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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성(castle) 에 대해서.

작성자
Lv.9 캄파넬라
작성
08.04.17 08:27
조회
2,422

석기 시대부터 외세 침략을 막기 위해 축성 기술과 토목 공사 기술이 사용되어 왔습니다. 9세기까지만 해도 지금의 성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바이킹족의 침략에 대응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성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봉건 정치 권력의 분산도 축성이 성행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9세기에서 15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럽 전역에 수천개의 성이 축조되었는데 1905년에 실시된 프랑스 정부의 조사에 의하면 프랑스에만 10,000개 이상의 성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봉건 시대에는 지방 귀족이 법규와 명령을 만들었으며 바이킹족과 같은 약탈자로부터 주민들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귀족들은 약탈자를 막고 지역 병력이 활동할 수 있는 안전한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성을 축조하였습니다. 성의 방어력이 부각되자 다른 일면인 공격성은 크게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성은 직업 군인, 특히 외부 지역을 관리하는 기병의 기지 역할을 하였고 국왕의 중앙 권력이 약해질 때에는 수많은 성과 거기에 거주하는 병력이 정치적 배경이 되어 주기도 했습니다.

유럽의 성

9세기 초 지역 귀족들은 유럽 전역에 걸쳐 성을 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왕과 왕의 봉신들이 많은 성을 소유하고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성들은 지역 귀족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축조한 것들이었습니다. 지역 귀족들은 야만족의 위협을 구실삼아 자신들의 축성을 정당화했지만 실제로는 축성을 통해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려고 했습니다. 당시 유럽에는 전략적인 방어 수단이 없었고 강력한 중앙 권력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지역 귀족들의 이러한 축성이 가능했습니다.

유럽에서 성을 건설한 예로 프랑스의 프아투 지역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지역에는 바이킹족의 침략이 시작되기 직전인 9세기 경에 3개의 성이 있었는데 11세기 경에는 39개에 이를 정도로 축성이 성행했습니다. 짧은 시간 내에 성을 건설할 수 있어서 축성은 유럽 전역에서 성행했습니다. 대포가 등장하기 전까지 성 안에 주둔한 방어군은 어떠한 공격자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전투에 임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 전역에 걸쳐 성을 건설하고 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대규모 군사를 보유함으로써 적이 침략했을 때 안전하게 공동으로 막아낼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끊임없는 교전만 일어났습니다.

성의 발전

초기 성은 "모트와 외벽"의 형태였습니다. 모트는 보통 15미터 높이에 넓게 퍼진 평편한 언덕배기였습니다. 모트의 맨 꼭대기에는 큰 목재탑을 지었고 모트의 아래에는 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외벽이 있었습니다. 이 곳에는 창고, 저장소, 임시 막사 등이 있었습니다. 모트와 외벽은 주위에 수로를 파고 물을 채워 넣어 만든 인공 섬과도 같았습니다. 모트와 외벽은 다리와 가파른 좁은 길로 연결되어 있었고 위기 시에 외벽을 사수할 수 없게 될 경우 방어군은 이러한 연결로를 통해 탑으로 철수하였습니다.

11세기에는 흙과 나무 대신 돌을 사용하여 성을 지었습니다. 모트 꼭대기의 목재탑은 셸 키프라고 하는 둥근 돌벽으로 대체되어 점차 탑이나 성채로 발전하였습니다. 낡은 외벽과 성채 주위는 돌 성벽으로 둘러싸여졌고 성문은 도개교와 내리닫이 창살문으로 요새화되어 성 내부와 연결되었습니다. 정복자 윌리엄이 축성한 초기의 런던 탑은 이러한 성채 유형을 대표적인 예입니다. 런던 탑은 거대한 사각 구조물로서 처음에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었지만 나중에 주위의 이목을 끌기 위해 흰색으로 덧칠을 했습니다. 후세의 왕들은 성 주위에 성벽을 쌓고 오늘날 볼 수 있는 계량된 장비를 성 주위에 배치하여 성의 기능을 한층 더 강화시켰습니다.

동쪽으로 원정을 갔던 십자군 전사들이 원정 중에 익힌 축성 기술과 공성 기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귀향하게 되자 성의 설계도 한층 더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 성들은 두 겹 이상의 성벽으로 둘러싸였었고 성벽 내부에 성채를 축조하여 중심 성을 보호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성벽은 처음에는 사각 형 모양의 탑들로 세워졌지만 사각형 모양의 탑은 모서리가 쉽게 부서지고 성벽이 무너지기 쉬웠기 때문에 곧 둥근 모양의 탑으로 바뀌었습니다. 사각형 모양의 탑에 비해 둥근 모양의 탑은 적의 공격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벽과 탑의 꼭대기에 총안 흉장을 마련하여 위에서 훨씬 더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에 대포가 등장한 것은 14세기 초반이었지만 15세기 중반 이후가 되어서야 파괴력있는 공성 대포가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파괴력 있는 대포가 사용되자 성의 설계도 변경되어 수직으로 높이 세운 성벽이 낮고 경사진 성벽으로 바뀌었습니다. 15세기 중반부터는 왕권이 성장하면서 성들이 쇠퇴하였습니다. 11세기에는 정복자 윌리엄이 잉글랜드 전역에 세워진 모든 성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귀족들이 소유한 성을 빼앗았고 13세기 경에는 왕의 허락 하에서만 새로운 성을 축조하거나 기존 성을 증축할 수 있었습니다. 왕들은 성에 주둔한 무장 병력을 해제하여 반역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로 성들은 더 이상 귀족들의 거주지 역할을 하지 못하고 버려졌으며 점차 황폐해졌습니다. 반면에 토지에서 생산된 수확물을 도시로 운송해야 했기 때문에 요새화된 마을이 점차 중요해졌습니다.

성 축조

성을 축조하는 데에는 최소 1년에서 최고 20년이 걸릴 수도 있었습니다. 수세기 동안 성을 건설하는 일은 중요한 사업이었습니다. 유명한 석공들이 많이 부족했고 성을 짓는 일꾼들이 집단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대성당을 지으려는 마을과 성을 축조하려는 영주들 사이에 축성 기술자를 서로 차지하려는 경합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북웨일즈의 보매리스성은 1295년에 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완벽한 대칭으로 설계된 이 성의 축조에 엄청난 인원이 필요했습니다. 성 꼭대기를 건설하는 데만 대장장이 30명, 석공 400명, 일꾼 2000명이 동원되었습니다. 일꾼들은 주로 구덩이를 파고, 물건을 들어 올리며, 우물을 파고, 돌을 깨는 등의 일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성은 끝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가 축조한 콘웨이의 육중한 성은 건설하는 데 무려 40개월이 소요되었습니다.

성벽은 암석 조각과 회반죽이 섞인 부싯돌로 채워진 석조 외관으로 건설되었고 너비는 1.8-4.8미터에 이르렀습니다.

성 방어

성을 방어하는 기본 원칙은 공격군의 노출과 위험을 최대화하는 반면 방어군의 노출을 최소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잘 설계된 성은 소규모 군대로도 효율적으로 방어하고 장기간 버틸 수 있었습니다. 물자를 충분히 보유한 방어군은 성을 견고하게 방어하여 지원군이 도착하여 적을 물리치거나 적의 물량이 바닥나고 질병 또는 전투 피해 등으로 인해 후퇴할 때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성채

성채는 복합적인 구조물로 되어 있는 대규모 성곽 내부에 있는 작은 성입니다. 이 성채는 요새화되어 있어 성주가 거주하곤 했습니다. 외곽 성벽이 무너지면 방어군은 성채로 철수하여 최종 방어 태세를 취할 수 있었습니다. 성이 많이 있을 경우에는 원래 요새였던 성채부터 복합적인 구조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성채의 복합적인 구조는 성채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외곽 성벽과 탑까지 포함하며 확장되었습니다.

성벽

돌 성벽은 화염에도 잘 견디며 화살과 다른 발사물도 잘 막아냅니다. 적은 사닥다리나 공성 탑과 같은 장비가 없이 가파른 성벽을 올라올 수 없었지만 성벽의 꼭대기에 있는 방어군들은 적을 겨냥하여 활을 쏘거나 물건을 던질 수 있었습니다. 완전하게 노출되어 있는 적은 방어군과는 달리 위를 향해 화살을 쏘아야 했기 때문에 전투에서 아주 불리했습니다. 절벽이나 고지대에 건설된 성의 성벽을 공략하기는 훨씬 더 어려웠습니다. 성문과 성벽의 출입구는 가능한 작게 만들어져 성의 방어력을 한층 더 증대시켰습니다.

탑은 성을 수비하는데 유리한 곳에 세워졌으며 성벽의 모퉁이와 성벽 주위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건설되었습니다. 탑은 성벽 보다 높이 세워졌기 때문에 탑에 주둔한 방어군들은 성벽 아래로 화살을 쏠 수 있었습니다. 모퉁이에 세워진 탑에서는 방어군들이 두 면의 성벽을 수비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성문 양측에 탑을 세워 적으로부터 성문을 수비했습니다. 일부 성은 간단한 탑에서부터 시작하여 복합적인 성벽, 내부 성채 및 추가 탑 등을 갖추면서 점차 발전된 형태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흉벽

성벽과 탑은 방어군이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계속해서 발달되었습니다. 방어군들은 성벽 꼭대기 뒷면의 플랫폼에서 일어서서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벽 위쪽에 틈을 만들어 방어군이 화살을 쏘거나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적들과 싸울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 틈에는 나무로 만든 덧문이 달려 있어 안전하게 싸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발사 구멍을 만들어 궁사들이 완벽하게 보호된 상태에서 화살을 쏠 수 있게 했습니다.

적이 공격할 때에는 호드(hourd)라는 나무단을 성벽의 꼭대기나 탑에서 내밀어 성의 상위 부분을 보호하였습니다. 호드를 덮은 상태에서 방어군들은 안전하게 성벽 아래의 적을 향해 화살을 쏘거나, 돌을 던지거나, 뜨거운 액체를 부을 수 있었습니다. 호드 꼭대기의 잠복처는 불이 붙지 않기 위해 축축하게 젖어 있었습니다. 돌로 된 호드라고 할 수 있는 돌출 총안을 성문 위나 기타 중요한 지점에 구축하기도 했습니다.

수로, 해자 및 도개교

적이 높은 성벽에 올라올 수 없도록 성 둘레의 바닥에 수로를 팠습니다. 이 수로에 물을 채워 해자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수로와 해자로 인해 적군이 성벽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게 되었습니다. 갑옷을 입은 군사는 얕은 물에 빠지더라도 익사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해자가 있으면 공격군들이 땅굴을 파는 중에 무너져서 갱부들이 익사할 수 있기 때문에 성벽 밑을 파기가 어려웠습니다. 공격자들이 급습하기 전에 먼저 해자의 물을 빼 내고 수로를 채워 넣어야 공성 탑이나 사닥다리를 성벽에 놓고 위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성에 주둔한 사람들은 수로나 해자에 걸쳐 놓은 도개교를 통해 필요할 때마다 들어오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위기 시에는 도개교를 올려 수로를 다시 만들고 벽을 봉쇄하였습니다. 도개교는 성의 내부 기계 장치로 끌어 올렸습니다.

내리닫이 창살문

내리닫이 창살문은 단단한 창살로 성문 통로의 출입을 차단하는 장치였습니다. 성문은 성을 방어할 수 있는 견고한 수비 위치인 문루 내부에 있었고 성문 통로는 문루의 터널을 거쳐야 했습니다. 터널의 중간이나 끝에는 내리닫이 창살문이 설치되어 있어 유사 시 적의 침입을 차단했습니다. 내리닫이 창살문을 끌어올리는 기계 장치는 문루의 꼭대기에 있었으며 삼엄한 보호를 받았습니다. 보통 내리닫이 창살문은 육중한 목재나 철로 만든 창살이었고 이 창살 사이로 방어군과 공격군은 화살을 쏘거나 칼로 찔러 서로를 공격했습니다.

망루

견고한 성에는 외부 성문과 내부 성문이 있었고 두 성문 사이에는 망루라고 하는 개방된 영역이 있었습니다. 망루는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외부 성문을 통해 침입하는 공격자들이 속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공격군은 일단 망루 내부로 들어오면 외부 성문 밖으로 달아나거나 계속 싸워 내부 성문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공격군은 방어군의 화살을 맞거나 다른 발사물의 포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방어군

평화 시에는 적은 수의 군사들이 성을 방어할 수 있었습니다. 야간에는 도개교를 들어올리고 내리닫이 창살문을 내려 효율적으로 성문을 잠궜습니다. 그러나 급습의 위협이 있으면 성을 방어하는 데 훨씬 더 많은 군사가 투입되어야 했습니다.

공격자들이 급습하거나, 해자의 물을 빼고 수로를 채워 급습 준비만 하는 경우에도 궁사와 석궁병은 성벽과 문루에서 화살을 쏘아야 했습니다. 공격 시 적에게 부상을 입혀 사기와 공격력을 떨어뜨리고 적에게 발포하여 큰 피해를 입혀 공격자들을 격퇴할 수 있었습니다.

공격군과 실제로 백병전을 하게 될 경우 검병으로 구성된 강력한 군대가 필요했지만 돌을 던지거나 용기에 뜨거운 물을 담아 쏟아 붓는 데는 일꾼들이 필요했습니다. 또 파손된 성벽을 수리하거나 화공 무기로 인해 발생한 화제를 진압하는 데도 일꾼이 필요했습니다. 적극적인 방어는 성에서 기회를 노리다가 출격하여 포위하고 있던 적군을 급습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축 중인 공성 탑이나 트레뷰셋 투석기를 불사르면 적의 급습을 지연시키고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비상 시에는 시골의 농부들이 방어에 가담하였습니다. 군인들처럼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활이나 칼을 능숙하게 다루지도 못했지만 많은 잡역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성 공성

성과 요새화된 마을이 확산되고 그 전략적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성채를 점거하거나 방어하는 것이 중세 말기의 일반적인 군사 활동이 되었습니다. 소규모 군대가 성을 사수할 수는 있었지만 성을 점거하려면 대규모 군대가 필요했습니다. 공격군은 성 주위의 지역을 지배하면서 지원군을 물리치거나 성채를 바로 급습하거나 적어도 성을 빈틈없이 포위하는 데 대규모의 군대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는 데는 비용이 많이 들었습니다.

적군이 성으로 접근해 오면 지역 주민들은 보통 음식과 무기 등 귀중한 물품을 소지하고 성 안으로 후퇴하였습니다. 그러나 공성이 길어질 것 같으면 식량을 절약하기 위해 전투 능력을 갖추지 못한 소작인들은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공성 중에 식량을 절약하기 위해 사람들을 마을로 내보냈다는 기록도 많이 있습니다. 영국의 헨리 5세가 루앙을 포위했을 때 방어군들은 식량을 절약하기 위해 약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내쫓고 이들이 방어선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항복을 협상할 때까지 수많은 노인, 여자, 아이들이 몇 달 동안 도시와 영국군 사이에서 먹다 남은 음식을 찾다가 굶어 죽어갔습니다.

특히 성이나 마을의 인구가 부족한 경우, 적군이 접근해 오면 항복과 그 조건에 관한 협상이 즉시 이루어졌습니다. 공격자들은 협상이 실패할 경우 성채를 습격할 기회를 심사 숙고했습니다. 급습이 저지되거나 너무 위험한 것으로 판단되면 공격자들은 성을 봉쇄하고 공성을 시작했습니다. 도시를 향해 공성 대포를 쏘는 것으로 공식적인 공성이 시작되었음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합당한 이유없이 후퇴하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로 간주되었으므로 후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대규모 공성은 사회적인 행사와 같았습니다. 15세기에 일어난 노이스의 공성은 불과 몇 달 동안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격자들은 술집과 테니스장이 있는 대규모 야영장까지 건설하였습니다. 공성에 참여하는 귀족들은 아내와 식솔까지 데려와서 편안한 생활을 누렸고 근처 마을의 상인과 장인들도 몰려와서 상점을 열고 장사를 했습니다.

공성 형식

이 시기에 벌어진 전쟁의 특징은 성과 마을이 급습으로 인해 함락되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입니다. 급습은 보통 자포자기한 행위였고 반역 행위 또는 비밀 작전에 주로 활용되었습니다. 방어군이 아주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지 않은 한 급습의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전쟁 규칙과 명예에 따라 공성을 잘 이용하여 비교적 적은 손실로 성을 통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방어군이 싸우지 않고 성을 넘겨주는 것은 배신이었기 때문에 공성은 장기간 지속되었고 성벽의 손상도 심했습니다. 성의 소유자가 안에 없으면 성주 또는 성 관리 장관이라고 하는 부관의 책임 하에 지원 군대가 오지 않을 경우 오랫동안 싸운 뒤 예의를 갖추어 항복할 수 있었습니다. 성주는 종종 자신의 권한과 항복을 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는 조건을 정확하게 명시한 계약서를 요구했습니다.

드문 경우이긴 하지만, 항복이 불가능하거나 가치가 없다고 여겨지면 습격에 성공한 후 무자비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일반 사병들과 성 안에 있던 주민들까지도 학살했고 성이나 마을을 약탈했습니다. 포로로 잡은 기사들은 살려두고 나중에 몸값을 받았으며 모든 공격군들은 약탈품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러한 방법을 공성에도 사용하여 일정한 공성 기간 후에 방어군들이 협상하여 항복하도록 자극하였습니다. 1417년에 영국의 헨리 5세는 오랜 공성 끝에 캉시를 차지한 후 방어군의 끈질긴 저항에 대한 응징으로 그의 군대로 하여금 전체 도시를 약탈하게 하였습니다. 이 때 성직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살해되었습니다. 그 다음 목표인 본빌성에서는 공격군과 수비군이 모두 더 이상의 지원병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방어군은 7일 동안 성을 지킨 후 공격군에게 성을 넘겨주었습니다.

크라크데슈발리에는 중동 십자군 전사들의 성 중에서 가장 유명했으며, 아직도 현재의 시리아에 인상적인 건축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성은 십자군 정복 기간 동안 신전 수도 기사단의 수호를 받았으며, 1271년 이집트 아랍인에게 함락되기 전까지 12번이 넘는 공성과 130년 이상 지속되는 공격을 견뎌냈습니다. 이 성이 함락된 사실은 의외였지만 방어군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싸우지 않았다는 점은 그 당시 일반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아랍족은 크라크데슈발리에의 주 성문을 공격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주 성문을 파괴해도 좁은 통로를 지나 훨씬 더 강력한 성문을 뚫어야만 성을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들은 남서 모퉁이의 높은 탑 아래를 파고 들어 남쪽을 공격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외부의 공격을 저지하는 성벽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훨씬 더 튼튼한 중앙 성채가 있었기 때문에 공격하기 전에 전략을 세워야만 했습니다. 공격군은 항복 하라는 신전 수도 기사단장의 메시지를 묶은 비둘기를 성 안으로 날려보냈습니다. 수적으로 열세이며 구원병이 올 희망이 거의 없던 방어군들은 이 메시지가 속임수인 줄 알면서도 메시지의 명령에 따라 예를 갖추어 성을 넘겨주었습니다.

터널 파기

성이나 요새화된 마을을 점령할 때의 핵심은 외부의 진입을 막고 주둔군을 보호하는 성벽을 무너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한 가지 방법은 성벽 아래 부분을 파서 무너지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법은 성에 해자가 없거나 해자의 물을 뺀 경우에만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성이 견고한 암석 위에 건설된 경우에는 아래 지대를 팔 수 없었습니다.

광부들은 성벽까지 터널을 판 다음 성벽의 맨 아래까지 파 내려갔습니다. 터널은 버팀목으로 지탱되었습니다. 파낸 흙으로 인하여 천정에 가해지는 성벽의 하중은 버팀목으로 지탱되었으며 공격하기로 예정된 시간이 되면 버팀목을 태워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될 경우 버팀목이 타면서 성벽의 하중을 이기지 못하고 성벽의 일부가 붕괴되었습니다. 붕괴된 성벽은 군인들이 바로 성으로 습격해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되었습니다.

성벽을 붕괴시키기 위해 터널을 파는 일은 노동력과 시간이 많이 소모되는 작업이었습니다. 터널을 파는 방법을 잘 알게 된 방어군들은 설사 성벽이 붕괴되더라도 완전하게 방어망을 뚫지 못하도록 보조 성벽을 만들어 성벽을 강화했습니다. 방어군들은 또한 계략을 역이용하여 성벽 아래에 자체적으로 터널을 파서 적의 터널을 차단하려고 했습니다. 터널들이 서로 만나게 되면 지하에서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공성

포위하는 군대는 성 둘레에 수비 위치를 정해두어 내부의 군인이 달아나거나 돌격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근처의 농장과 마을도 포위자들이 점령했고 정찰병을 풀어 지원 군대가 접근하는지 살피며 식량을 약탈했습니다. 공격군의 지휘관은 상황을 파악하여 성을 포위하고 있을 것인지 적극적으로 공격 준비를 할 것인지 결정했습니다. 성의 방어군들이 굶주림에 지쳐 항복하면 공격자들은 방어군들을 안에 가둬 두고 지원 군대가 포위를 뚫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성을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  일부 성벽 밑을 파내려 갑니다.

*  돌을 던지거나 대포를 이용하여 성벽의 일부를 때려 부숩니다. 이 시대의 말기인 1450년 경까지는 대포를 사용하는 방법이 활용되지 않았습니다.

*  배수구(해자가 있는 경우 해자)의 일부를 채웁니다.

*  성벽을 오를 수 있는 공성 탑과 사닥다리를 만듭니다.

*  성문이나 다른 부분을 선택하여 공성 망치로 때려 부숩니다.

습격 준비의 작업 속도는 성을 점령해야 하는 긴급성과 항복 전망 및 사용 가능한 인적 자원에 비례하였습니다. 공격자들이 충분한 식량을 비축하고 있으며 지원군이 올 것 같지 않고 방어군들이 명예를 따라 항복할 것 같으면, 습격 준비 작업은 시늉뿐이었습니다. 공격자의 공급 물량이 부족하거나 언제든지 지원군이 올 것 같거나 방어군들이 완강하게 버티고 있으면 밤낮으로 습격 준비를 했습니다.

준비를 끝내고 나면 습격하기에 앞서 방어군들에게 마지막으로 항복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주었습니다.

공성 장비

공성 장비는 성벽이나 성의 기타 방어물을 제거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공성 장비의 사용으로 병력의 피해를 줄이면서 방어군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장비는 성벽을 헐어 넘어뜨리거나 돌파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간단히 펼칠 수 있는 사닥다리 외에 트레뷰셋 투석기, 망고넬 투석기, 공성 탑, 공성 망치 및 파비스 등의 공성 장비를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일단 틈이 생기고 공성 탑이 놓여지면 병사 중에서 자원병들이 습격을 주도하였습니다. 이 습격 군대는 엄청난 사상자가 예상되었기 때문에 "절망적인 희망"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군대에서 살아남은 군인은 진급, 칭호, 전리품 등과 같은 많은 보상을

받았습니다.

트레뷰셋 투석기는 보통 크고 육중한 암석 상자로 만들어진 평행추로 힘을 내는 투석기였습니다. 기다란 투척 지렛대를 큰 평행추에 기대어서 끌어내리고 커다란 돌을 장전하였습니다. 이 지렛대를 놓으면 육중한 무게가 아래로 떨어지면서 지렛대를 끌어올리고 높은 원호의 탄도에서 커다란 돌이 발사되었습니다. 이 지렛대로 발사된 돌은 곡선을 그리며 아래를 공격하는데 탑, 총안 흉장, 호드(hourd)의 꼭대기를 부수는 데 가장 적합했습니다. 돌은 포물선을 그리며 발사되었기 때문에 트레뷰셋 투석기로 가파른 수직 성벽을 파괴하기는 어려웠습니다. 트레뷰셋 투석기는 적의 화살 사정 거리 밖에 돌격대와 함께 배치되어 방어군이 이 투석기를 불태우지 못하도록 보호되었습니다. 또한 튜레뷰셋 투석기는 불 붙기 쉬운 나무로 된 지붕 등에 불 화살을 쏘아 적의 건물을 파괴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망고넬 투석기는 꼬인 밧줄이나 짐승의 가죽으로 장력을 이용하는 다른 유형의 투석기였습니다. 미늘톱니바퀴가 꼬인 밧줄을 연동시켜 팽창력을 만들고, 그것을을 놓으면 밧줄이 급회전하며 투척 무기를 앞으로 튀어나가게 했습니다. 이 무기가 육중한 저지 막대를 건드리게 되면 지렛대의 끝에 있는 바구니의 모든 돌이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저지 막대는 돌의 탄도를 변경하고 목표를 겨냥하여 맞추는 데 사용했습니다. 망고넬 투석기는 트레뷰셋 투석기에 비해 평평한 탄도를 갖고 있었지만 같은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많은 수의 망고넬 투석기로 성벽을 공격하면 쉽게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발사된 돌들과 무너진 성벽의 조각들은 배수구를 채워 공격자들이 성벽을 쉽게 넘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기도 했습니다.

공성 탑을 벽에 가까이 이동하면 탑에서 성벽의 꼭대기까지 트랩이 놓여졌습니다. 그러면 탑에 주둔한 군사들은 트랩을 통해 진군하여 방어군들과 백병전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탑은 아주 거대했으며 물에 젖은 가죽으로 보호 되어 있어 불이 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무거웠기 때문에 이동하기 어려웠습니다. 이 탑을 이동하려면 성벽의 토대 근처 말뚝에 미리 탑재해 둔 도르래로 앞으로 밀거나 잡아당겨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동할 지면을 미리 확보해 두어야 했으며 울퉁불퉁한 지면에 평평한 목재 판자로 길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궁사들은 탑 꼭대기에 있는 전투 영역에서 탑이 성에 접근하면 성 아래로 화살을 쏘았습니다. 일단 성에 가까워지면 군인들은 탑 내부의 사닥다리에 올랐습니다. 방어군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공성 탑의 급습에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방어군은 위협을 받는 성벽 부분을 보강하거나 트랩을 내리지 못하게 막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그들은 탑이 성에 접근하면 갈고리로 잡아당겨 넘어뜨렸습니다. 공성 무기는 마지막 급습 순간까지 성벽의 목표 지점을 공격하여 습격에 대처하는 방어군의 준비를 분쇄시켰습니다. 탑의 공격자 그룹이 먼저 건너가게 되면 군인들이 트랩을 따라 계속해서 밀어닥쳐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공성 망치에는 앞부분이 철로 된 큰 통나무가 장착되어 있었습니다. 운반 장치에 이를 장착하고 성벽이나 성문 근처까지 이동한 후 성벽에 부딪혀서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타격의 힘을 이용하여 목재 성문의 외판이나 돌로 된 성문을 부수고 공격을 시작할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망치의 지붕은 젖은 가죽으로 덮여 있어서 화재로부터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공성 망치를 사용하는 것은 위험한 작업이었습니다. 위에서 적들이 커다란 돌을 떨어뜨리고, 물을 붓거나 망치의 주요한 부분을 태워서 파손시켰으며 공성 망치를 이동하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성문이나 도개교를 무너뜨려도 여러 겹의 내리닫이 창살문과 문루가 버티고 있었습니다. 1111년과 1112년 사이의 겨울 동안 벌어진 티루스의 포위 공격에서 아랍족은 갈고리를 던져 공성 망치를 잡아채고 성벽 밖으로 멀리 내던져서 현명하게 대처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아랍족은 적의 공성 망치를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궁사와 석궁병을 공격할 때에는 파비스라는 커다란 목재 방패 뒤에 몸을 숨겼습니다. 파비스 꼭대기에는 발사할 수 있는 좁은 구멍이 있어서 그 뒤의 숨은 사람은 방어자를 향해 화살을 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의 사자왕 리차드 1세는 파비스의 측면을 살펴보다가 석궁병이 쏜 화살에 맞아 어깨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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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왔습니다.

보통 ... 성에 대한 묘사력이... 절대적으로 떨어 지더군요.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에 대한 지식은 쥐꼬리 만큼도 없으면서 써 갈겨 대는 중 고삐리 양판소 보다가 짜증이 나서 한번 올려 봅니다.

하긴 ... 주인공이면 개나소나 3개월만에 익힌다는 10써클 마법 한방이면 성 전체가 증발해 버리는데 공성 무기랑 망루, 탑, 따위가 무슨 소용 이겠습니까?


Comment ' 5

  • 작성자
    Lv.6 하얀별님
    작성일
    08.04.17 09:58
    No. 1

    호오~ 자료 감사합니당~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6 쭈뱀
    작성일
    08.04.17 11:19
    No. 2

    우허허 ;; 베리베리 롱 ㅋㅋ 결국 다읽었...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2 숲속얘기
    작성일
    08.04.17 14:23
    No. 3

    오호~ 좋은 자료군요. 하지만 너무 중세 근대에 가까워서... 판금갑옷시대의 전쟁은 이미 상당히 형식적이다는 느낌이 좀 듭니다. 로마군이나 중국군의 성에 대한 자료가 있다면 더 좋을것 같은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심심꼬장
    작성일
    08.04.17 23:59
    No. 4

    좋은 자료 잘 읽었습니다. 괜히 아쉬운 마음에 몇 자 끼적입니다.
    위 글에서 언급되었듯이 공성전은 상당한 기간에 걸쳐서 벌어지게 되므로 공격측의 보급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됩니다. 따라서 보급부대를 기습하려는 방어측과 이를 지키려는 공격측간에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중세에 마상시합이 성행하였는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상시합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전쟁에 대비하고 전장에서 요구되는 기술의 숙련도를 자랑하는 자리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마치 칭기스칸이 사냥을 통해서 군사들을 단련했던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無識漢
    작성일
    09.01.30 23:09
    No. 5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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