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세계의 문파도 아니고, 관도 아니지만 예상치 못하게 대규모의 인원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존재합니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관아의 지독한 수탈과 조정의 폭정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스스로 모여 난리를 일으키는 경우입니다.
흔히 민중봉기.. 뭐 민란인데요... 고려조 명종조의 기록에 공주 명학소에서 망이, 망소이 등이 일으킨 봉기군이 1만여명을 넘었고 당시 정중부 정권에서 대군을 보냈지만, 수차례 패퇴를 거듭하다 간신히 진압하기도 합니다. 고려는 문종이후로 총인구가 약 350만~400만 정도에 해당하였던 국가인데도, 봉기를 일으킨 사람들이 1만을 넘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지요.
즉, 관이 아닌 다른 무력의 생성은 관의 수탈과 폭정에 견디지 못한 백성들의 봉기로 인해 규모가 커집니다. 통일신라 말기에도 원종과 애노의 난과 같이 백성들이 일으킨 봉기에 2만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조정에 항거하는 경우가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조정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민중의 봉기가 극단에 치달을 때도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명나라를 멸망으로 몰아넣었던 이자성의 난, 후한의 결정적 멸망을 불러오는 황건적의 난, 왕망의 신나라를 붕괴시킨 적미의 난 등. 관에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민란이 심대하게 커지는 경우도 있으며, 우리나라에선 민란에 견디지 못하여 외국에 군사원조를 요청하게 되는 구한말의 [동학농민운동사건]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한마디로 조정과 관의 폭정에 견디다 못해 죽기살기로 조정과 관의 무력에 맞서 스스로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전면전을 불사하는 경우에 속합니다. 따라서 민란의 경우에는 수천에서 수십만까지도 가능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민란의 규모가 가장 거대했던 것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당시 이들은 조선조정에서 청국에 군사원조를 요청할 정도로 규모가 극단적이었고, 그 인원이 수십만에 육박하였습니다. 이경우는 이미 열거한대로 관의 폭정과 수탈에 죽기살기로 전면전을 벌이는 경우에 해당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조정과 전면전을 벌이려는 목적으로 민란을 주도하는 것과는 다른 경우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조폭처럼, <왈자패>를 조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왈자패란 말그대로 조직폭력배의 옛 고어인데, 기록에 보면 왈자패는 수십에서 수백명이 두목과 행동대장 등을 두고 조직적으로 움직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기록에서 나타나는 왈자패는 태종실록(1406년)에 언급되는데, 시전에서 숱한 횡포를 부리고 금품을 갈취할 뿐만 아니라 유흥가를 잡고 인신매매와 살인, 고리대를 놓으니 포도청에서 치안을 안정시키기 위해 잡아들이라는 것에서 처음 언급됩니다.
이 조처로 잡혀서 붕괴된 왈자패가 대략 10여개의 조직이고, 그 인원이 2300여명에 달해 본보기로 두목급 수십 명을 처단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왈자패(조폭)은 우리나라로선 태종시대, 중국은 영락제 시대로 볼 수 있는 이 시기에 평균 1개 조직당 200여명에 가까운 인원이었고, 이들이 서로 뭉쳐서 대두령(마치 무협의 무림맹주와 비슷한 개념)을 선출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왈자패가 패싸움을 벌여 사상자가 수백 명이 넘게 남으로서 관이 개입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역시 태종때 처음으로 언급됩니다. 태종 12년(1412년), 오늘날 마포 일대로 보이는 시전과 육의전에서 왈자패 수백 명이 유흥가 상권을 놓고 다투다가 1백여명이 죽고, 1백여명이 부상을 당해 잡아들여 그 죄를 물어 두령 10여명을 처형했다는 기록이 등장합니다
조선시대 태종~세종대의 인구는 약 400~500만 정도의 수준이었음을 고려하면, 명나라에서는 이와 같은 조폭간의 상권분쟁이 꽤나 치열했을 수도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명나라 쪽의 왈자패에 대한 기록은 찾아본 적이 없어서 언급하기가 뭐합니다.)
태종조의 강력한 통치기반의 확립과 치안안정에 주력한 결과 왈자패들은 그들만의 규칙을 만들어 관의 무력이 개입할 정도로 큰 패싸움을 벌이지 않는 쪽으로 가면서 한동안 잠잠해집니다.
그러다 숙종조에 이르러, 이들 왈자패들은 검계(劍契)라는 또다른 조폭집단을 만들어 숱한 사고를 칩니다. 이때는 조정의 붕당세력과 밀착하여 이들이 심하게 정치성향까지 보여줍니다. 즉, 반대파의 대신을 제거하기 위해 뒤를 캐는 행동에서부터 암살을 하는 짓까지 합니다.
시장의 상권이나 유흥가를 중심으로 구역다툼을 벌이던 왈자패는 숙종대 이후로는 심해지는 붕당대립과 정치적인 상황의 변화에 따라 암살까지도 서슴없이 할 정도로 대담해지며, 이들은 심지어 조정과 지방의 관리까지 죽일 정도로 사태가 심각하게 비화됩니다.
숙종은 태종조와 같은 강력한 검계소탕(왈자패소탕)명령을 내리고, 수천 명이나 잡아들여 처벌하는 상황까지 오게 됩니다. 그러나 순조 이후의 세도정권기에는 왕권을 무력화하고, 권력이 특정 가문의 사유화가 되어가자 검계나 왈자패들이 이들의 뒷배를 받아 정치화가 되어 정치권력과 더욱 밀접하게 변해..
세도가들의 심부름꾼이 되어 시전의 상인들을 괴롭히고, 인신매매, 고리대, 자금회수, 암살 등 숱한 일들을 벌이게 되지요. 따라서 왈자패나 검계의 경우, 개별적으로 큰 조직은 수백 명까지도 가능하고. 서로 연계되어 대두령을 선출하는 등. 연맹화가 될 경우에는 수천 명까지도 가능합니다.
이들은 되도록 너무 큰 사고를 쳐서 관아의 개입을 부르지 않기 위해, 큰 싸움은 될 수있으면 밤에 벌이고 사람이 제법 많이 죽으면 시체를 불태우거나 땅에 묻어 증거인멸을 시도하는 등. 서로 간에 관아가 개입하는 요소를 줄이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흔적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살피면, 왈자패(검계-조폭)는 스스로의 사리사욕과 유흥가 상권을 비롯하여 고리대, 인신매매 등을 하면서 관(官)의 눈치를 많이 보게 되거나 그들이 개입할 근거요소를 차단해야 하는 입장이겠지요.
무협소설에서는 무림과 관은 불문율이라고 하지만, 역사속의 왈자패는 관이 제발 개입해주지 않았으면 하는 입장이겠지요. 지금의 조폭처럼요. 말하자면, 왈자패는 거의 범죄조직화된 범죄조직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의 경우에는 치안의 안정과 민생안정, 질서유지 등을 위해 왈자패가 하려는 행동을 규제하고 제약할 수밖에 없는 관계임을 알 수 있지요.
민중봉기(민란), 왈자패조직(범죄조직, 혹은 조폭)을 제외한, 또다른 무력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산채나 수채를 두고 움직이는 해적이나 비적(산적)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조정에서도 매우 골치를 썩히는 무력입니다.
예컨데, 해적의 경우에는 규모가 거대할 때는 수천 명에서 수만 명에 육박합니다. 고려말, 왜구들은 사실 일본열도를 근거지로 활동하던 해적들인데 이들은 당시 고려뿐만 아니라 원나라와 명나라에도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무려 5천명 이상의 인원이 조직되어 엄청난 규모의 약탈, 살인, 강간, 방화가 일어나고 국고로 운송될 조운선 등을 약탈하는 등. 가장 골머리를 썩혀야 했고, 토벌하기도 꽤나 벅찬 세력이었지요. 이들의 특징은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관군의 군사전력에는 무력으로 대항하고, 감당하기 힘든 막강한 대군이면 그들이 쳐들어오기 어려운 요새로 도망쳐서 농성을 펼치는 것이 보통이라 가장 골머리 아픈 무력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 존재때문에 등장한 것인 상단입니다. 지역에서 시장을 놓고 장사하는 사람이 아닌, 지역과 지역을 오가는 원행상인들은 호위무사들을 두거나 사병을 두었는데, 이들은 관아에서 개입할 수 있는 범죄나 사고를 치지 않기에 상단을 두는 것은 묵인했습니다.
대신, 이들이 상단을 운영하면서 조정에 그만큼의 세금을 바치게 되고. 조정(관)의 경우에는 이들에게서 큰 조세와 세곡이 들어오게 되므로, 수천 명의 사병을 두는 것을 묵인하기도 합니다. 상단은 지역과 지역을 오가는 원행장사꾼들이 비적이나 해적, 산적들의 기습이나 습격으로부터 상품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무력이므로 상단의 주된 적은 비적, 해적, 산적, 도적떼가 되겠지요.
사병의 경우에는 귀족출신의 인물이나 지역의 연고권을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는 지방호족이 갖게 되는 경우. 이 경우는 그 인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습니다. 당장 신라말기(고려 통일 이전)의 역사를 보면, 대호족 중에는 사병을 2만 명이나 갖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결과적으로 패권과 권력을 두고 큰 전쟁을 벌이게 되고, 스스로의 정권을 세우게 되지요.(견훤, 궁예) 이런 경우에는 조정에서 제압하기가 매우 어려워지게 되어 결과적으로 분리독립으로 흐르게 됩니다.
역사는 이런 상황을 두고 '전국시대'라고 부릅니다. 강력한 중앙정부의 약화나 소실로 인해, 지방의 연고권이 강한 토호들이 거대권력화로 이어져 스스로가 정권을 세우고 통일전쟁으로 치닫는 시대를 일컫죠.
학파나, 종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며, 무술을 익히거나 하는 도관의 경우는 사실 관의 개입을 부르지 않는 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대개 활동하면서 수천에서 수만의 인원을 두게 됩니다. 그들 중에 수제자 수재급, 준재급의 상당한 인물들은 대규모가 아니겠지요.
대개 평범한 범재이하의 인물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전쟁에서의 전투력은 아무리 대단한 무력을 지닌 자라도 죽기살기로 대드는 수백의 병력을 이기지 못합니다. 엄청난 칼바람으로 마구 베어내도 체력의 소진이 엄청날 뿐더러, 조직적인 교대공격과 협공에 밀리게되면 결과적으로 죽게 됩니다.
상황에 따라 이 경우는 조금 다른데...
국가라는 테두리에서 반란군과 진압군이 싸우는 경우에는 어느 한쪽의 장수가 용맹하여, 무력으로 수십 명만 조져도 나머지가 줄줄이 무너지는 상황도 일어날 수 있지만...
전혀 다른 체제의 국가와 국가가 서로 수년간 전쟁을 준비하고, 군사를 제대로 양병해서 정면으로 붙을 경우에는 무력으로 수십 명 조진다고 해서 와르르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변변한 장수도 없고, 정예병도 없이 몰릴대로 몰려 외로운 성하나 지키는 일반민중과 패잔병들이 더 무서운 항전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싸움에는 싸움을 벌일 때 생성되는 심력(심리적인 힘)이 두 상황에서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예컨데 위에서의 상황은 반란군이 승리하여, 정권을 잡으면 그 반대쪽은 역적이 되는 것이니 위에 있는 수뇌부들을 제외한 대부분은...
상황에 따라 유리한 쪽에 얼른 투항해 생존을 공고히 하려는 심리적 요소가 작용할 수 있는데 반해..
전혀 다른 체제의 외국세력과의 총력전쟁을 벌이게 되면, 그 전쟁에서 지는 순간... 내 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자신까지도 목숨을 잃거나 노예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아주 죽기살기로 싸울 수 있는 심리적인 상황이 형성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전투를 상기하면, 당시 일본군은 3만여명의 대군이었고, 진주성의 조선군은 겨우 3천에 불과하였음에도 전투양상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치열하게 진행됐고, 진주성 내에 있는 조선백성 모두가 필사적으로 맞서 싸웁니다.
전투라면 이력이 난 정예군인 일본군이 절박한 심리적인 힘으로 똘똘 뭉치고, 천혜의 요지라는 진주성을 기반으로 사력을 다해 격돌하자 결과적으로 밀리게 됩니다.
즉, 전투나 격투에 있어서 그것에 임하게 되는 심리적 상황에 따라 상대적으로 약하거나 낮은 전력을 갖고 있어도 예상외의 결과로 치달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무자비한 킬러가 집에 들어와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죽이려고 하면, 그것을 지키려는 가장의 심리는 매우 절박해지게 되고 같이 죽자는 심산으로 결사적으로 맞서게 되는 경향으로 치달아... 킬러가 예상치 못한 거센 반발에 밀려 평소의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패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닌데,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어떨 때는 상황을 풀어가는 요소로 작용합니다. 심력이 무시될 수 없는 것이 그것입니다. 아무리 단련된 수련과 이력이 난 경험을 가진 자라도 자신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이상한 상황에 빠져버리면, 전력이 감퇴되고, 그 틈을 상대적으로 못한 사람이라도 잘 비집고 들면 의외의 승리를 쥘 수도 있습니다.
전투나 격투는 무력(武力)과 지력(知力), 심력(心力)이 총체적으로 이뤄지는 합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두서없이 기나긴 글입니다만...
결론을 말씀을 드리자면, 무협소설에서 문파에 대한 설정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다르겠습니다만... 사람을 수십 명이나 격살하거나 상대할 수 있는 일류무인들로만 문파를 채우면 수백 명도 사실 너무 많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밑에 있는 수하들이나 제자, 혹은 문하생 등을 줄줄이 엮어서 합치면 수천, 수만 명도 가능하지요. 예컨데, 후한말기 오두미도의 경우엔 그 수가 4만여명에 달했고, 조선말기 동학교도만 해도 5, 6만명에 달했으며, 심지어 고려시대 불교 종파의 한 사찰의 승려가 수천 명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들 중에 불법에 제대로 정통하고, 통달한 사람은 수천 명 중에 수십 명도 되지 않고.. 무예를 연마하는 승무나 승병의 경우에도 수천 명 중에 수십 명 정도만이 일류무인 급으로 본다면 수하나 제자, 문하생, 그 줄기와 갈래까지 뻗어나온 인간관계까지 해서 수천, 수만은 가능하겠습니다만...
일단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한 종파의 실질적인 정예인원은 아무리 많아도 수백을 넘기기 힘들고... 대부분은 그들의 인간관계 속에서 나온 곁가지 관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정을 효과적으로 한다면 괜찮은데, 그렇지 않으면 개연성이 없겠지요.
보통 중국의 인구는..
수나라때는 대략 4천만~5천만(경우에 따라 6천만 정도로도 봄)
당나라때도 대략 4천만~5천만(경우에 따라 6천만 정도로도 봄)
송나라때는 대략 6천만~7천만(경우에 따라 1억으로도 봄.)
명나라 때는 대략 4,5천만~1억 2천(시대별로 다르나, 후기에는 1억 이상의 인구로 봄.)
중국의 인구는 수나라에서 명나라까지 평균 1억 이하의 인구를 보이다가, 청나라에 접어들어 몇배 이상으로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강희제때 2억 이상의 인구를 갖게 되니까요. 그러므로 실제 중국의 인구는 현대 중국의 인구와는 크게 차이가 납니다.
경우에 따라 본다는 것은 미집계된 인구..
즉, 산속에서 화전을 일구고 살거나 조정이나 관아에서 집계되지 못한 인구를 보는 경우입니다.
예컨데, 무림이란 존재를 이런 경우로도 볼 수 있는데..
조정이나 관아의 통제력이나 치안력에 들지 못하고 산속, 벽지, 도서지역, 머나먼 변방의 초지나 산야 등을 떠도는 유민들이라면 그 수가 많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학자들은 그 숫자를 대략 1,2천만 정도로 보는데... 이들이 산속이나 벽지, 도서지역, 변방의 초지나 산야에서 수천-수만의 체계화된 군사조직이나 무력조직을 갖게 되고.. 조정에선 이들을 통제할 수 없을 때, 이들의 우두머리에게 벼슬을 주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런 것을 이이제이라고 하는데, 이들의 세력이 너무 거대해져 통일된 중원왕조를 위협할수도 있기에 오히려 서로간의 싸움을 부추겨서 중원왕조를 위협하지 못하게 제약하는 외교기법을 이이제이라고 하지요.
오늘날도 중국의 치안력과 통제력이 상당히 미약하게 작용하는 소수민족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따라서 현대 중국보다도 못한 과거 수, 당, 송, 원, 명 시대에는 더 했을수도 있습니다. 무림과 관은 서로 불가침이다...
이러한 조건에 들기 위해서는 무림이 중원왕조의 치안력과 통제력이 거의 작용할 수 없는 변방의 산야나 초지, 혹은 도서지역이나 산간벽지 등으로 설정한다면 무림의 조직화된 세력이 수천, 수만이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당시 중국왕조들은 그들을 두고 번장이나 혹은 번족장이라고 하여, 적당한 벼슬을 주고 서로 다투게 만듭니다. 이는 5호 16국 시대와 남북조시대를 겪어서 그랬겠지요. 중국왕조들은 '자신들의 관아에서 통제될 수 있는 치안력에 있는 사람들은 최대한 그 권력과 힘으로 통제하지만... 그럴 수 없는 존재에게는 벼슬을 주고 경쟁을 시켜 힘이 자라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다반사였으므로..'
이들 간에는 암묵적으로 내정에 간여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 되어온 것이 사실입니다. 즉, 무협소설에서 주장하는 무림세력은... 실제 중국역사속에서 기준하면...
'번장, 번족장세력'에 가장 근접합니다.
이들은 실제 중원왕조에서 그 힘이 거대해져 위협의 요소로 다가오면, 그때가 되어야 수십 만의 군사를 일으켜 토벌을 하는 등. 건곤일척의 사력을 다한 대결을 펼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대개 이이제이 수법으로 견제합니다.
그래서 번장, 번족장세력들은 중원왕조에서 내린 벼슬하나를 갖고도 치열하게 다투게 되는데, 이유는 간단합니다. 높은 벼슬을 얻었다는 것은 그만큼 상대방의 세력이나 힘을 중원왕조에서 높이 평가한다는 소리이므로, 자존심이 상한 반대번족들이 싸움을 걸어 자신들의 세력이 높이 평가받으려는 투쟁이 지속되죠.
이런 상황이라면, 중원왕조에선 수십만의 군사를 무리하게 일으키면서까지 억지로 통제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뛰어난 누군가가 갑자기 거대집단을 이뤄 맹주가 되어나 왕이 될 경우에는 전력을 다해 수십만의 군사를 모아 칠 수밖에 없겠죠.
사실 위에서 거론한 왈자패의 경우, 조정의 통제대상이 되고 치안안정을 위해 당연히 제거하거나 통제할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나라안의 종파에서도 사고를 치거나 범죄를 저지르면, 당연히 통제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라 안에서도 오지나 산간벽지, 도서지역, 기타 변방의 초야나 산지에 위치하여 도저히 통제할 수 있는 여건이 미치지 못할 경우에는 번장제도(혹은 번족장)를 두어 벼슬을 주거나, 등용하여 경쟁을 유도함으로서 거대세력화가 되는 것을 막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소수번족들이 거느린 인원이 수십만이 넘을 때도 있고. 군사조직화가 되어 수천에서 수만 이상의 병력도 거느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관이나 중국왕조의 통제력의 범위에서 벗어난 이들이 사실상 무협소설에서 설정하는 무림세력에 가장 근접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제 개인적인 견해를 덧붙입니다.
지나치게 길었습니다만,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써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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