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ggun님께서 올리신 글을 보다가 생각이나서, 알고있는 바를 뚝딱거려봅니다. '-'; 사실 다루어야 하는 내용의 방대함에 비교하자면 거의 집모기가 사람한테 들러붙어 한번에 빨아낼 수 있는 피의 양만큼 미미한 축약본이지만, 설정을 위해 필요한 자료를 구하는데 있어 어떤 방향성을 제시할 수 있다면 이 글은 충분히 역할을 다 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을 겁니다.-또 그렇게 되길 바랍니다.
1. 탄생 - 돈.....아니 재물과의 질긴 인연. '귀족'
"마르크스 가라사데, 태초에 원시 공산사회가 있었나니......" 까마득한 먼 옛날, 수렵채집사회에서는 한 사람이 모을 수 있는 먹거리-재화-의 양이 도토리 키재기였습니다. 오늘 내가 토끼를 한 마리 잡았고, 옆집 친구는 세 마리를 잡았다고 쳐도 그 나물에 그 밥인 것이, 어차피 고기라는 건 냅두면 상하는 물건입니다. 게다가 이런 사회상에서는 사냥과 채집은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일입니다. '누가 더 많이 잡았느냐?'라는 질문 자체가 별 의미가 없으며, 전체 인구 100명 이내인 이런 사회에서는 혹 허탕을 친 동료가 있다 해도, 다른 구성원들이 대가없이 그를 보조해 줄수 있을만한 정서적인 연대가 가능합니다.
아직도 이러한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사회들(오지 탐험대 다큐에 흔히 나오는)을 살펴보면, 나이드신 어른이 장로 노릇을 하지만 실제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잡는 경우는 없습니다. 말그대로 오랜 경험을 쌓아 지혜를 체득한 어른으로 대접받는 것일 뿐, 마을의 구성원들이 갖는 힘은 거의 평등합니다.
귀족의 발생이라는 것은 결국 잉여생산물의 발생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넘어오게 되면 잉여생산물의 축적이 가능해지고 사회의 규모는 커집니다. 그리고 남아도는 재화는 더욱 큰 재화를 모아오는 수단이 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남들보다 조금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사람에게, 그러한 이점은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느 순간 부터는 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으로 자리잡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귀족의 탄생입니다. 이러한 관계로 전근대적인 귀족은 농경과 그 기반이 되는 토지에 깊은 인연을 두게 됩니다.
2. 고대-중세의 귀족
상술한 이유로, 초기의 귀족은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는 '대지주'와 그 의미를 구분하기 힘듭니다.(유목민의 경우라면, 동네에서 가장 많은 양,소,말,염소 등을 가진 집이 됩니다. 마사이족 같은 경우를 들 수 있겠습니다.) 많은 재산으로 점점 땅을 불려나가고, 그 불어난 땅을 경작하기 위해 땅이 없는 사람을 모아 부리는 형태로 그 권력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권력은 군사적인 형태로도 쉽게 전이가 가능하지요.
귀족들이 땅따먹기 하듯 자신들의 소유지를 늘려가는 것은 거의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자신의 토지를 스스로 경작하는 중소 자영농민의 몰락을 수반합니다.(윌마트 들어서는데 구멍가게들이 남아날 수가 없는 법이니까요.) 로마의 원로원이 자영농 몰락을 적절히 해결하지 못하다가-바로 이들의 토지 소유가 문제의 원인이니 자신들의 손을 털지 못하고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죠- 결국 공화적을 붕괴시키는 동인이 되는 사회문제를 누적시킨 것도, '앵글로색슨의 자유'를 누리던 잉글랜드 인들이 노르만 정복자들에 의해 순식간에 예속농으로 전락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의 사건들입니다.
이런 행태는 현대의 부동산 투기와 비슷합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땅을 시세 차익을 얻을 수 있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것이 투기)이 아니라, 땅 자체를 영속적인 수입의 대상으로 보고 투자를 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귀족적'부동산 사업은 근대적 자본주의가 발달할 때까지 꾸준히 계속됩니다. 중세 만을 놓고 본다 하더라도, 땅은 귀족들이 가진 자산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며, 그들이 귀족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마스터 피스였습니다.
토지의 소유가 지닌 저력(....)의 예로 비잔틴의 역사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비잔틴(동로마 제국)은 5세기 무렵의 격변에서도, 풍부한 레반트의 부를 바탕으로 살아남는데 성공했습니다. 로마시대부터 이어지는 원로원은 세력이 거의 미미했고, 비잔틴의 국부는 관료조직에 의해 징수되는 세금으로 충당되었습니다. 이때까지는 농가의 기능은 비잔틴의 발달한 도시들에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었습니다.
6~7세기 무렵, 파멸적인 전염병으로 인해 비잔틴의 도시들이 축소되고, 행정 능력이 떨어지자, 이러한 체제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신흥 강호 이슬람을 비롯하여 사방을 둘러싼 적들이 압박을 해오는 마당에, 군인들에게 줄 돈이 부족합니다. 군인들을 먹여 살리려면 도시에서 세금이 제대로 걷혀야 얘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전 국토를 테마(군관구)로 분할해버리고, 그 땅을 군인들에게 나누어주어 그 수입으로 봉급을 대신하게 한 정책입니다. 비잔틴 식의 봉건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군대가 현금대신 현물[...]로 봉급을 받게 되고, 플러스로 주둔지에 대한 애착(밥줄이니까요......)까지 갖게 되니, 군인들은 아랍인과 슬라브인들을 상대로 훌륭하게 싸워줍니다. 이것으로 비잔틴은 앞으로 800년을 더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지요.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황제의 힘은 약해지고, 테마의 사령관들이 강력한 군벌 귀족으로 성장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제외하면 말이죠. 콘스탄티누스 5세가 뒤늦게 수도와 가까운 테마를 분할하여 힘을 약화시키기 전까지, 비잔틴은 테마에서 일어난 군벌귀족들에 의해 끊임없는 찬탈과 쿠데타의 나락에 빠져듭니다.
토지의 소유는 이렇게 강력한 귀족을 만드는 힘이 됩니다.
3. 중세 전성기 (13세기) 이후, '돈 많이 번다고 귀족이냐?? 우리는 기사다!'
중세-라고 통틀어 말하지만 실제로 이 기간(서로마 멸망-5C-부터 르네상스-15~16c-까지의 1000년간)동안 일어난 변화들은 매우 다이나믹합니다. 그중 중세 말기에 일어난 변화를 꼽자면 '부의 근원으로서의 토지의 위상'을 들 수 있겠습니다.
복잡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내용은 간단합니다. 땅 말고도 돈 모을 수 있는 수단이 많아졌다는 뜻이죠.
잠깐 샛길로 빠져서, 중세 후기의 문화를 살펴보면, 유난히 로멘스 문학이 성행합니다. 옛날의 위대한 기사들-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 샤를르마뉴와 그의 기사들 등등..-의 활약상과 '숭고한 기사도'를 찬양하는 기사 문학들 말입니다.
본디, 귀족과 기사는 분리되어 있던 계층입니다. 물론 결혼을 통해 자신의 자식을 귀족으로 만들어 상류 계층으로 융화한 기사들도 있지만, 독일의 농노기사 계층(미나스테리알레스)의 예에서 볼 수 있듯, 귀족=기사라는 등식이 엄밀하게 성립하지는 않았습니다.
중세 전성기 이후에, 귀족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기사라고 칭하고, 서임식 같은 행사에 많은 돈을 쏟아 부으며, 로멘스 문학을 통해 숭고한 기사도의 이상을 공유하려 했습니다. 사실 기사도라는 것을 살펴보면 엄밀하게 하나의 개념으로 정립되지 않습니다. 혹자는 여인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누군가는 충성과 강건한 용기를, 어떤 이는 새련된 매너와 교양을 중요시합니다. 로멘스 문학은 대부분 이러한 여러 요소들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는 상황을 제시합니다. 하나로 정리된 개념이 아니라는 단적인 예입니다.
귀족들이 이처럼 '원래 안하던 전사 행세'에 몰두하고, 뚜렷하지 않은 모순된 이상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재정립하려고 시도한데는 그만한 압력이 있었습니다.
바로 토지 이외의 수단으로 돈을 모아, 때로는 귀족을 능가하는 수준의 부를 축적하는 시민들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옷차림을 비롯한 생활 수준으로 귀족과 귀족이 아닌자를 구별할 수 있었지만, 이 시기에 와서는 그런 구분이 무의미해집니다. 귀족들은 어떻게든 신분을 구별할 수 있는 규제-옷 색깔, 머리 모양, 신발의 길이 같은 시시콜콜한 것 까지-를 시도했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아예 시민층이 소화하지 못하는 다른 정체성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 수단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사도에 대한 집착입니다. 어쨌든 그 이후로도 토지에 기반을 둔 귀족들과, 자본에 기반을 둔 시민들의 엎치락거림은 계속됩니다.(물론 점이지대는 존재합니다. 귀족이면서 상공업에 손을 대는 자들도 있었고, 시민계층이면서 토지를 매입하는 자들도 있었지요.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전체적인 구도임을 생각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중세 후기는 귀족들에게 있어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점차 시민들에게 추월당하기 시작하고, 그들이 맡은 군사적인 임무는 점차, 하층민 출신인 용병들에게 옮겨갔습니다.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것은 위험하지만, 이러한 상황이 귀족들을 실체가 없는 기사도에 집착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해석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돈입니다 돈.
마지막, 세 줄 요약
-옛날에 땅 많이 가지고 있던 애들이 귀족이 되어 넘사벽을 만들었으나, 나중에 장사꾼들에게 추월당한 뒤에는 기사도 오덕이 되어 하악하악. 세상은 역시 돈!
P.S 써놓고 보니 이거 삭제 아니면 이동조치 당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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