 틀이 없고 양손에 다 검을 쥐는 수법은 본 적이 없었다. 무사시의 검술은 스승 없이 혼자 깨달아 고된 수련으로 얻은 것이므로 그렇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했다.

바이켄은 쇠사슬을 휘둘렀다. 쇠사슬이 그의 머리 위에서 고속으로 회전했다. 회전하면 할수록 속도가 증가하여 나중에는 쇠사슬이 윙윙거리는 원으로 보였다. 갑자기 저울추가 질풍처럼 무사시를 향해 날아왔다. 무사시는 숨 돌릴 틈도 없이 몸을 날리며 오른손의 단검을 던졌다. 단검은 바이켄의 머리에 명중했고 곧이어 저울추가 떨어지는 동시에 바이켄도 꽈당, 땅 위에 넘어졌다.

그래서 바이켄도 ‘시시도’라는 성으로 역사에 남았다.

무사시의 일생에서 가장 유명한 결투 장면은 ‘요시오카(吉岡) 형제’와 ‘간류도(巖流島)’와 관련이 있다. 이가국에서 사슬낫의 명수 바이켄을 격파한 후, 무사시는 궁벽한 지역의 이름 없는 무사들과 겨루는 데 싫증을 느낀 듯하다. 그래서 교토에 가기로 결심한다. 예전부터 교토는 각종 무술에 능통한 고수들의 집결지였다. 더욱이 간사이(關西) 최고의 검술 문파, 요시오카 가문이 있었다. 사람을 쏘려면 먼저 말을 쏘고, 도적을 잡으려면 먼저 두목을 잡으라는 말처럼 교토라는 큰 물에 가서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전설적인 교토 교외의 ‘蓮台野’와 ‘이치죠사(一乘寺) 소나무 아래’의 결투가 막을 올리게 된다. 요시오카 형제의 참극도 여기에서 벌어졌다.

요시오카 가문은 240년 동안 지속된 무로마치(室町) 막부의 아시카가 쇼군 가문에서 대대로 검술 사범을 담당했다. 당시는 무로마치 막부가 이미 30년 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섬멸되고 토쿠가와 막부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 요시오카 가문은 아직 검술 명가의 명예를 누리고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요시오카 가문은 한편으로 검술 도장을 운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염색 공장을 부업으로 삼았다. 일설에 의하면 ‘요시오카 염색천’이 도검을 막을 만큼 질겨서 당시 무사들에게 널리 애용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할 듯하다. 내 생각에 일반적으로 ‘무사’의 이미지는 칼만 다룰 줄 알지 다른 일은 전혀 못했던 사람으로 굳어져 있지 않나 싶다. 그러나 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무사는 검술 외에도 보통 ‘가업’이 있었다. 예를 들어 ‘인단’(仁丹) 같은 것은 무사 계급의 발명품이다. ‘지혈제’, ‘만령단’(萬靈丹)류의 제조도 무사 계급의 가업에 속했으며, 종이우산, 종이창, 등롱(燈籠)류의 수공업 역시 무사 계급의 전통적인 가업이었다.

가장 유명한 예가 야마다(山田) 가문이다. 야마다 가문은 대대로 토쿠가와 막부의 범죄자 참수(斬首) 일을 맡았다. 참수의 기술이 거의 신의 경지에 이르러 목을 벴는데도 머리와 몸이 둘로 분리되는 법이 없었고, 그래서 막부 관원들에게 깊은 신뢰를 받았다. 1881년 메이지시대 초기, 강도살인범 두 명의 참수를 마지막으로 메이지정부는 참수형의 폐지를 선언했다. 그래서 7대를 이어온 야마다 가문의 절기(絶技)도 끊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가문의 전통적인 부업은 ‘제약업’이었고 그것은 당시 수지 맞는 업종 중의 하나였다.

세키가하라 대전에서 패한 서군은 수십만 명의 실업 무사를 양산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검술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괴한 복장을 하고 허풍을 떨며 여러 나라를 떠돌았다. 물론 관직에 오를 기회를 잡기 위해서였다. ‘간류도’의 결투 전까지 무사시도 아마 그런 류의 무사였을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교토에 도착한 무사시는 요시오카 도장에 들러 장문인 세이쥬로(淸十郞)와의 대결을 요구한다.

요시오카 도장은 교토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무예관답게 제자들이 백 명이 넘었다.

무사시가 맨 처음 단신으로 요시오카 도장에 뛰어들었을 때, 장문인 세이쥬로는 마침 외출하고 자리에 없었다. 보통 명문 도장의 장문인이라면 미야모토 무사시 같은 떠돌이 무사의 도전을 받아줄 리 만무했다. 그런데 제자들이 행색만 보고 부랑자로 취급하는 바람에 심기가 상한 무사시는 당장 그들 중 몇 명을 때려눕혔다. 쓰러진 이들은 다 검술이 비범한 수제자들이었고, 그래서 세이쥬로는 무사시와 직접 겨루기로 결정한다.

양측은 상의를 거쳐 결투 장소를 교토 교외의 蓮台野로 정한다. 蓮台野는 교토의 풍장(風葬)과 화장이 행해지던 곳으로서 평소 인적이 매우 드물며 주위를 둘러보면 곳곳에 뼈와 살점이 뒹굴고 까마귀떼가 하늘 가득 날아다녔다.

무사시는 큰 다리 다섯 곳을 돌며 포고문을 붙여 이 소식을 세상에 알렸다.

결투 당일, 세이쥬로는 제자 몇 명만을 데리고 와, 멀리서 지켜보게 했다. 그보다 더 먼 곳에는 수많은 구경꾼들이 운집해 있었다.

이 장면과 관련하여 미야모토 무사시를 묘사한 일본의 대부분의 소설들은 그가 고의로 늦게 와 세이쥬로를 화나게 해 냉정한 판단력을 잃게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건 후대 소설가들이 역사적 사실을 참고하고 여기에 윤색을 가한 줄거리일 것이다. 생각해 보라, 가까스로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도장의 장문인과 대결할 기회를 잡았는데 무사시가 왜 비겁한 자로 낙인 찍힐 위험을 무릅쓰고 법규에 어긋난 행동을 했겠는가? 더욱이 구경꾼들 중에는 둥근 원통형 삿갓을 눌러쓴 진짜 고수(혹은 다이묘)가 섞여 차가운 눈으로 승부를 참관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단번에 이름을 드날릴 수 있는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그가 지각 같은 짓을 저질러 스스로 차 버릴 리 만무했다.

결론적으로 당시 무사시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세이쥬로를 쓰러뜨렸다. 이 뜻밖의 결과에 모두 멍해져 눈만 휘둥그래 뜨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일시적으로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겁 없는 까마귀 한 마리가 더 못 참겠는지 깍, 깍, 두 마디 울음소리를 냈다. 세이쥬로의 제자들은 그제서야 정신이 돌아와 앞다퉈 달려왔다.

인사불성이 된 세이쥬로는 제자들의 지극한 간호로 결국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불구가 된 몸으로 더 이상 장문인의 중책을 감당할 수 없었다. 실의에 빠진 그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이런 사태 앞에서 세이쥬로의 동생 덴시치로(傳七郞)는 분노를 삼킬 수가 없었다. 그는 복수를 하고 치욕을 씻기 위해 무사시에게 결투장을 보냈다.

덴시치로는 형만큼 명이 길지 않았다. 결투 당일, 5자 길이의 목제 칼을 준비했지만 금세 무사시에게 빼앗기고 그의 일격에 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버렸다. 이 소식은 교토 전체를 들끓게 만들었다.

양대 기둥을 잃은 요시오카 일족이 그대로 물러날 리 없었다. 다시 세이쥬로의 열세 살 된 적자, 又七郞을 앞에 내세웠다. 이것이 유명한 ‘이치죠사 소나무 아래’의 결투다.

무사시는 분명 고민을 했을 것이다. 검술 명가 요시오카 도장의 장문인을 쓰러뜨려 유명해진 것만으로 이미 족한데, 여기에 덴시치로의 생명을 빼앗고 이제 나이 어린 신임 장문인까지 해치게 되었으니……이런 결투를 과연 받아들여야 할까? 만약 받아들인다면 요시오카 도장의 제자들이 총출동하여 갖가지 무기로 자신을 협공할 게 뻔했다. 반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딜 가나 자객의 위협이 따라다닐 것이다. 요모조모 따져본 끝에 무사시는 할수없이 결투를 받아들였다.

그날, 아직 날도 밝지 않았는데 요시오카 도장의 제자 수백 명이 이치죠사 소나무 아래 모였다. 又七郞은 이마에 하얀 두건을 묶고 비장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들은 잠깐 상의한 뒤, 사면팔방으로 흩어져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又七郞은 명색이 장문인이므로 소나무 밑에서 관전을 하기로 했다. 그의 곁에는 호위 몇 명이 붙어 있었다.

동녘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올 때, 별안간 소나무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원래 무사시는 진작부터 그곳에 누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又七郞의 호위들이 동료들을 부르면서 차례로 검을 뽑아 어린 장문인의 앞을 막았다. 하지만 무사시의 동작은 더 빨랐다. 눈 깜짝할 사이에 호위들을 전부 처치하고 맨주먹인 어린 장문인을 일검에 쓰러뜨렸다. 다른 제자들이 허둥지둥 달려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뒤였다.

이 장면은 소설과 영화의 클라이막스 중 하나이다. 그렇다면 실제로는 정말 어땠을까?

무사시의 양자, 미야모토 이오리(宮本伊織)는 무사시가 죽고서 4년 뒤, 기념비를 세웠다. 그 비문인 ‘고쿠라(小倉) 비문’은 전부 천 수백 자이며 그중에서 4분의 1이 이 사건을 묘사하는 데 쓰였다. 하지만 이 글 속에서는 단지 “사원 소나무 아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모였다. 그들은 활과 화살 등 각종 비행 무기로 무사시를 쓰러뜨리려 했지만 하나 같이 패배했다. 그후 요시오카 가문은 소멸했다.”고만 적혀 있다.

글 속에는 “무사시가 어린 장문인을 죽였다”는 기록이 없다. 더욱이 요시오카 가문도 결투의 패배로 맥이 끊기지 않았다. ‘이치죠사 소나무 아래’의 결투 이후에도 요시오카 도장은 구차하게나마 십 년 더 이어졌다. 십 년 후 어느 날, 교토 황궁에서 연회를 베풀었을 때, 요시오카 又七郞도 장문인의 신분으로 참석했다. 그런데 제자가 호위병과 다툼을 벌여 황궁 안에서 칼을 뽑는 사고를 치는 바람에 요시오카 又七郞은 부득이 도장 문을 닫고 교토를 떠나야 했다. 3년 뒤, 교토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다시 검술 도장을 열지는 못하고 오직 염색업에만 전념했다.

“이치죠사 소나무 아래 수백 명의 제자들이 모였다”는 기록도 아마 미야모토 이오리의 과장일 것이다. 당시의 규정에 따르면 봉록 2백 석의 무장이 병사 5명을 양성해 위기를 대비할 수 있었다. 계산하면 병사 1명당 40석에 해당하는 셈이다. 따라서 봉록 4천 석 이상의 무장이 아니면 병력을 백 명도 동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교토의 행정관도 황궁 소재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나는 걸 용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목적이 복수라 해도 매우 복잡한 수속을 거쳐야 막부의 허가를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치죠사 소나무 아래 모인 제자들은 기껏해야 2, 3십 명이었을 것이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 무사시가 21세였던 그 해는 확실히 치열한 한 해였다. 교토에서 요시오카 일족을 무찌른 뒤, 무사시는 나라(奈良)를 향해 출발했다. 나라의 호조원(寶藏院)은 명성이 혁혁한 ‘창술 사원’이었다. 전대의 인에이(胤榮) 사부는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의 제자일 뿐만 아니라 야규 신가게류(柳生新陰流)의 시조 야규 무네요시(柳生宗嚴)와도 막역한 사이였다.

무사시가 호조원을 방문했을 때, 인에이 사부는 이미 84세의 은거자였고 제 2대 사부는 인슌(胤舜)이었다. 만화가 이노우에 다케히코(井上雄彦)는 요시카와 에이지의 원작을 각색한 만화 『베가본드』에서 무사시와 인슌이 불꽃 튀는 접전을 벌인 것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실제로 인슌은 당시 10세 전후의 어린아이여서 무사시와 대결할 수 없었다. 무사시와 싸운 상대는 인에이의 제자, 오쿠조인(奧藏院)이었다. 두 번 결투를 벌였고 두 번 다 무사시가 승리를 거뒀다.

나라 현의 옛 국호는 ‘야마토국’(大和國)이며 12세기 말 가마쿠라(鎌倉) 막부 시대부터 이른바 ‘수호 다이묘’나 ‘전국 다이묘’가 없었던 특수한 국가였다. 또한 당시의 권력 기관은 고후쿠사(興福寺)였으며 나라 안의 승려들은 모두 승병이었다. 호조원은 그중 한 유파였다. 1755년의 문헌 『이천기』(二天記)의 기록에 따르면 “호조원의 승려들은 전부 무사시의 검술이 비범함을 칭찬했으며 그와 함께 연회를 열어 날이 밝도록 담소를 나눴다”. 무사시의 흉흉한 결투의 역정 속에서 이 결투는 마치 한 알의 청량제 같았다. 살기등등한 분위기가 전혀 없었으며 이후에도 아무런 원한을 남기지 않았다.

이어서 25세 되던 해, 무사시는 봉술의 고수인 무소 곤노스케(夢想權之助)를 만났다. 그는 6척 장신에 체구가 호랑이처럼 건장했다. 성인이 된 뒤의 무사시도 체구가 거의 6척 안팎이었다.

무소 곤노스케(夢想權之助)는 어떤 인물일까? 바로 ‘신토무소류’(神道夢想流) 봉법의 시조다.

이 거한은 등에 선홍색 태양기(일본 국기)를 그리고 앞에 “병법 천하제일, 무소 곤노스케”라고 수 놓은 겉옷을 입고 다녔다. 또한 곁에는 건장한 제자 8명이 따라다녔다.

어느 날, 무사시의 명성을 들은 곤노스케는 그의 거처로 찾아가 자신과 겨루자고 고함을 질렀다. 무사시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결국 곤노스케의 생떼를 이기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마침 만들고 있던 활을 되는 대로 손에 쥐고 밖으로 나갔다.

봉술이 특기인 곤노스케의 무기는 130센티미터 길이의 봉이었다. 이 거한은 기세등등하게 자세를 취했지만 무사시는 상대가 전혀 안중에 없는 듯 정신이 딴데 가 있는 표정이었다.

곤노스케는 잇달아 봉술을 펼쳤다. 힘차고 빠른 초식이 이어졌다. 무사시는 왼쪽, 오른쪽으로 피하더니 갑자기 활을 뻗어 거한의 미간을 찔렀다. 거한은 당장 인사불성이 되어 땅 위에 쓰러졌다. 깨어났을 때 그는 호박처럼 이마가 부은 채 널브러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부끄러운 나머지 그는 규슈(九州) 치쿠젠(筑前: 후쿠오카 현) 다자이후(太宰府)의 호우만산(寶滿山)에 들어가 봉술 연마에 전념했고 나중에 ‘신토무소류’ 봉법을 창시하여 후대에 전했다. 후대 사람들은 그를 기념해 후쿠오카 현 치쿠시(筑紫) 군 호우만산에 ‘무소 곤노스케 신사’를 지었다. 이 신사는 다자이후 텐만궁(天滿宮)에서 택시로 12분 거리에 있다.

25세부터 29세까지 무사시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4백 년 전의 그 날이 다가왔다. 우리는 먼저 요시카와 에이지의 『미야모토 무사시』에서 무사j시가 어떻게 사사키 고지로(佐佐木小次郞)를 격파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612년 4월 초, 규슈 부젠국(豐前國: 후쿠오카 현 동부와 오이타[大分] 현 북부) 고쿠라(小倉) 성(북규슈시 중부) 읍내 곳곳에 똑같은 내용의 포고문이 붙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3일 진시(辰時), 본 번(藩)의  병법 사범 사사키 고지로가 부젠국, 나가도국(長門國: 야마구치[山口] 현 서북부) 사이 간몬(關門) 해협에 있는 고도(孤島), 후나도(船島: 훗날의 간류도)에서 낭인 미야모토 무사시와 대결을 벌인다. 그날은 양측의 친구나 조력자가 바다를 건너는 걸 엄금한다. 모든 유람선, 거룻배, 어선의 해협 왕래도 불허한다.”

현지의 백성들은 모두 흥분해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13일이면 모레 아냐?”

“듣자하니 아주 멀리서 관전하러 오는 사람도 있다던데 우리도 좀 볼 수 없을까?”

“멍청이, 결투장인 후나도는 해안에서 2리나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본다는 거야?”

그런데 당사자인 무사시는 11일 밤에도 종적이 묘연했다. 이를 두고 읍내에서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그 녀석, 겁먹고 도망친 게 분명해.”

“맞아, 그렇지 않으면 왜 코빼기도 안 보이겠어?”

번주(藩主: 다이묘)가 인정한 정식 결투였기 때문에 결투 당일 새벽, 수많은 번사(藩士: 다이묘 휘하의 무사)들이 해안가를 삼엄하게 경비했다.

잠시 후 나타난 사시키 고지로는 속에 소매가 좁은 흰 명주 평복(平服)을 입고, 바깥에는 무릎 아래로 다리를 천으로 둘둘 감은 채 포도색 하의와 눈이 따가울 만큼 붉은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또한 허리에 3자 길이의 애도(愛刀)를 차고 짚신을 신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이런 호화로운 차림을 보고 얼이 빠져 양편으로 물러나 공손히 길을 열어주었다.

훤칠한 체격, 하얀 얼굴이 눈썹 언저리에서 풍기는 평온한 기색과 얼굴의 온화한 웃음과 어울렸다. 그는 암만 봐도 곧 생사를 넘나들 사람 같지 않았다.

고지로는 후원자들에게 빼곡히 둘러싸인 채 번주가 하사한 배에 몸을 실었다. 배에는 다른 두 명의 번사가 있어, 한 명은 키를 잡고 다른 한 명은 노를 저었다. 배가 해안을 떠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은 위험 앞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고지로의 풍모를 앞다퉈 칭찬하고 그가 승리할 것을 암암리에 기대했다.

배가 후나도와 고쿠라 사이로 나아갔다. 해협은 파도가 거칠고 하늘과 바다가 하나인 듯 맑고 푸르렀다. 날씨도 퍽 맑았다. 단지 파도가 좀 높을 뿐이었다. 고지로는 부적과 기도문, 이모가 정성 들여 지어 범문(梵文)까지 수 놓아 준 옷을 몽땅 바다에 던졌다. 곧 생사의 결투를 벌일 그에게 누군가에 대한 미련이나 감정은 싸울 때의 정서에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사람은 오직 자신만을 신뢰할 수 있음을 그는 깨달았다.

한편 무사시도 건너편 해안에서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시간이 꽤 촉박했지만 그는 홀로 방문을 닫고 지필묵을 펼친 채 흰 종이를 앞에 놓고 있었다. 뭘 그리려는 것일까? 흰 종이는 텅 빈 천지와 같아, 붓을 대면 무에서 유가 나오고 그림에 그린 사람의 마음이 영원히 남게 된다. 인간의 육체는 결국 흙으로 돌아가지만 그림은 그렇지 않으며 그린 사람의 내적 세계도 영원히 존재한다. 무사시는 결투를 완전히 잊고 있는 듯했다.

여관 주인이 조용히 문을 열었다.

“무사시 님, 그림 그리시는 데 방해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정신이 돌아온 무사시가 응대했다.

“아, 주인장,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어서 들어오게나.”

“아닙니다. 무사시 님, 오늘 아침에는 그만 그리시지요. 시간이 다 돼갑니다.”

“알고 있네.”

주인이 재촉을 마치자, 이번에는 그의 딸이 와서 재촉을 해댔다. 그녀는 무사시에게 번의 배가 벌써 두 번이나 재촉을 하러 왔다고 알렸다.

무사시는 다 그린 수묵 산수화를 주인에게 선물하고 버드나무와 백로를 그린 또 한 장의 그림은 선장에게 주었다.

해협의 조수는 급류처럼 빨랐다. 바람도 강하게 불었다. 무사시는 배에 앉아 전방을 보며 선장에게 물었다.

“조금만 있으면 도착하겠지?”

“이 정도 바람과 조류는 별 거 아닙니다.”

“그런가?”

“그렇긴 해도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네요.”

“하긴 그렇지.”

“벌써 진시가 지났어요.”

“몇 시쯤 후나도에 닿겠나?”

“아마 사시(巳時: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쯤 닿을 겁니다. 아니, 사시가 좀 넘겠는 걸요.”

“그러면 딱 좋네.”

그러고서 무사시는 뱃바닥에 버려진 노를 보고 선장에게 가져도 되냐고 물었다. 선장이 승낙하자 그는 작은 칼을 뽑아 무릎 위에 놓인 노를 깎는 데 열중했다.

후나도는 기껏해야 2천 평방 미터 정도 되는 작은 섬이었다. 북쪽은 높은 언덕이어서 소나무가 많았고, 남쪽은 평탄한 모래톱이었다. 바로 언덕부터 해변까지가 그 날의 결투장이었다. 그리고 모래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증인들과 관리들이 벌써 나무와 나무 사이에 장막을 쳐 놓고 있었다. 약속한 진시가 이미 두 시간이나 지나, 모두들 기다림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무사시가 왔다!”

해변을 지키던 번사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 소리를 듣고 사사키 고지로가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먼저 증인들에게 예를 올린 뒤, 조용히 해변을 향해 걸어갔다.

배가 해안에 닿기 전에 무사시는 바닷속에 뛰어들어 빠르게 모래톱으로 걸어갔다. 고지로가 그를 보고 먼저 입을 열었다.

“무사시인가?”

무사시는 물 속에 선 채로 빙긋 웃었다.

“당신이 고지로요?”

고지로의 눈빛은 살기가 등등했고 두 눈동자는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무사시의 눈빛은 깊디 깊은 호수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두 사람 다 바닷물 속에 우뚝 섰다. 무사시가 노를 깎아 만든 목검 끝으로 물보라가 쉴 새 없이 튀겼다. 고지로가 고함을 질렀다.

“무사시!”

“…….”

“무사시!”

무사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겁을 집어먹은 것이냐, 아니면 다른 꿍꿍이 속이 있는 게냐? 어쨌든 너는 겁쟁이다! 한 시진이나 약속에 늦다니! 너는 결투에 늦는 것이 장기인가 본데, 나는 그런 수작에 넘어가지 않는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것이다. 후대에 추한 이름을 남기지 않도록 당당하게 죽음을 맞아라. 자, 와라, 무사시!”

고지로는 긴 칼을 뽑아드는 동시에 칼집을 바닷물에 던졌다. 이걸 보고 무사시가 입을 열었다.

“고지로, 당신이 졌소.”

“뭐라고?”

“승부는 이미 갈렸소, 당신이 졌소.”

“그게 무슨 소리냐?”

“당신이 승산이 있다면 왜 칼집을 버렸소? 칼집을 버렸다는 건 목숨을 버린 거나 마찬가지오.”

“헛소리 마라!”

“안 됐지만 고지로, 당신은 운이 다했소.”

“잔말 말고 덤벼라!”

“좋소!”

무사시는 바닷물을 박차고 고지로 왼편의 모래톱으로 달렸다. 고지로가 모래톱을 따라 뒤를 쫓았다. 무사시의 두 발이 막 모래톱을 밟자마자 고지로는 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칼끝은 아슬아슬하게 무사시의 머리 위를 스쳤다.

무사시는 계속 바다를 등지고 있었고 고지로는 바다를 마주 보고 있었다. 정오의 햇빛이 수면에 반사되는 통에 고지로는 지형상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었다. 고지로는 잔걸음으로 이동했다. 무사시도 느릿느릿 앞으로 발을 옮겼다. 갑자기 무사시가 두 발을 굴러 공중제비를 돌았다. 고지로는 급히 허공에 칼을 그었다. 한 줄기 붉은 핏자국이 튀었고 고지로의 눈에 웃음이 떠올랐다.

사방이 다 고요했다. 소나무가 쏴아, 소리를 내고 흰구름이 유유히 지나갔다.

무사시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지로가 열 걸음 떨어진 모래톱 위에 누워 있었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사실, 그가 쓰러지기 전에 본 핏자국은 무사시가 머리에 매고 있던 붉은 끈이었다.

무사시는 묵묵히 고지로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그의 코에 손가락을 댔다. 아직 숨이 남아 있었고 금세 미간을 폈다.

“구할 수 있겠군.”

무사시는 내심 한숨을 돌렸다. 그는 자신과 무예가 막상막하인 이 검객이 이번 대결에서 목숨을 잃는 걸 원치 않았다. 무사시는 땅에 엎드려 장막 쪽을 향해 예를 표한 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목검을 들고 북쪽 해안으로 달려가 배에 몸을 실었다. 점차 멀어지는 그 조각배가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이상이 요시카와 에이지가 묘사한 ‘간류도 결투’의 압축된 전말이다.

계속해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해 보자. 우선 왜 무사시와 고지로는 결투를 해야 했을까? 단지 유명해지는 게 목적이었으면 사적으로 대결하면 그만이지 관리와 번사들까지 동원할 필요는 없었다. 이밖에 많은 옛 문헌들이 이 거창한 결투의 과정에 관해 상세한 기록을 남겼지만 유독 결투의 원인은 밝히지 않았다. 무엇 때문일까?

먼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정리해 보자.

규슈 부젠국(후쿠오카 현)의 번주는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였고, 그와 그의 부친 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齋)는 모두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중용된 다이묘였다. 그리고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아케치 미츠히데(明智光秀)의 사위인 동시에 일본 역사상 유명한 호소카와 가라샤(細川珈拉莎[1563~1600: 전국시대의 유명한 여성 천주교 신자. 세키가하라 전투 때 적의 포위를 받자, 기독교인은 자살을 못 한다는 이유로 가신에게 가슴을 찌르게 해 생을 마쳤음.)를 아내로 두었다. 아케치 미츠히데가 오다 노부나가를 시해한 ‘혼노사(本能寺) 사변’ 후,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장인의 회유를 거절하고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섰다. 하지만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즉시 마음을 바꿔 토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접근했고 나중에 세키가하라 대전에서 공을 세워 부젠국을 상으로 받았다. 호소카와 타다오키는 또한 일본 다도(茶道)의 창시자, 센 리큐(千利休)의 일곱 제자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호소카와 가문은 봉록이 40만 석에 가까운 거대한 번이었고 영지가 바뀐 뒤에는 대외 전쟁은 뜸해졌지만 내부 분쟁이 빈번해졌다. 이른바 내부 분쟁이란 번주 일파와 번주의 셋째 아들 호소카와 타다토시(細川忠利) 사이의 대립을 말한다. 그들이 대립하게 된 건 번주가 천주교 예수회 신자들을 박해했던 반면, 아들은 그들을 보호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의 총 인구는 약 2천 5백만 명이었으며 천주교 신자는 약 50만 명이었다.

사사키 고지로는 번주가 총애하는 무술 사범이었고 미야모토 무사시는 호소카와 타다토시의 최고 가신과 오랜 인연이 있었다(호소카와 타다토시의 최고 가신은 무사시의 아버지, 신멘 무니사이의 제자였다). 또한 고지로가 후나도에 타고 간 배는 번주가 특별히 하사한 것인 반면, 무사시가 탄 배는 호소카와 타다토시 일파가 마련해 준 것이었다. 이밖에 평생 뜻을 이루지 못한 무사시는 만년에 구마모토(熊本) 번 번주에게 몸을 기탁해 분에 넘치는 후대를 받는다. 이때의 구마모토 번 번주가 바로 호소카와 타다토시였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 보면 간류도 결투는 ‘대리 전쟁’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래서 결투를 마치고 무사시는 번주 일파의 추격을 피해 또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나야 했다.

그날 무사시가 두 시간을 지체했다는 설에 대해서는 사실 매우 흥미로운 자료가 있다. 그의 양자 미야모토 이오리가 세운 ‘고쿠라 비문’에는 무사시가 섬에 늦게 왔다는 내용이 없다. 45년 뒤 나온, ‘간류도 결투’의 증인 누마타 이에(沼田家)의 『누마타 이에 일기』(沼田家日記)에도 역시 그런 기록이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69년 뒤, 무사시의 제 3대 제자의 구술을 바탕으로 기술된 『무사시 소전』(武藏小傳)을 봐도 무사시가 늦었다는 류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면 그가 결투에 늦었다는 설은 도대체 언제부터 등장했을까? 110년 뒤의 『이천기』에 와서야 그런 내용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 설은 과연 신빙성이 있을까?

그밖에도 결투 당일, 무사시가 사용한 목검은 정말 그가 바다를 건너면서 칼로 깎아 만든 것일까? 무사시의 배는 시모노세키(下關) 항에서 출발했고 시모노세키 항에서 후나도까지는 겨우 2킬로미터 거리에 불과했다. 그날 바람이 거세고 파도가 높았다 해도 항해는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겨우 30분 동안에 무슨 수로 노를 깎아 목검을 만든단 말인가? 하물며 무사시가 그날 사용한 목검은 길이가 126.8센티미터에 달했다.

당연히 우리는 요시카와 에이지가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고 탓할 수 없다. 어쨌든 요시카와 에이지의 『미야모토 무사시』는 무사시의 구도(求道)의 정신을 그리는 데 중점을 둔 소설이지, 그의 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요시카와 에이지가 참고한 기본 문헌은 『이천기』였다. 하지만 나는 ‘무사도’의 정신을 위반한, “무사시가 일부러 늦었다”는 설이 미심쩍은 설이란 걸 분명히 해두고 싶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지 무사시의 명예를 지키고 싶어서이다.

‘간류도 결투’ 후, 무사시는 스스로 살인을 자제했다. 사실, 엄격히 따져보면 25세 이후 무사시는 결투의 방식을 바꿔, 가벼이 상대의 생명을 빼앗지 않고 가볍게 찌르는 데 그쳤다. 그렇지 않으면 아예 상대에게 공격 기회를 주지 않았다.

‘오사카 겨울 전투’와 이듬해의 ‘오사카 여름 전투’는 난세였던 전국시대의 피날레였다.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두 차례 전쟁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족을 철저히 궤멸시켰다. 일반적으로 공인된 견해에 의하면 당시 31세였던 무사시가 ‘오사카 전투’에, 그것도 패군(敗軍)인 토요토미 파에 속해 참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전쟁에 관한 기록을 뒤지면 어디에도 무사시의 이름은 없다. 이밖에 무사시의 또 다른 양자, 미키노스케(三木之助)가 ‘오사카 전투’ 발발 4년 뒤, 혼다(本多) 가에 고용된 걸로 봐서는 설혹 무사시가 정말 ‘오사카 전투’에 참전했다 해도 토요토미 파의 일원이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혼다 가는 대대로 토쿠가와 막부를 신봉한 제후 가문이며 미키노스케가 모신 주군은 히메지(姬路) 성의 성주 혼다 타다토키(本多忠刻)였다. 그리고 타다토키의 정실은 토요토미 히데요리의 본처였던 센히메(千姬)로서, 그녀는 본래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손녀였다. 오사카 성 함락 전 구출된 센히메를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시 혼다 타다토키와 짝지어준 것이다. ‘세키가하라 대전’ 후, 토요토미 히데요시 편에 섰던 무장들은 그나마 아직 관직에 오를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오사카 전투’ 때는 상황이 이미 바뀌어, 난세를 끝내려는 의지가 강했던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맹렬히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잔당을 색출, 토벌하고 있었다. 만약 무사시가 토요토미 파의 일원이었다면 혼다 가문도 결코 그의 양자를 고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무사시는 아마 ‘오사카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29세부터 55세까지 무사시의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학자들도 단지 무사시가 47세 되던 해,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아홉째 아들인 나고야(名古屋) 성 성주 앞에서 그의 가신과 결투를 벌였음을 고증했을 뿐이다. 55세 되던 해에는 토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인 마츠에(松江) 번(시마네[島根] 현) 번주와 검을 겨루기도 했다. 중년에 접어든 이후의 무사시는 이미 천하에 널리 이름이 알려졌던 걸로 보인다.

‘시마바라의 난’이 폭발했을 때, 무사시는 마침 북(北) 규슈 고쿠라 성에서 초빙 무장직을 맡고 있었다. ‘시마바라의 난’은 농민과 기독교 신도들이 연합해 일으킨 반란이었다. 무사시는 이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슨 이유에선지 최전선에 나갔다가 반란군의 투석 공격에 다리를 다쳤다. 그래서 전공도 못 세우고 먼저 후방으로 물러나 상처를 치료해야 했다. 나중에 무사시는 이 일에 관해 다이묘인 아리마 나오즈미(有馬直純)에게 편지를 써보낸다. 사실, 다이묘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 부상 때문에 공을 세우지 못한 걸 푸념할 수 있는 정도였으니 당시 무사시가 이미 사회적 명사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무사시는 왜 끝내 야규 신가게류 일족처럼 쇼군의 휘하에 들어가 검술 사범이 되지 않았을까? 혹은 왜 검성 카미이즈미 노부츠나처럼 우수한 제자들을 키워내 역사에 길이 남을 검술 유파를 창시하지 않은 걸까?

이 점에 대해 교토예술대학 교수이자 일본 전통화가인 오노 ?(大野叔嵩) 선생은 무사시가 남긴 수묵화의 선(線)에 근거해 그가 왼손잡이였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간단히 말해 무사시는 왼손잡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검술을 널리 전파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양자 미야모토 이오리조차 “사실 나는 양부께서 전수하신 검술을 습득하지 못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내 생각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보통의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 검객의 비결을 파악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전국시대 말기부터 토쿠가와 막부 초기까지 무사시는 줄곧 관리가 될 기회를 찾아 동분서주했고 각지의 다이묘들과 교류를 갖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일반인들과 다른 체격과 왼손잡이라는 특징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검술을 전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명성이 높아질수록 무사시는 오히려 고독해졌다.

무사시는 평생 목욕을 싫어했고 머리는 산발에 늘 맨발이었으며 여색을 매우 기피했다. ‘간류도 결투’ 후 28년 동안의 그의 삶은 거의 공백 상태로 남아 있다. 이 기간, 무사시의 내면에 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또한 그의 신변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이 모든 것들이 다 수수께끼다. 단지 아이치 현 이남에서 북 규슈에 이르는 지역에 무사시의 일화와 전설이 남아 있어 이로부터 추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무사시의 일생은 마치 물결 가는 대로 흘러가는 부평초 같았다.

무사시는 57세에 구마모토 번 번주, 호소카와 타다토시의 초청을 받아 구마모토 번에서 만년을 보냈다. 만년의 무사시는 비록 관록(官祿)은 없었지만 생활이 곤궁하지는 않았다. 이 당시는 전국시대가 이미 끝나고 전국시대의 다이묘들이 모두 토쿠가와 막부의 관할 아래 지방 자치를 담당하는 번주로 바뀌어 있었다. 번주는 오늘날의 도지사에 해당한다. 무사시의 양자, 미야모토 이오리는 아카시(明石) 번 번주의 최고 가신으로서 관록이 4천 석에 신분도 상당히 높았다. 무사시는 원래 편안하게 양자의 집에 기거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멀리 바다를 넘어 규슈 중부의 구마모토 번까지 갔으니, 우리는 저절로 ‘간류도 결투’의 내막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호소카와 타다토시는 54만 석의 다이묘였으므로 당연히 무사시를 부양할 능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무사시에게 얼마나 봉록을 주었을까? 당시 실정을 보면 검술 사범의 봉록이 기껏해야 3백 석을 넘지 않았다. 이것을 너무 초과하면 다른 신하들에게 불만을 살 염려가 있었다(야규 효오고조[柳生兵庫助]도 겨우 6백 석을 받았다). 호소카와 타다토시는 무사시에게 최고 1천 석까지 줄 수 있다고 암시했지만, 무사시는 있어서는 안 될 시기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붓을 들어 조건을 적었다. 말 한 필과, 자기 신분에 걸맞는 갑옷, 무기를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필요 없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결국 무사시의 처우는 아래와 같이 정해졌다.  

신분: 빈객(賓客)

봉록: 17인분, 쌀 2백 석

거처: 구마모토 성 성밖 千葉성 옛터

무사시보다 두 살 밑이라 그와 같은 세대에 속했던 호소카와 타다토시는 유일하게 그를 공경한 다이묘였다. 무사시의 거처를 개조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매사냥을 나갈 때면 꼭 무사시를 불러 함께 즐겼다. 무사시가 만년에 가장 좋아한 문구는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였으니, 여기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란 곧 호소카와 타다토시를 가리켰다. 아마도 이때가 무사시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평화로운 나날은 길지 않았다. 겨우 일 년만에 호소카와 타다토시가 병사했기 때문이다. 평생에 유일했던 지기를 애도하기 위해 무사시는 『병법 35조항』을 집필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구마모토 시 서쪽 교외의 긴부(金峰) 산에 2년 동안 칩거하며 『오륜서』를 완성했다. 죽기 전에는 자기 수양의 글, 「독행도」(獨行道)를 짓기도 했다. 이밖에도 그는 담담한 풍격의 수묵화, 소박하고 우아한 도검 소도구 등을 남겼다.

마지막 숨을 내쉬기 전, 무사시는 억지로 일어나 앉아 의관을 단정히 하고 칼을 챙겼다. 그러고는 한쪽 다리를 세우고 긴 칼로 몸을 지탱한 채 엄숙히 죽음을 맞았다. 향년 62세였다. 무사시의 유언대로 입관할 때는 갑옷을 입혔고 장지(葬地)는 호소카와 가 번주들이 ‘참근교대’(參勤交代)를 위해 에도를 오가는 대로 옆에 정했다. 그는 황천에서도 호소카와 가 번주들을 호위할 수 있길 바란 것이다.


Comment ' 9

  • 작성자
    Lv.96 來人寶友
    작성일
    05.10.10 10:20
    No. 1

    긁어다 올리셧던 일일이 치셧든지 간에 참으로 수고하셧읍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궈징밍
    작성일
    05.10.10 10:24
    No. 2

    제가 번역한 거야요. 이런 게시판에 긁어 올리거나, 베껴 올리는 건 무례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6 來人寶友
    작성일
    05.10.10 10:49
    No. 3

    문체가 상당히 읽기에 편해서 한담내용으론 정성이 너무(?)들어간듯 싶기도 하고 내용의 짜임새도 또,분량도 대단한지라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한 10여년 전에 미야모도무사시를 소설로 (3권자리였는데 작가는 기억이 안나네요) 읽고는 개인적으로 약간(?) 조사를 했고 대다수의 전문가(?)의 표현으로는 아니 평가로는 현대로 치면 무사시는 검도 3단정도의 실력이다. 란 평가를 보았죠. 제가 생각해도 무사시는 이도류라는 특징과 불패(?)라고 하는 전적 그리고 유명한 일화들로 인해서 과대평가된 면은 있는것 같습니다.

    무협지를 보면 알수있듯이 숨겨진 기인들이있는데다가 무학은 비무냐 생사결이냐의 차이 또는 싸움은 상대적인 것이라 (가위*바위*보 처럼요).....게임의 캐릭터라면 정해진 스텟치와 고정된 액션과 스킬로인해 승패가 거의 정해져있지만 (물론 콘트롤도 어느 정도는 작용하지만) ...... 무인의 강약을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는 남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강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승자가 강자인 것이다'란 말이 있듯이 자신이 패할 싸움은 피하는 것(표시 안나게요)이 강자로 남는 길이겟죠..^^

    성별로 남자인 한사람으로 유전자레벨의 문제인지 프라이드나 K-1 혹은 강자에대한 동경이 있음을 부인하지 못하는.....O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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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북성거사
    작성일
    05.10.10 10:51
    No. 4

    오. 미야모도 무사시의 일을 이토록 자세히 적어주실줄 몰랐습니다.
    좋은 글을 감사드립니다.

    전에 일본 효고켄에 가보니 그의 동상이 있더군요. 젊잔고 절제되기로는 검성 스구하라 보쿠덴이 꼽히지만 그의 삶은 무사시 만큼 파란 만장하지 못했고 굉장히 평탄했습니다. 무사시는 그런 면에서 어린시절 양친을 여인 슬픔과 좌절을 극복하고 검을 통해 자기완성의 길을 갔다는 점이 참 매력적이지요. 스구하라 보쿠덴은 검도의 완성이 꿈이었습니다.

    무사시와 보쿠덴의 차이는 보쿠덴이 실수를 별로 하지 않는 사람인데 비해 무사시는 실수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무사시는 자기의 작은 실수들을 통해 인생의 큰 방향을 탐구하고 성장해 나갔다는 점에서 참 존경스러운 인물입니다. 요시가와 에이지의 소설이 다소 신격과나 과장에 매몰된 부분이 있지만 일본인들이 그 소설을 많이 읽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마음속에 무사시릉 이상적인 무사상으로 그리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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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Lv.1 우니드
    작성일
    05.10.10 10:55
    No. 5

    아....정말 대단하십니다...박수쳐드리고 싶네요..ㅇㅅㅇ/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32 매은
    작성일
    05.10.10 10:58
    No. 6

    수고하셨고, 감사합니다.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어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현성(玹成)
    작성일
    05.10.10 11:05
    No. 7

    굉장히 흥미롭고 재미있었습니다. 단숨에 읽어내려갔네요.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이건 자료실로 가도 될듯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6 사도치
    작성일
    05.10.10 11:25
    No. 8

    아.. 정말 좋군요..
    어렸을 때 미야모도 무사시를 읽고 또 읽고 했는데.. 그당시 무협지를 좀 봤기 때문에 무협이 이런 식으로도 써질 수 있는 것이구나.. 하고 느꼈거든요..
    이글을 읽으니 어려서 읽었던 미야모도 무사시의 막연했던 이미지가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아서 참 좋습니다.
    가끔은 우리 무협중 한두편은 이 미야모도 무사시와 같은 명작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램이 있는데..

    언젠가는 그런 무협이 나올 수 있겠지요..

    그리고 직접 번역하셨다니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0 효렴
    작성일
    05.10.10 13:43
    No. 9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쌍검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검법이 '이천일류'라는 이름을 통해서 여기저기에 쓰이고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실 미야모토 무사시도 쌍검을 쓴적은 거의 드물다고 합니다. 말년에 그가 말하기를...

    "쌍검은 너무 무거워서 진정한 적과의 대치는 힘들다."

    라고 말한 부분이 있다고 하네요.(저도 그냥 들은겁니다만... 후대의 명인들도 이 의견에는 찬성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수준이 낮고, 여러명과의 대전에서 그는 쌍검으로 무서운 실력을 펼쳤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미야모토 무사시는 자신의 자화상을 직접 그려서 남깁니다. 온몸에 힘을 빼고 있는듯한 특이한 자세. 그렇습니다. 탈력, 또는 소력이라고 하는 무인의 경지로서는 극치라고 하네요.

    무의 근간은 자연에 가까워지는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인위적인 삶을 살고 있지요. 그렇다면 자연에 가까워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인위적인 인간의 본능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10m 건물에서 떨어지면 큰 부상을 입습니다. 하지만 고양이는 죽지 않죠. 그것은 고양이가 본능을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착지 순간에도 몸을 경직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그것을 정확히 깨달았으며, 자신의 자화상에 깨달음을 남겼습니다. 사실 수많은 명인들도 쉬이 극복하지 못하는 인간의 본능을 극복했다는 증거를 남긴거죠.

    이것만으로도 미야모토 무사시는 훌륭한 검객이었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요?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알아본 정보를 띄워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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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782 한담 아저씨도 밥값 해야지.....아저씨도 밥값 해야지..... +10 Lv.75 밀양박가 05.10.10 1,021 0
28781 한담 카암님께 한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2 Lv.90 효렴 05.10.10 29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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