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까지만 해도 판타지 장르의 트렌드는 ‘회귀’였습니다. 사실 말하자면 꽤 많은 바이트 낭비;를 해야 할 정도로 할 말이 많은 소재이긴 합니다. 우연찮게도 (사실 우연도 아니지만) 많은 작가들이 ‘리플레이J’라는 만화에 영향을 받았다고들 할 때, 저는 ‘리플레이’라는 소설(켄 그림우드의 소설, 앞서 언급한 리플레이J의 원작)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Groundhog Day) 역시 비슷한 무한루프를 소재로 다루는 작품이며, 이런식의 과거회귀 내지는 루프를 주 소재로 삼는 작품들이 트렌드였던 때가 있었다는 사족이지요. 사족입니다만... ‘시간 태엽’을 추천하기 전에 좀 긴 이야기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네. 소설 ‘리플레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선.
리플레이의 주인공 제프는 심장마비로 쓰러진 직후, 25년 전의 젊은이로 돌아갑니다. 지금보면 당연한 이야기들, 과거로 돌아가 ‘미래’의 정보를 이용하여 성공하는 드라마가 그 앞에 펼쳐지지요. 지금 독자 여러분에게는 이미 식상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뭐, 이 소설이 나름 ‘원조주물럭’에 가깝다고 해도, 이미 여러 비슷한 후발주자;;를 접한 여러분에게는 벌써 지루하고 낡게 여겨질 수 있겠습니다. 음, 네. 처음 반 권까지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인공의 뻔한 성공신화는 금세 끝납니다. 그리고 리플레이라는 소설은 거기부터 시작입니다. 남은 한 권 반의 내용 동안 그런 '미래에 대한 정보, 그에 따른 대성공'들은 그저 부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당연하지요. 다른 할 이야기가 많거든요. 앞서 잠시 언급한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경우는 루프 자체가 소재라서 그것을 영화 내내 되풀이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주지만, 리플레이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소재 자체가 아니거든요. 소설 리플레이를 혹시 보실 분들을 위해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언급 않기로 하겠습니다.
어쨌든, ‘회귀물’들의 문제는 여기 있습니다. 사랑의 블랙홀은 한 편의 영화로 끝나는 이야기이고, 이 소재를 한껏 활용하여 이런저런 재미를 만들어주었고,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지만 많은 국내 작가들의 회귀물은 장편소설임에도 그 소재를 우리고 또 우리고 또 우려먹는 것 외에 다른 것을 그다지 보여주고 있지 못한 것이지요. 그저 지금까지 나왔던 소위 양판소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대개는 주인공이 강해지고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기 위한 더 편리한 ‘주인공 보정’을 하나 더 던져줄 뿐입니다. 더 나쁜 것은, 처음 주인공이 죽거나 과거로 회귀한 시점, 즉 '현재'로 돌아간 이후 스토리는 산으로 가고 바다로 가는 경우까지 있다는 겁니다. 이쯤되면 할 말이 더 없어지지요.
뭐, 그런 이야기들도 나름의 즐길 거리가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복제하기 시작하면 그런 즐길거리도 서서히 물리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독자들은 다른 트렌드를 찾아 떠나버리겠지요. 소위 트렌드에 따라 쓰여진 작품들 중에 명작이 잘 나오지 않는 이유입니다. 당연한 소리죠.
시간 태엽은 이런 면에서 볼 때, 소재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작가는 분명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며 그 이야기를 극대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시간 태엽' 즉 시간을 거스르는 주술을 사용합니다. 더구나 이 이야기는 정통 판타지의 배경에 잘 녹아나 있으며, 잘 꾸며진 소설적 장치로 1부 후반에 (미리 짐작할 여지도 충분히 주어진 상태로) 멋지게 등장하며 지금까지 진행된 이야기들을 한데 묶어 다시 읽게 만드는 힘도 가지고 있습니다. 1부 진행을 하며 공들여 묘사해놓은 등장인물들을 차례차례 죽여가며 독자들의 원성을 굳이 산 이유는, 마지막에서 큰 감동과 2부를 기다리게 하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중세풍의 다소 느슨하지만 실로 독특한, 정통 판타지라 불러 마땅할 세계관.
절제되고 낭비없는 묘사와 설명.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등장인물들.
가볍지 않고 진중한 소재에 대한 접근.
결코 작위적이지 않으면서 장편다운, 잘 꾸며진 구성과 스토리.
시간 태엽을 여러분께 다시 추천해 올립니다. 1부가 완결된 지금, 더욱 처절하게 아름다운 그 모습을 드러낸 판타지의 세계로.
http://novel.munpia.com/16014
가시지요.
Commen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